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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
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
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
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우득신(禹得臣) 등 여섯 사람이 관에 올린 문서의 증거가 분명하니 묘지석을 보고서 증명하는 일은 매우 옳지 않다. 박가(朴家)의 장례지는 굳이 혐의(嫌疑)가 있는 곳에 쓸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산으로 다시 정하여 영원토록 마땅할 장소로 정한다면 참으로 효자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니, 이런 취지로써 이치를 잘 알아듣도록 깨우쳐 줌이 타당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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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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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택룡(金澤龍)
주제 : 분쟁과 조정, 사건 처리
시기 : 1616-07-24 ~ 1616-09-20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택룡, 정득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7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묘자리 분쟁, 산송(山訟)
조선시대 분묘(墳墓)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좋은 묘자리 즉 명당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분묘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도 덩달아 많아졌다. 이것을 산송(山訟)이라고 한다. 산송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는데, 다산 정약용은 지방 수령의 지침서로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싸우고 때려죽이는 사건의 절반이 산송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무덤을 어디에 결정하느냐에 따라 한 가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묘자리의 선택은 그만큼 중요했다. 더구나 묘자리는 이런 믿음 이외에 현실적인 이익과도 깊이 관련이 있었다. 무덤 주변의 산림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네 집안과 박씨네 집안 간에 산송이 발생한 것인데, 생질 정득의 조상 묘 주변에 박씨네가 산소를 조성하려했던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생질 정득은 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해결이 쉽게 나지 않아 오랫동안 예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산송에서 경상감사(慶尙監司)는 생질 정득 집안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판결문의 요지는 생질 정득 쪽에서 올린 문서의 논박과 증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묘지석(墓誌石)을 파헤쳐 규명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택룡이 자신의 생질을 위해 영주 수령에게 올리는 문서를 대신 써주었는데, 이 때문에 박가네의 원망을 듣게 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616년 7월 24일 맑음. 아침에 안개.
생질 정득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도산서원을 들러서 원리院利 보리를 보냈다. 우리 집은 1석 10두이다. 5두는 논복이 먹은 것이다. 또 1석을 보냈는데, 아들 김숙의 집에서 쓸 것이다. 금희영琴希英이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비婢들이 덕현에 가서 콩밭을 메었다. 명금이 영천에서 와서 딸의 편지를 받고 평안함을 알았다.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하여 임인이 왔다. 의원에서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산양의 편지가 산장으로 왔는데 이쪽으로 잊어버리고 보내지 않았다.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모르겠다. 걱정되어 견딜 수 없다. 장녀는 원당元塘의 송가宋家에 가 있다고 한다
1616년 8월 9일 맑음. 비 조금.
좌수 김의원이 와서 만났다. 추로주를 마시게 하고 이야기한 후 상리로 갔다. 명회가 구고에서 와서 대평과 요산의 편지를 받고 평안함을 알았다. 향교에서 제사지낸 고기[膰肉]와 술[福酒]를 보내 답장을 보내 사례했다. 김일金鎰이 찾아 왔다. 술을 주어 먹이고 보냈다. 누님에게 가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영천에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진운이 병으로 누워있고 그 집안에서도 전염병으로 대여섯 사람이 누워 있어 걱정이다. 그래서 가서 위문하였다. 우선 『초역焦易』 점을 쳤는데 점괘가 좋지 않아 일단 지켜보아야겠다.
1616년 8월 12일 맑음
아침에 산양山陽의 아들 김적의 편지가 시장에서 왔다. 천식이 곤담환을 복약한 후로 약간 덜해진듯하여 만약 더 나아지면 요산 집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추석에 중소重紹가 산장으로 나오면 말을 보내 데리고 간다고 했다. 말린 민물고기[乾川魚]와 새로 찧은 쌀을 보내 정을 표했다. 논복이 병이 나 신에게 제사지내러 요산으로 갔다. 정충남도 돌아갔는데,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고 편지는 쓰지 않았다. 박선윤이 만나러 왔다. 어제 안동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안동부사의 편지를 내게 주었다. 청몽석은 중국 수입 약재라 가장 비싸서 구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날 도산서원 추향 헌관秋享獻官 망단자望單子가 왔다.
1616년 8월 23일 맑음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인사하러 왔다.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들어온다고 하였다. 관에서 정득이 칭념稱念 받은 노비를 은닉하고 내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정里正과 관차官差가 감독하러 왔는데 산송 때문에 영주로 갔다고 대답하고 돌려보냈다. 저녁에 패자가 또 왔다. 송향손宋香孫이 와서 자기 아버지 생신 회음會飮에 초대하였지만, 사정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어질동·천실이 평해를 왕래하는 일 때문에 만나러 왔는데 다른 날을 다시 약속하고 되돌려 보냈다. 애남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이복李福을 시켜 김 상사金上舍에게 편지를 보내서, 경차관을 만나 덕룡을 칭념하자 어떻게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말로는 해주겠다고 하면서 도저히 돌보아 줄 뜻이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오천 김생원의 편지가 왔다. 정리의 집으로 보냈다.
1616년 9월 7일 맑음
새벽에 풍종이가 이 첨정 집에 가서 답장을 받아 왔다. 답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여종[婢子]을 정득이 침책侵責한 일을 칭념하는 일은, 첨정공이 돈을 주고 산 여종인 주질개注叱介·주질분注叱分을 잠아(埁兒 : 이첨정의 아들)에게 주어 사환하고자 하므로 경차관에게 칭념하여 얻은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은폐되었고, 잘잘못을 모르겠으니 돈아(豚兒 : 이첨정의 아들)가 있는 곳에 통고하여 처리하겠다.” 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 편에 예안으로 전송할 계획이다. 이날 아침에 이공李恭을 시켜 임당林塘의 물길을 내어 개울물을 끌어와 흐르도록 하였다. 가래[鍤]를 짚고 이리저리 거닐었다.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은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여,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는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오천川 이시李蒔의 초청장이 왔다. 그의 아우 이점이 알성시에 합격하여 다음달 9일의 도문연到門宴에 오라고 초청한 것이다. 광주 성안의(자는 정보)도 똑같이 초청장을 보내어 초청하였는데 상중이라고 사양하고 답장을 써서 보냈다. 충의위 이절(자는 중시)의 노가 내허(奈虛:내성의 시장)에 와서 지나가는 길에 편지를 전했는데,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내용이다. 운심雲深이를 시켜 원의 누님과 홍 생원洪生員 집에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답어가 왔다.
1616년 9월 20일 아침에 잠시 비. 낮에 맑음. 바람.
김응희가 알리지도 않고 고을로 들어갔다. 노배奴輩들이 매장하는 일로 산지동山枝洞에서 향도香徒를 하였다. 어린 아이들에게 바람에 떨어진 은행을 줍도록 하여 구워서 먹었다. 생질 정득이 이산伊山에서 와서 집 소식을 말로 전하였다. 아들 김숙의 편지는 원당의 큰딸이 있는 곳에 즉시 전하라고 했는데, 잉질개가 잊고 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매우 안타깝다. 산송 사건은 영천榮川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우득신禹得臣 등 여섯 사람이 관에 올린 문서의 증거가 분명하니 묘지석을 보고서 증명하는 일은 매우 옳지 않다. 박가朴家의 장례지는 굳이 혐의嫌疑가 있는 곳에 쓸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산으로 다시 정하여 영원토록 타당할 장소로 정한다면 참으로 효자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니, 이런 취지로 개유開諭함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또 아들 김숙이 예천으로 가서 덕룡의 구속을 구하기 위해 경차관에게 석방을 청하는 문서를 내어 주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또 적의 질병은 차도가 없이 수척하다고 한다. 생질 정득은 또 의송議送 일로 순영巡營에 갔다가 저녁 식사 후 이산伊山으로 돌아갔는데, 편지가 올 때는 나의 짐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 보내겠다고 한다. 전방헌全邦憲 역시 함께 왔다. 얼마 안 있어 마평馬坪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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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판결 후에도 계속되다
16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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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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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浮屠)자리를 차지하려 승려를 괴롭힌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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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백이 투장을 하다
176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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