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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석을 발견하다
1885년 10월 18~19일, 동쪽 봉우리 셋째 산기슭을 따라 계곡을 지나니 땅이 조금 평평해지며 양쪽으로 커다란 계곡이 나누어 펼쳐진다. 서쪽은 바로 압록강의 근원이고, 동쪽은 곧 토문강의 근원이니, 참으로 분수령이다.
그 분수령 가운데에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 위에는 가로로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아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경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이곳에 도착하였다.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 허량(허량), 박도상(박도상), 통관 김응헌(金應瀗), 김경문(金慶門).”
비석의 동쪽 가에는 골짜기를 따라 인공 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혹은 돌이나 흙으로 쌓아서 삼포(杉浦) 90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의 힘쓴 것을 생각해보니 그 매우 크다. 비석의 표면에는 얼음 파편이 엉겨 붙어 있어서 깎아내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피워 녹인 뒤, 3장을 인출(印出)하여 그 중 한 장은 장영에게 주고, 나머지 두 장은 품속에 넣었다.
이 때 음산한 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눈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길을 되돌려 오는데, 겨우 수 십 보를 가자 길이 흐릿해져 찾을 수가 없었다.
가차을봉(可次乙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하고 망망하여 큰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서 그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길을 가리키는 여러 사람들이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각자 길을 찾아 갔는데, 그 행렬을 멀리 바라다보니 어부가 새벽에 포구에 드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였다. 혹은 남쪽으로 몇 리를 가서 낭떠러지와 골짜기로 막혀서 망연히 되돌아오고, 혹은 동쪽으로 몇 리에 이르러 등성이와 언덕이 아득히 넓어 두려워 되돌아 왔다. 한갓 보이는 것이라곤 운무만 자욱하고,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므로 상하 간에 어두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늘빛은 어느덧 점차 어두워 일행의 인마가 하루 낮 밤을 굶주리고 피로한 나머지 더욱 마음이 두려워지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 청나라 관원 가원계도 또한 두려워 떨면서 손에 나침반을 들고, 단지 통사 권흥조를 부르며 말하기를,
“어느 쪽이 동남쪽인가?”
라고 하며, 그치질 않는다. 통사 또한 입과 입술이 바짝 말라 중군 최두형을 향해 말하기를,
“영감, 영감,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하였다. 허다한 인부들이 단지 통사가 앞에 가는 것만 믿고 따라가는데, 통사는 걸음걸음마다 고심하며 능히 방향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길을 찾는 것은 굳이 바라지 않고, 단지 바라는 것은 수목이 있는 속을 찾아서 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우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사방을 바라보아도 나무 하나 보이지 않으니, 바로 막다른 오지였던 것이다.
각자가 하늘을 찾고 아버지를 부를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남쪽에서 하늘빛이 잠깐 열리며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반쯤 드러났다. 길을 잃고 하루의 반이 지난 동안에 비로소 산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서로를 향해 축하하기를,
“하늘이 나를 살렸는가? 산신령이 나를 살렸는가?”
하면서 말끝마다 칭송할 뿐이었다. 비로소 생기가 돌아 통사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분간하도록 하니, 곧 말하기를,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봉(竪峯)을 향하여 내려갔다. 눈이 깊어 거의 무릎 위까지 찼으나,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지를 몰랐다. 이리저리 찾아 수봉의 막사에 이르렀는데, 날은 아직도 저물지 않았다.
이 날 모두 백여 리를 갔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굶주리면서도 모두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으니, 어찌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곧 왕령(王靈)이 지켜주신 것이리라. 이중하가 시 한 수를 지었다.
雪滿空江月滿天(설만공강월만천) 눈 내려 빈 강에 가득하고 달은 하늘에 가득한데
飄然立馬白山嶺(표연입마백산령) 표연히 백두산 봉우리에서 말을 세웠네.
殆非人力能來此(태비인력능래차)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全仗王靈直向前(전장왕령직향전) 온전히 임금님의 영험이 앞으로 인도함이었네.
拓地于今無李牧(척지우금무이목) 땅을 개척하려 한들 이제는 이목 같은 이가 없고
窮源從古說張騫(궁원종고설장건) 근원을 찾는 데는 예로부터 장건을 말하였네.
玉樓是夜寒何似(옥루시야한하사) 궁궐은 이 밤에 얼마나 차거우실까
回首觚稜杳一邊(회수호릉묘일변) 머리 돌려 궁궐을 바라보니 한 곳이 아득하여라.
또 시 한 수를 지어 신령의 도움에 감사를 드렸다.
密霧陰雲鎖萬重(밀무음운쇄만중) 짙은 안개 음산한 구름 만 겹이나 잠겼으니
深山日暮失歸踪(심산일모실귀종) 깊은 산에 날 저물어 돌아갈 길 잃었어라.
天門忽闢東南角(천문홀벽동남각) 하늘 문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열리더니
指路分明露數峯(지로분명노수봉) 여러 봉우리 드러나서 길이 환히 밝도다.
막사가 매우 좁고 추워서 노천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을 피우고 밤을 보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백두산일기(白頭山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이중하(李重夏)
주제 : 백두산 유산기
시기 : 1885-10-18 ~ 1885-10-1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이중하, 가원계, 권흥조, 최두형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36호
조선왕조실록
◆ 사냥꾼의 산신제 풍습과 산신령
사냥꾼들은 산을 신성한 성지로 여긴다. 속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달리, 산은 깨끗하고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또 산에는 주인인 산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허락을 얻어야 짐승을 잡으며, 그가 보호해 주어야 아무 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면 먼저 산신의 허락을 얻기 위한 고사(山祭)를 올린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러 가던 일행도 백두산에 들어가면서 산신제를 지내고 올라간 기록이 있다. 짐승을 잡은 뒤에도 반드시 감사의 의례를 지냈다. 위기를 넘긴 뒤에 감사의 제사를 올린 이 일기의 기록 또한 이러한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20세기 초까지도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으면 그 고을의 산신령을 잡았다는 죄목으로 수령이 형식적인 볼기를 세 차례 때리는 것이 관례였다. 예컨대 형식적이 태형(笞刑)으로 세 차례의 매를 맞고 나서, 호랑이의 크기에 따라 닷 냥에서 2,30냥의 상금을 받았다. 일반에서도 맹수의 왕인 호랑이야말로 산에 사는 신령(神靈)이라고 믿었으며, 이들의 탄생지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겼다. 무신도의 하나인 산신도(山神圖)에 산신이 호랑이를 심부름꾼으로 거느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이에 있다.
◆ 원문 번역
1885년 10월 18, 19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갔다. 이것이 바로 새로 개척한 길이다. 삼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마치 바늘이 찔러대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마구 때렸다. 나무가지를 구부리고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들이 기울어지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근근이 발을 디디면서 나아가 삼포(杉浦)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둔덕이 끝나는 곳이고 도랑이 처음 넓어지는 곳이다. 진영과 가원계에게 형편을 알려주고 다시 왼쪽 산록의 협곡을 따라 올라갔다. 여기서부터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높이 올라가 산길이 점점 가파르고 쌓인 눈은 더욱 깊었다. 삼포 위로는 개울가에 흙무더기를 쌓아 놓았기 때문에 이를 증표로 삼아 길을 갔다. 30리를 가서 이석포(裡石浦)의 사냥꾼 막사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밤 중국 관원 두 사람이 상의하여 우리에게 요청하였는데, 삼경에 밥을 지어 먹고 민정(民丁)으로 하여금 먼저 식량과 마초를 싣고 길을 열어 출발하면 저들과 우리 일행이 뒤따라 출발하여 곧바로 백두산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쌓인 눈이 정강이까지 차고 여기서 백두산까지 거리가 60리다. 깊은 밤에 가는 것은 인명에 관계되니 매우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그가 크게 화를 냈다. 대개 그 뜻은 처음부터 감계에는 뜻이 없고 나에게 행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여 우리가 가는 계획을 정지시키려는 데 있었다. 내가 최두형과 상의하여 드디어 한밤 중에 밥을 짓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일제히 산에 올랐다.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은 비쳤다 가렸다 하였다. 그런데 눈을 뚫고 길을 열었다. 대각봉(大角峯)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혹 실족하면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앞서 가며 짐을 짊어진 역부가 이와 같이 추운 혹한에 배가 고프고 얇은 옷을 입었으니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염려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냈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다.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이 더욱 감탄할 뿐이다. 나는 몇 리를 걸어 갔다. 그러나 눈이 깊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오위장 최오길이 말에 올라타 눈을 뚫고 절벽을 따라 나아갔다. 말이 넘어지고 혹 엎어지니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 오직 춘길과 이돌이 나를 뒤따르며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 위에서 시를 지었다. 男兒宦役摠難謀(남아환역총난모) 남아의 벼슬살이는 모두가 어려운데 夢想那期此遠遊(몽상나기차원유) 이 먼 곳에서 유람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積雪空山三百里(적설공산삼백리) 눈 덮인 텅 빈 산 삼백 리 길을 五更驅馬上峯頭(오경구마상봉두) 오경에 말을 몰아 정상에 올랐노라. 수십 리를 가니 길이 더욱 험하고 눈은 더욱 깊이 쌓였다. 앞서 간 최두형과 수행원 여러 사람이 모두 말에서 내려 눈 속에 섰다. 나도 말에서 내려 민정이 먼저 가서 길을 내도록 시켰다. 조금 후에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의 코고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 조금도 움직일 뜻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일제히 출발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밥을 지었다. 천천히 좇아오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모습이라 또한 가소로웠다. 수십 리를 위로 올라갔다. 삼나무도 점점 드물어졌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도착하였다. 한 포기의 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텅 비고 거친데 눈빛은 한결같이 흰 것을 깔아 놓은 듯했다. 이 때는 하늘 빛이 아직 밝지 않아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산의 모습이 점차 분명해지고 동쪽이 이미 밝아졌다. 찬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온 하늘이 흐릿하여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정말로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도 역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무산 사람 이종려(李宗呂), 김이헌(金利憲), 황학채(黃鶴采) 등은 평소 산길에 익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앞에서 인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민부(民夫) 등과 더불어 방황하면서 길을 찾아 헤매어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저들과 우리 일행이 모두 산 위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다. 눈바람이 몰아쳐 안주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음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둥글고 붉은 해가 동쪽 하늘에서 떠올랐다. 백두산이 짧은 순간에 눈앞에 전개되어 언덕, 골짜기를 낱낱이 볼 수가 있었다. 이때 마치 취했다가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멀었다가 밝아진 것 같기도 하니 모두 하늘과 신의 조화라고 하겠다. 나도 경이로워서 시 한 수를 지었다. 大冬持節白頭山(대동지절백두산) 한 겨울에 왕명 받고 오르던 백두산 길 風雪難分咫尺間(풍설난분지척간) 풍설이 흩날려서 지척조차 분간하기 어렵더니 頃刻豁然天宇霽(경각활연천우제) 잠깐 사이 탁 트여서 하늘이 맑아지자 一輪紅日着山顔(일륜홍일착산안) 뚜렷한 붉은 해가 산 위에 걸렸구나. 멀리 백두산 전체를 보니 아침 해가 쌓인 눈을 밝게 비추었다. 밝게 빛나고 조용한데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가득 어우러져 하늘에 솟아 있다. 마치 수정으로 만든 궁전과 같고 옥으로 지어진 세계와 같다. 사람의 마음과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며 공경하게 하고 삼가하여 두렵게 만들었다. 마침내 서로 정계비(定界碑)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나아갔다. 높은 산과 골짜기가 매우 많았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이 눈을 날려 곳곳에 쌓여 있다. 쌓인 것이 몇 천 년을 계속 내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매 번 이 계곡에 올 때마다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는 듯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말이 쓰러지고 사람이 넘어져 괴로운 곳이 몇 곳인지 모르겠다. 옛날의 험하고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말을 모는 것도 이것에 비하면 오히려 편안히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내가 너무 피곤하여 춘길과 이돌이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그들도 또한 힘이 빠지자 중군 최두형이 또 부축하여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30리 거리였다. 정계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공중의 세계로서 사방이 훤히 트였다. 오직 운무만이 깔려있을 뿐 어떠한 사물도 그 사이를 차단하지 않았다. 내가 시를 지었다. 天際峯頭咫尺分(천제봉두지척분) 하늘 끝과 산봉우리 지척에서 구분되니 瑤臺仙藥若將聞(요대선약약장문) 요대의 선약 찧는 소리 들리는 듯하네. 層巖仍積千年雪(층암잉적천년설) 층층 바위엔 천년 눈이 그대로 쌓여 있고 下界長鋪萬里雲(하계장포만리운) 하계에는 만리 구름 길게길게 깔려 있네. 箕子舊邦開小域(기자구방개소역) 기자의 옛 나라가 조그맣게 열려 있고 康熙短碣記遺文(강희단갈기유문) 강희제가 남긴 글이 비석에 남아 있네. 伏波銅柱終無計(복파동주종무계) 복파 장군 세운 비석 끝내 어찌할 수 없으니 撫劒西風送夕曛(무인서풍송석훈) 칼 어루만지며 서풍에 저녁노을 보내노라. 이 봉우리는 사각(四角)인데 듣자니 중앙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둘레가 80리나 된다고 한다. 항상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연못 가운데서 피어 올라 하늘에 가득 찼다. 대개 산의 연못은 변화가 끝이 없다.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는데, 바람과 눈이 하늘에 가득해 올라가 볼 수 없어서 매우 유감이었다. 동쪽 봉우리 셋째 산기슭을 따라 계곡을 지나니 땅이 조금 평평해지며 양쪽으로 커다란 계곡이 나누어 펼쳐진다. 서쪽은 바로 압록강의 근원이고, 동쪽은 곧 토문강의 근원이니, 참으로 분수령이다. 그 분수령 가운데에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 위에는 가로로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아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경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이곳에 도착하였다.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 허량(허량), 박도상(박도상), 통관 김응헌(金應瀗), 김경문(金慶門).“ 비석의 동쪽 가에는 골짜기를 따라 인공 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혹은 돌이나 흙으로 쌓아서 삼포(杉浦) 90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의 힘쓴 것을 생각해보니 그 매우 크다. 비석의 표면에는 얼음 파편이 엉겨붙어 있어서 깍아내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피워 녹인 뒤, 3장을 인출(印出)하여 그 중 한 장은 장영에게 주고, 나머지 두 장은 품속에 넣었다. 이 때 음산한 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눈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길을 되돌려 오는데, 겨우 수십보를 가자 길이 흐릿해져 찾을 수가 없었다. 가차을봉(可次乙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하고 망망하여 큰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서 그 끝을 볼수가 없었다. 길을 가리키는 여러 사람들이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각자 길을 찾아 갔는데, 그 행렬을 멀리 바라다보니 어부가 새벽에 포구에 드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였다. 혹은 남쪽으로 몇리를 가서 낭떠러지와 골짜기로 막혀서 망연히 되돌아오고, 혹은 동쪽으로 몇리에 이르러 등성이와 언덕이 아득히 넓어 두려워 되돌아 왔다. 한갓 보이는 것이라곤 운무만 자욱하고,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므로 상하간에 어두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늘 빛은 어느덧 점차 어두워 일행의 인마가 하루 낮 밤을 굶주리고 피로한 나머지 더욱 마음이 두려워지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 청나라 관원 가원계도 또한 두려워 떨면서 손에 나침반을 들고, 단지 통사 권흥조를 부르며 말하기를, “어느쪽이 동남쪽인가?” 라고 하며, 그치질 않는다. 통사 또한 입과 입술이 바짝 말라 중군 최두형을 향해 말하기를, “영감, 영감, 내가 어찌해야 합니다까?” 라고 하였다. 허다한 인부들이 단지 통사가 앞에 가는 것만 믿고 따라가는데, 통사는 걸음걸음마다 고심하며 능히 방향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길을 찾는 것은 굳이 바라지 않고, 단지 바라는 것은 수목이 있는 속을 찾아서 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사방을 바라보아도 나무 하나 보이지 않으니, 바로 막다른 오지였던 것이다. 각자가 하늘을 찾고 아버지를 부를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남쪽에서 하늘 빛이 잠깐 열리며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반쯤 드러났다. 길을 잃고 하루의 반이 지난 동안에 비로소 산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서로를 향해 축하하기를, “하늘이 나를 살렸는가? 산신령이 나를 살렸는가?” 하면서 말끝마다 칭송할 뿐이었다. 비로소 생기가 돌아 통사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분간하도록 하니, 곧 말하기를,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봉(竪峯)을 향하여 내려갔다. 눈이 깊어 거의 무릎 위까지 찼으나,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지를 몰랐다. 이리저리 찾아 수봉의 막사에 이르렀는데, 날은 아직도 저물지 않았다. 이 날 모두 백여 리를 갔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굶주리면서도 모두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으니, 어찌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곧 왕령(王靈)이 지켜주신 것이리라. 내가 시 한 수를 지었다. 雪滿空江月滿天(설만공강월만천) 눈 내려 빈 강에 가득하고 달은 하늘에 가득한데 飄然立馬白山嶺(표연입마백산령) 표연히 백두산 봉우리에서 말을 세웠네. 殆非人力能來此(태비인력능래차)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全仗王靈直向前(전장왕령직향전) 온전히 임금님의 영험이 앞으로 인도함이었네. 拓地于今無李牧(척지우금무이목) 땅을 개척하려 한들 이제는 이목 같은 이가 없고 窮源從古說張騫(궁원종고설장건) 근원을 찾는 데는 예로부터 장건을 말하였네. 玉樓是夜寒何似(옥루시야한하사) 궁궐은 이 밤에 얼마나 차거우실까 回首觚稜杳一邊(회수호릉묘일변) 머리 돌려 궁궐을 바라보니 한 곳이 아득하여라. 또 시 한 수를 지어 신령의 도움에 감사를 드렸다. 密霧陰雲鎖萬重(밀무음운쇄만중) 짙은 안개 음산한 구름 만 겹이나 잠겼으니 深山日暮失歸踪(심산일모실귀종) 깊은 산에 날 저물어 돌아갈 길 잃었어라. 天門忽闢東南角(천문홀벽동남각) 하늘 문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열리더니 指路分明露數峯(지로분명노수봉) 여러 봉우리 드러나서 길이 환히 밝도다. 막사가 매우 좁고 추워서 노천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을 피우고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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