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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그림으로 표현한 신화 속의 우리 호랑이

석향란


석향란 작가는 스토리테마파크의 호랑이 관련 이야기 소재를 모티프로 선인들이 인식하는 호랑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해주셨습니다. 첫째는 동물의 왕인 늠름함과 여인의 우아함을 겸비한 모습으로, 둘째는 깊은 산과 혼연일체를 이룬 신비한 산군으로, 셋째는 수호의 상징으로 담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던 동북아와 한반도 국토는 70% 넘게 산으로 되어 있어서 호랑이는 단군신화와 고구려 우현리중묘 벽화에서부터 불교 산신도(山神圖)도, 민화(民畵)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신화와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산군(山君), 산군자(山君子), 산령(山靈), 산신령(山神靈), 산중영웅(山中英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이야기와 민화에서는 어리석고 의뭉스럽고, 친근하며, 우직한 존재로 표현되거나 어려움에 처한 민초들의 보호자로 표현됩니다. 이제 신화 속의 우리 호랑이를 그린 석향란 작가의 세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선묘화로 동양화에 쓰이는 종이 중에 하나인 장지 위에, 아주 가는 붓으로 먹을 찍어서 그린 그림입니다.


1. 김현감호 설화의 호원사 호랑이


동물의 왕인 늠름함과 여인의 우아함을 겸비한 호랑이



2. 영산의 신령으로 여겨지던 백두산 산군


산과 혼연일체를 이룬 신비한 산군


사냥꾼들은 산을 신성한 성지로 여긴다. 속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달리, 산은 깨끗하고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또 산에는 주인인 산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허락을 얻어야 짐승을 잡으며, 그가 보호해 주어야 아무 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면 먼저 산신의 허락을 얻기 위한 고사(山祭)를 올린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러 가던 일행도 백두산에 들어가면서 산신제를 지내고 올라간 기록이 있다. 짐승을 잡은 뒤에도 반드시 감사의 의례를 지냈다. 위기를 넘긴 뒤에 감사의 제사를 올린 이 일기의 기록 또한 이러한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20세기 초까지도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으면 그 고을의 산신령을 잡았다는 죄목으로 수령이 형식적인 볼기를 세 차례 때리는 것이 관례였다. 예컨대 형식적이 태형(笞刑)으로 세 차례의 매를 맞고 나서, 호랑이의 크기에 따라 닷 냥에서 2,30냥의 상금을 받았다. 일반에서도 맹수의 왕인 호랑이야말로 산에 사는 신령(神靈)이라고 믿었으며, 이들의 탄생지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겼다. 무신도의 하나인 산신도(山神圖)에 산신이 호랑이를 심부름꾼으로 거느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이에 있다.

이중하, 백두산일기,   1885-10-18 ~ 1885-10-19

3. 소녀가 만난 신비한 호랑이


소녀의 수호신 호랑이





작가소개

석향란 작가
석향란
중국 연변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세종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박사를 수료하였다. 초등학생 때 2년 동안 4컷 만화 연재를 시작으로, 중학생 때 단행본 만화책 《댄스부의 다섯 천사》를 출간하였고, 현재 판화, 서양화, 삽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펜과 세필로 그리는 일이 언어의 벽을 넘어서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유생들이 모인 서원 근처, 어둠이 내린 가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하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11-04-26 ~
1611년 4월 26일, 칠흑같이 어두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도산서원, 여강서원, 이산서원 향교의 유사들이 여강사원에 모여서 5월 11일에 열릴 소회를 논의하고 있었다.

“쌍나팔을 불어 호랑이를 쫓으며, 천길 낭떠러지 위의 삐걱대는 다리를 건너며 산으로 간다”

김도수, 남유기, 1727-09-16 ~
1727년 9월 16일 기사일에, 김도수 일행은 남여를 타고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승려가,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습니다.” 라고 하고는 쌍각(雙角)을 불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길이 험하여 돌비탈을 우러러 몇 리를 올라가니 조금 평평한 곳이 나왔다. 거친 밭 몇 묘가 있다. 또 몇 리를 가니 승려가, “길이 끊어져 가마가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니 앞에 절벽의 허리에 걸려 있는 허술한 잔교가 나왔다.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인데,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러러 불일암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하였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서 차가운 바람이 분다.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암자에서 10여 보 거리에 있는 대(臺)에는 ‘완폭대(翫瀑臺)’라고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랗다. 길다란 폭포가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데, 눈발이 흩날리듯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며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다. 깊숙하고 어두워 만 길 깊이로 음침한 곳은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승려가,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하였기에, 바위틈에 옛날에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준필이 동쪽 담으로부터 와서 똘배 다섯 개를 올렸는데,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병을 찾아서 거듭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나와 바위 위에 앉으니 골짜기의 바람이 솟구쳐 일어 바위의 나무들이 모두 흔들린다. 구름 기운이 넘쳐 일렁거려 마치 거센 파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다. 돌아와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았다. 종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쌍각을 부니 골짜기에 소리가 진동하였다.

“호랑이 때문에 문경새재가 막히다”

권상일, 청대일기,
1754-12-02 ~ 1754-12-21
1754년 12월 2일, 겨울에 들어서자 호랑이 피해가 속출했다. 들으니 문경새재에 호랑이 출몰이 잦아져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물려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문이 돌면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에 상주 영장(營將)과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많은 포수를 데리고 서로 만나 의논을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를 지나온 채감(蔡瑊) 군이 와서 말하기를, 문경새재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무려 40여 인이나 되고 경상도 내에서는 호랑이 때문에 죽은 사람이 무려 100여 인에 이른다고 한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편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았는데 작은 호랑이 세 마리였고, 상주 영장은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한다. 경상감영에서는 문책을 피하려 군관까지 파견했는데, 만약 끝내 잡지 못한다면 장계를 올려 파면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못 잡을 만도 했다. 포수들이 모두 노숙하는데, 어느덧 15일째에 이르러 몰골들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은 큰 호랑이와 마주쳤는데, 포수가 겁을 먹고 감히 총을 쏘지 못했다고 한다. 큰 호랑이는 마치 수레를 끄는 큰 소만했다고 한다.
나중에 듣기로는 상주 영장 또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감영에 보냈다고 한다. 이로써 경상감영에서도 문책은 피하게 되었다.

“비나이다, 무탈하길 비나이다 - 백두산의 산신령과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이의철, 백두산기, 1751-05-24
1751년 5월 24일 이의철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갑산부를 출발했다. 선발대 1백여명은 이미 4, 5일전에 출발한 상태이고 토병, 포수 등 일행만 40여명, 말 16필이 동원되었다. 말과 가마를 번갈아 타면서 올라갔는데, 곳곳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고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으로 인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갑산지역 사람들은 백두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할 때 반드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들은 노루, 사슴, 담비 등을 사냥한다.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의철 일행이 백두산에 오를때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허항령에서 장교와 하인들이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연지봉 아래에서 또다시 제사를 지냈다. 연지봉 숙소에서부터는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거나 농담을 하며 웃지도 않았다.
백두산에 올라 유람할 때에 운무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자 모두 부사의 행차에 산신령이 돕고 있다고 말하였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천지와 연지봉까지 모두 유람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갑산 관사로 돌아오니 마을에서는 그동안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계속 흐려서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전에 백두산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이번 행차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인마가 병들고 죽거나 하는 사고없이 다녀온 경우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의철은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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