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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강에 밝은 달빛이 비치는 밤, 잠결에 들려오는 스승의 깨우침
1601년 11월 11일, 청량산을 유람중이던 김중청 일행은 저녁때 모여앉았다. 이날 밤 온 강에 밝은 달빛이 비치고 빈 집엔 고요가 감도는데 선생님의 깨우치심은 밝고 안온하여 전날 밤보다 훨씬 좋았다. 김중청이 여쭙기를,
“물을 건너실 때 하필 위험한 다리로 건너신 것은 무엇 때문이신지요?”
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
“평지처럼 디디고 서야 하는데 험하고 평탄한 길이라고 걷는 데 어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야기가 한때의 사귐에 미치자 젊은 시절 믿음으로 맺고 의리로 따른 친구로 순거(舜擧)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순거는 바로 지산(芝山)
김팔원
으로 불행히도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다.
선생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 수붕 등이 요즘 몹시 풀어져서 조금도 애써 노력하는 마음이 없는데 너희들은 모름지기 서로 꾸짖고 격려를 하도록 해라.”
라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그런 처지에 있어서 남을 꾸짖을 겨를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김중청이 선생님께 여쭙기를,
“‘생업을 꾀하면 점점 재물을 논하는 마음이 생기고, 명예를 좋아하면 아첨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은 언제 지으신 것인지요?”
라고 하니,
“젊어서 지은 것인데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라고 하시자 고산이,
“제가 압니다. 이는 열여덟 살에 지으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여쭙기를,
“‘순욱론(荀彧論)’을 쓰시자 퇴계 선생께서 감탄하여 마지않으셨다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과연 그런 적이 있었지. 내가 논을 쓴 것이 겨우 예닐곱 편인데 이것이 마지막에 쓴 것이다. 선생님께서 의론한 글이 매우 좋다고 하시고 끝내 고치지 않으셨다.”
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릴 때 공부하던 순서를 여쭈었더니,
“무자년 여름에 《대학》을 읽었는데 이때는 다섯 살 때로 집에 있을 때였다. 조금 자라서 선생님께 《통감》을 배웠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온계에 계셨는데 내가 자주 집에 가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어찌 번거로운 것도 모르고 그리 자주 왔다 갔다 하느냐고 하셔서 그 뒤로는 감히 자주 가지 못했다.”
라고 하셨다. 또 여쭙기를,
“어려서 독서하실 때 몇 번 읽으시면 외우실 수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열서너 살 이전에는 열 번 읽으면 외우지 못하는 게 없었는데, 열다섯 살 이후부터는 숙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보통 책들도 거의 모두 백번 넘게 읽었다.”
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자리에 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김중청이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코 고는 소리가 누구한테서 나는가?”
라고 물으시니 간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김중청이 잠결에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잠결에도 불러 깨우치게 한다는 것으로 이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많이 들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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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중청(金中淸)
주제 : 교류와 친분, 스승과 제자
시기 : 1601-11-11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김중청, 조목, 금난수, 채간, 권명석, 조수붕, 석붕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1호
조선왕조실록
◆ 선비교육과 마음가짐
조선시대에 바른 선비를 만드는 교육은 우선 올바른 인격을 도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선비 되려는 자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키는 것은 바른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선비는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책무를 배운다.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 임무를 다할 때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인격을 닦아도 사회에 대한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선비라고 할 수 없다.
선비는 원만한 인품과 사회적 임무를 배울 뿐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각종 예술 활동을 배우기도 한다. 선비는 서예를 쓰고 시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선비는 그런 예술 활동을 배우면서 그 내면을 맑은 감성으로 충만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금 인격 도야의 재료로 활용한다.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의 교육에 졸업이란 없다. 아무리 높은 칭송을 받는 선비라도, 언제나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더 높은 완성을 위해 쉼 없이 공부한다.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선비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선비 되기’의 교육은 끝없이 계속되며 선비는 영원한 학생으로 살아간다.
조선은 창건 초부터 고려말에 극심하였던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초기에 민심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공(孔)·맹(孟)의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사상을 적극 장려한 결과 유학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 등의 지치주의(至治主義)학파의 실천유학이 일어났으나,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이론유학이었다. 인종(仁宗)·선조(宣祖)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던 성리학파의 교육사상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교육은 그 이념적 바탕을 성리학에 두고 있었다. 유학의 한 계보인 성리학은 중국 송대에 성립된 것으로서 주자학, 송학, 도학, 이학, 정주학 등의 여러 명칭으로도 불려진다. 종전의 유학이 실천적·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것에 비해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올바른 행위의 원리와 근거까지를 깊이 탐구한다. 따라서 성리학은 다른 유학들에 비해서 이론적·철학적 성격이 강하며, 특히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다.
성리학적 교육철학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우주를 연관시켜 논의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우주의 움직임을 성실함 그 자체로 인식하였다. 천체의 운행, 사계적의 순환과 같이 지금까지 한 번도 오류가 없어 왔던 자연·우주의 질서는 바로 인간이 본받아야 할 길로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우주의 운행질서와 인간의 행동이 하나로 된 상태가 바로 성리학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우주처럼 성실함 그 자체(誠者)는 오직 성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나머지 인간들은 그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들로 보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誠之者)을 삶의 기본자세로 삼아야 하며 이런 자세가 바로 인간의 길(人之道)로 여겨졌던 것이다. 또한 성실하려고 노려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고 배우며 그것을 실천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곧 교육이고 따라서 교육 없이는 인간의 길도 모색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리학적 교육철학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교육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 민간교육기관으로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이 있었다. 과거제도가 고려시대보다 더 뿌리를 내리게 되어 이 제도의 활용으로 인재발굴과 교육진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도구가 되어 도리어 정상적인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학교
조선시대의 교육은 조정에서 주도하는 관학(官學)과 지역의 선비들이 운영하는 사학(私學)으로 나뉘어 있었다. 관학은 궁극적으로 유교의 이념을 유지하고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관학은 한양에서는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과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의 사학(四學)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에서는 조정의 지원을 받는 향교(鄕校)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교육은 관학보다는 사학(私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방의 선비들은 주로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학문 공동체의 장소가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은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도덕적 교화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서원 교육은 중앙 관료를 양성한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서원의 교육은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도학(道學)의 실현’과 ‘참된 선비 만들기’라는 참교육 실현에 큰 비중을 두었다. 서원 뿐 아니라 초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서당이 곳곳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서당은 아동들에게 글을 깨우쳐주고 예절바른 몸가짐을 가르쳐주는 기초적인 교육 기관이었다.
조선 초기의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새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통치 이념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의 교육은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놓였고, 학생들의 목표도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조선 중기부터 교육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진정한 선비의 길을 탐구한 사림(士林)의 선비들은 부귀나 출세가 아닌 자기 수양만이 진정한 학문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고, 교육의 목적은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여기는 참된 지사(志士)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위한 교육에서 대의(大義)와 명분을 위한 교육으로 탈바꿈해 간 것이다.
사림의 선비들은 각 지방에 서원을 건립하고 참교육의 이상을 실현해갔고, 교육의 주체도 관학에서 사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림의 서원이라고 해서 과거를 아예 등진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는 출세를 위한 목표가 아니라 대의와 명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졌다.
아기가 젖을 떼고 말도 제법 할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가짐 공부와 글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선 〈천자문〉을 가르쳐 글자 하나하나를 알아가도록 가르치고, 그 다음엔 〈소학〉이나 〈추구(推句)〉, 〈동몽선습〉등을 가르쳐서 문장을 익혀나가게 한다. 한자 교육이 주를 이루었지만 한글도 함께 가르쳤다.
이 시기의 교육은 주로 반복을 통한 암기 교육이었다. 유아는 아직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글자와 글을 반복적으로 읽고 암기하여 머리속에 넣어둔다. 그런 다음 시간이 더해가면서 예전에 외웠던 구절들을 되뇌면서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깨달아가는 것이다.
몸가짐의 공부는 〈소학(小學)〉의 내용을 직접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의 몸가짐, 즉 물 뿌려서 마당을 쓸고 어른에게 공손히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공경한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기본 사항으로 삼았다. 또 글공부를 할 때에는 욕심내어 많이 암기하는 것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태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시대의 사학(사립)
서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른 어떤 교육 기관보다도 숫자가 월등히 많았고 또 오랫동안 유지되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조정의 규제를 받거나 유림의 공론을 거쳐 설립되지도 않았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그 규모에 상관없이 서당을 열어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서당은 가장 대중화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양반집 자제 뿐 아니라 평민 자녀들까지 서당에 다니며 기초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 자제들에게 서당은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었던 반면, 평민 자제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의 기회였다. 이런 점에서 서당은 가장 널리 퍼져있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서당은 운영 주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가난한 선비가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생계형 서당이 있는가 하면, 부잣집 자제를 위해 가정교사를 들였던 독선생 서당도 있었고, 한 집안에서 후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개설한 문중 서당과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자치적으로 설립한 마을 서당도 있었다.
어린이는 보통 7-8세 때 서당에 입학했는데, 보통 동짓날에 입학식을 했다. 입학한 후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던 것이다. 학생수는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되었고, 학생 연령은 7세에서 16세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종종 20세가 넘는 늙은 학생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당의 개설에 어떠한 제재도 없었듯, 서당 훈장의 자격에도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훈장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경서와 역사 등에 박식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고, 대개가 주석서와 한글 언해본을 참고하며 경서의 뜻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작문을 할 줄 모르는 수준 미달의 훈장도 허다했다고 한다.
서당은 대개 훈장과 학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비교적 큰 서당에는 접장을 따로 두기도 했다. 접장은 학생들의 통솔자이자 훈장의 수업을 도우면서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조교 같은 사람이었다.
서당에서 가르치던 것은 보통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었으며, 습자는 글씨쓰기이다.
강독은 〈천자문〉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사기〉, 〈통감〉, 〈당송문〉 등으로 점차 그 수준이 높아져갔다. 제술은 5언 절구나 7언 절구, 작문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학식 높은 훈장이 있는 서당에서는 여러 가지 문장 형식과 문체를 연습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아예 제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습자는 정자 쓰기인 해서를 위주로 연습시켰는데, 이것이 익숙해지면 필기체인 행서와 초서를 가르쳤다. 책을 베끼거나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쳐 실제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서당에서는 처음 학동들에게 〈천자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고 글자를 암기하게 했다. 그 다음에는 〈소학〉이나 〈동몽선습〉을 같은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문장의 이치를 깨닫게 했고, 마지막으로 학동 스스로 그 뜻을 깊이 깨치도록 이끌어주었다. 태만한 학생은 초달(회초리)로 징계하기도 하고 성적이나 품행이 양호한 학생은 표창하고 상품을 주었다.
서당의 학동들에게 정해진 학년은 없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천자문〉 한 권을 몇 달에 떼기도 하고 몇 년을 읽기도 했다. 다만 훈장이 보기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판단되면 다른 책을 공부하게 했다. 따라서 책 한 권을 뗀다는 것은 한 단계의 공부를 마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떼면, 그 집에서 떡을 해서 서당 사람들을 대접하는 ‘책거리’ 잔치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강압적으로 주입시키는 지루한 수업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학동들이 지루해할 때는 삼국지 같은 옛날 얘기로 흥미를 돋우기도 했고, 더운 여름철에는 딱딱한 경서 강독수업보다는 시를 읊고 외우는 풍류를 가르치기도 했다.
○사립교육 - 서원
서당이 초등교육기관이라면, 조선시대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한양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같은 관립교육기관이 있었고, 서원 같은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조선 중기 정치적 좌절을 겪은 사림들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초였다.
서원은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육도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공부가 주를 이루었다. 진지하게 자기를 수양하고 도덕적인 이념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 서원의 교육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서원이 유교적 국가 이념을 널리 전파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 제도를 두어 서원을 장려했다.
서원은 교육 뿐 아니라 제향(祭享)의 역할도 담당했다. 서원에서는 학덕이 높고 충절이 훌륭한 선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지역 유생들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도 삶의 지표를 지정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제사 의식에 빠짐없이 참가하면서 훌륭한 선비상을 가슴 속에 새기고 똑같이 살아갈 것을 암묵적으로 맹세했던 것이다.
모든 서원에는 저마다의 원규(院規)를 두었다. 이것은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교칙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서원에서는 송나라의 주희가 만든 〈백록동서원규〉와 이황이 지은 〈이산원규〉를 원규의 기본 골자로 삼았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기숙사규칙이나 독서 방법, 도서관 활용, 출석 등에 관한 세세한 규칙을 정했다.
학생들의 출석은 주로 〈식당록〉을 근거로 확인했다. 〈식당록〉이란 식당에서 식사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명부로서, 누가 밥 먹었는지를 보고 학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 등의 행사가 있을 때에는〈시도기(時到記)〉에 이름을 올렸는데, 〈시도기〉란 행사 참가자들의 방명록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도 출석부의 역할을 했다.
서원에서는 서당처럼 소리 내어 암송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생이 일대일로 문답하는 공부 방법도 많이 실행했다. 이런 공부 방법은 글의 의미를 깨우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제 간의 진지한 교류에도 많은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서원에는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 여러 직책의 교사가 있었다. 원장은 오늘날의 교장 선생님과 같은 사람으로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라고도 했다. 원장은 보통 퇴직한 고위관리나 덕망이 높은 큰 선비가 맡았다. 강장은 강의를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주로 경서를 강의하고 예법을 가르쳤다. 또 훈장은 학생들의 서원생활을 지도하는 훈육교사였다. 이들은 모두 비교적 높은 수준의 학식과 품덕을 갖춘 자들로, 지역 유림들의 합의를 통해 공인받은 교사들이었다.
학생들의 입학자격은 서원에 따라 저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입학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우선 입학시켰고, 다음으로는 초시(初試) 합격자를 입학시켰다. 그러나 초시에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어도 면학열이 뜨겁고 품행이 단정하면 큰 문제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서원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가장 기본적인 학습 교재로 삼았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거니와 그 범위에서 확대되어 유교의 〈13경〉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공부했다. 예를 들어 주돈이의 〈태극도설〉, 장횡거의 〈장재집〉, 이정 형제의 〈이정집〉, 주희의 〈주자어류〉, 〈성리대전〉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공부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자들의 저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경전 학습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은 역사 공부였다. 그래서 〈사기〉, 〈자치통감〉, 〈송사〉 같은 방대한 역사서도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정서를 함양하고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각종 문학서적들도 공부했다. 〈이태백시집〉, 〈두보시집〉과 〈고문진보〉 같은 문학서적들이 그 교과서가 되었다.
또 역법(曆法)이나 산술, 간단한 의학지식을 쌓는 실용 학습도 간간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깊이 있는 사상 서적이라 해도 노장철학이나 불교에 관한 책은 절대 금지되었다. 이것들은 정통 유교의 정신을 해치는 이단사설로 판정되기 때문이었다.
○관립 중등학교 향교
서원이 사림들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세워진 사립학교였다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관립 중등학교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보다는 낮은 학교로서 한양의 사학(四學)과 등급이 같았다.
원래 향교가 세워진 것은 지방에 유교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육 뿐 아니라 각종 제사 거행과 향촌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 목, 군, 현에 각 하나씩 설치되었고, 학생수도 부와 목은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연이어 들면서,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겼다. 결국 향교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해갔다. 하지만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향교는 서원과 동등한 중등 교육기관이었으므로, 배우는 과목도 모두 동일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 그리고 역사와 문학을 배웠으며, 간간히 역법, 산술, 의술 같은 실용 지식도 습득했다. 향교 안에서 학생들이 생활하는 것도 서원과 비슷했다. 선생님과 일대일 문답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각종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여 「시도기」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다만 서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향교의 학생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출석수와 지방 관찰사의 평가를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출석률이 저조하고 성적도 좋지 않은 학생은 학생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향교의 선생님은 중앙 조정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에서는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교수관(敎授官)’이라는 호칭을 주고 지방 각지의 향교의 교사로 파견했다. 교수관은 ‘교수’와 ‘훈도(訓導)’로 구분된다. 교수는 6품 이상의 직급으로 주나 부처럼 큰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고, 훈도는 7품 이하의 직급으로 군이나 현처럼 작은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모든 향교에 교수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향교에서는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향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런 향교의 선생님들은 당연히 정식 관리가 아니었고 조정의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글공부를 한 선비들은 향교의 선생님이 되려 하지 않았다. 힘든 과거 시험공부를 해서 급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정에 나아가 포부를 펼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향교에는 선생님이 부족했고, 급기야 향촌의 유림들이 나서서 자치적으로 선생님을 임명하고 향교를 운영해 갔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향교도 점차 사립 교육기관으로 변모해갔다.
향교에는 보통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했다. 향교 학생 열 명의 추천을 받고 〈소학〉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양반 평민이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또 향교의 학생이 되면 신분 차별 없이 군역을 면제 받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도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과거 시험을 응시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같은 향교에서 공부한 동학이라 할지라도, 양반의 자제는 소과나 문과에 응시한 반면 평민의 자제는 주로 각종 잡과에 응시했다.
조정의 지원이 뜸해지고 향교 교육의 질이 저하되면서, 향교의 교생 중에는 평민이 많아졌다. 부유한 양반집 자제들이 점차 이름 높은 선비가 운영하는 서원으로 입학하면서, 공교육의 권위를 상실한 향교에는 가난한 평민의 자녀가 많아진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관학(국립)
1) 성균관
교육목적은 인재양성과 선현, 선성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 및 고급관리의 배출에 있었다.
입학자격은 생원과 진사(과거에 합격한 자)를 원칙, 미달할 때는 사학생도 등 기타로 충원하되 200명 정원으로 하였다.
교육과정은 사서오경의 구재지법을 주 과정으로 단계적 학습을 하였다. 매월 강을 받은 후 의문점을 토론하여 이를 밝히고 그 후에 교수하였다.
성적의 평가는 대통-통-약통-조통으로 하였다.
2). 사부학당(4학)
조선시대 중등관학기관으로 성균관 부속학교이다.
교육목적은 성균관과 유사하나 수준 낮고, 부속학교 성격이다.
입학대상은 양반집 자제와 민중자제 중 뽑힌 자로 정원은 각 학에 100명으로 하였다.
문묘를 갖지 않은 점이 성균관이나 향교와 다르다.
교원을 30개월 장기 근속시키는 교관구임법(근속법)을 시행하였다.
국가로부터 감독 받고, 기숙사제도를 시행하였다. 학비는 국가에서 지급하였고,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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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이날 밤 온 강에 밝은 달빛이 비치고 빈 집엔 고요가 감도는데 선생님의 깨우치심은 밝고 안온하여 전날 밤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여쭙기를,
“물을 건너실 때 하필 위험한 다리로 건너신 것은 무엇 때문이신지요?”
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
“평지처럼 디디고 서야 하는데 험하고 평탄한 길이라고 걷는 데 어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야기가 한때의 사귐에 미치자 젊은 시절 믿음으로 맺고 의리로 따른 친구로 순거(舜擧)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순거는 바로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으로 불행히도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다.
선생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 수붕 등이 요즘 몹시 풀어져서 조금도 애써 노력하는 마음이 없는데 너희들은 모름지기 서로 꾸짖고 격려를 하도록 해라.”
라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그 지경에 있어서 남을 꾸짖을 겨를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내가 선생님께 여쭙기를,
“‘생업을 꾀하면 점점 재물을 논하는 마음이 생기고, 명예를 좋아하면 아첨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은 언제 지으신 것인지요?”
라고 하니,
“젊어서 지은 것인데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라고 하시자 고산이,
“제가 압니다. 이는 열여덟 살에 지으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여쭙기를,
“‘순욱론(荀彧論)’을 쓰시자 퇴계 선생께서 감탄하여 마지않으셨다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과연 그런 적이 있었지. 내가 논을 쓴 것이 겨우 예닐곱 편인데 이것이 마지막에 쓴 것이다. 선생님께서 의론한 글이 매우 좋다고 하시고 끝내 고치지 않으셨다.”
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릴 때 공부하던 순서를 여쭈었더니,
“무자년 여름에 《대학》을 읽었는데 이때는 다섯 살 때로 집에 있을 때였고, 조금 자라서 선생님께 《통감》을 배웠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온계에 계셨는데 내가 자주 집에 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어찌 번거로운 것도 모르고 그리 자주 왔다 갔다 하느냐고 하셔서 그 뒤로는 감히 자주 가지 못했다.”
라고 하셨다. 또 여쭙기를,
“어려서 독서하실 때 몇 번 읽으시면 외우실 수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열서너 살 이전에는 열 번 읽으면 외우지 못하는 게 없었는데, 열다섯 살 이후부터는 숙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보통 책들도 거의 모두 백번 넘게 읽었다.”
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자리에 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내가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코 고는 소리가 누구한테서 나는가?”
라고 물으시니 간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내가 잠결에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잠결에도 불러 깨우치게 한다는 것으로 이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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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통과 죽간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청량산 도립공원 표지석
청량산 전경
『대학』
3D
서산(書算)
죽첨(휴대용 경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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