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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판서를 제수받은지 이십 일 만에 이조판서로 승진 임명되다
1752년 6월 17일, 초저녁에 조재호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한다는 유지(有旨)가 내려왔는데, 이십 일 후 7월 7일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 임명한다는 유지(有旨)가 온 까닭에 삼가 받았다. 누이동생 현빈이 그토록 전조(銓曹)의 일은 맡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그 자리다. 이조(吏曹)의 일이 조재호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은 숙부인 조현명도 잘 알고 있었다. 1745년 충청감사로 지내던 시절 이조참판에 제수되자 숙부인 조현명이 너무 빠른 승급을 걱정하여 임금께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아뢰었던 일도 있었다. 이 모두가 전형(銓衡)의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이조(吏曹)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말려줄 사람도 바람막이가 되어줄 사람도 없다.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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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영영일기(嶺營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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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재호(趙載浩)
주제 : 지방행정, 관찰사, 인사제도
시기 : 1752-06-17 ~ 1752-07-0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조재호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47호
조선왕조실록
◆ 조재호의 승진에 대한 염려
영조 28년 1752년 5월 22일, 윤동도(尹東度)를 경상도관찰사로 제수함으로써 조재호를 경상감사의 자리에서 해임하게 된 이후로 5월 26일에는 조재호를 대사헌으로 삼았으며, 6월 11일에는 병조 판서로 삼았고, 6월 28일에 이조판서로 삼았다. 6월 12일과 7월 23일에는 조재호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좌, 우빈객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두었던 정2품(正二品) 문관(文官)으로 판서 급이 겸직하는 자리였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한 달 동안 대사헌에서 병조판서로, 그리고 이조판서의 자리에까지 빠른 승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조재호가 경상감영을 떠난 날은 7월 25일이니 미처 한양에 가기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격적인 승진을 통해 이조판서가 된 이후의 조재호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1752년 10월 12일 영조실록에서 사신은 조재호에 대해 “이조 판서 조재호는 성품이 매우 거칠고 방자하였다. 그런데 현빈(賢嬪)의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급제한 지 10년이 못되어 벼슬이 뛰어올라 전관(銓官)이 되었는데, 도정을 담당하여 그릇된 일이 많았다. 도정에 6품으로 올려 줄 것이 두 자리이고 처음으로 출사시킬 것이 한 자리였는데, 빈자리로 잘못 알고 거듭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으니, 다른 일도 이를 미루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다.” 고 비판할 정도다. 1754년에 우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니 1744년에 대과에 급제한 이후로 불과 10년만의 일이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조재호는 고 좌상 조문명(趙文命)의 아들로, 조제론(調劑論)을 힘껏 주장하였기 때문에 매우 임금의 사랑을 받아 우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노라고 기록한다. 조재호는 입조(入朝)를 극력 사양하며, 다리가 부러진 것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전농동에 칩거하였다. 17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직을 허락받게 되지만, 1759년에는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가 1775년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누이동생과 숙부의 염려가 사실이 되는 이후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752년 6월 17일. 맑음. 관풍각(觀風閣)에 앉아 공사소지(公私所志)를 결재하였다. 초저녁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한다는 유지(有旨)가 내려온 까닭에 삼가 받은 뒤에 「병조(兵曹)의 군관과 하인배들은 모두 물러가라.」하고 분부하였다. 1752년 7월 7일. 관풍각(觀風閣)에 앉아 공사소지(公私所志)를 결재하였다. 식사 후에 서울로부터 기별이 내려오고 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승진 임명한다는 유지(有旨)가 온 까닭에 삼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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