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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들에 의해 구운학의 공초가 거짓말이라 밝혀지고 구운학은 감옥에서 병으로 죽다
1751년 6월 19일, 변사체로 발견된 도기찰 김한평과 사후 김동학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김한평은 칼에 맞아 죽고 김동학은 맞아서 죽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안음현감이 고현면 기찰 김태건과 북리면 기찰 구운학을 다시 추궁하였다. 김태건은 자신이 구운학과 더불어 도기찰을 해칠 것은 모의한 것을 인정하였으나, 도기찰의 목부분에 난 칼자국 상처는 진실로 구운학의 소행이며, 구운학이 수망령으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을 데려와 힘을 합해 싸움을 말리고자 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구운학은 완강히 부정한다. 자신의 말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김해창은 사후 김동학에게 1냥(兩) 5전(錢)의 뇌물을 준 후에 도망하여 피했는데, 고현면 기찰인 김태건이 사후가 소지한 돈을 빼앗고자 먼저 도기찰을 죽인 후에 사후의 돈을 빼앗고 사후를 죽인 상황을 자신이 목도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뇌물을 줬던 김해창을 잡아 문초하니 도기찰에게 체포되어 북리면 도장(都將)에게 인계되었으나 자신의 원통한 사연으로 인하여 석방되어 피하게 되었는데, 이성(異姓) 칠촌(七寸) 숙부인 박상봉(朴尙奉)이 김태건과 구운학 두 기찰의 공갈에 위협을 받아 도기찰의 사후에게 뇌물 1냥 5전을 주었다고 증언한다. 김해창의 칠촌 숙부인 박상봉(朴尙奉) 역시 김해창이 관가의 감시에 들어가 도기찰에게 체포되었다가 갑자기 석방되자 그대로 도망하여 피한 뒤에 김태건과 구운학이 자신을 위협하고 결박하여 관가에 고발하고자 하기에 뇌물 1냥 5전을 도기찰의 사후에게 주었다고 증언한다.
이어서 용추암(龍湫菴) 방두승(房頭僧) 임명(任明) 31세와 장수사(長水寺) 화상승(和尙僧) 요징(妙澄) 53세을 불러 문초하니 구운학의 공초에 나와 있는 내용이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구운학의 말에 의하면 김태건과 함께 용추암(龍湫菴) 및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군사를 발해달라고 말하니 장수사 중의 말에 “어떤 한 미친 듯도 하고 모자라는 듯도 한 사람이 조금 전에 절문을 지나갔다.”고 하고 제가 또한 한 차례 구타당하여 머리를 싸맨 중을 보았는데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지나간 한 미친 녀석에게 이렇게 구타를 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구운학은 감옥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떻게 하여 죽게 된 것일까? 죄인의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끝에 죽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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