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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해의 로망, 정사(亭舍)를 짓다
1582년 2월 8일, 권문해는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하고 예천 본가로 돌아 온 후 정사(亭舍)를 짓기 시작한다. 예천 본가로부터 약 2km 떨어진 강가에 터를 잡고 이웃사람 30명을 빌려 술과 음식을 먹이고 정사 터를 메우고 축대를 쌓았다.
정원(靜元)과 손자들(얼속, 孽屬)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함께 정자 짓기를 시작했다. 연이어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정자를 짓기 위한 터 닦기가 이루어졌다. 2월 12일에는 약 3.5km 떨어진
용문사(龍門寺)
승려들과 용문동 주민들의 힘을 빌려 터 닦기에 박차를 가하였다. 주변의 돌을 모아 터를 메우고 고르게 하였으나 터 닦기를 다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갑자기 집안에 역병이 번져
증아(憎兒)
가 홍역에 걸려 아팠고, 눈발이 날리고 세찬 바람이 부는 가운데서도 정사 짓기는 계속되었다. 2월 19일, 날이 맑고 화창하자 박공직(朴公直)과
초간정사(草澗亭舍)
로 가서 소나무 몇 그루를 심게 하였다. 닷새 후인 2월 24일에는 초간정사 동쪽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어 연못을 만들었다. 사내종(노복, 奴僕) 수십 명이 둑을 쌓고 물을 끌어오니 금세 깊이가 어깨가 잠길 만하고, 물고기를 기를 만한 맑은 연못이 만들어졌다. 이 광경을 함께 하고 싶어 신경조(申敬祖), 박공직(朴公直), 권욱재(權勗哉)의 마을에 사는 손아랫사람들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보았다.
다음날 초간정사를 찾았으나 어제 애써 쌓았던 연못이 밤사이 곳곳이 터져 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노복
한석(漢石)
등에게 명하여 다시 돌을 넓게 쌓고 수통을 두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이수(鄭貳壽)가 용문사 승려들에게 부탁하여 연못 주변에 옮겨 놓은 느티나무 가운데 한 그루가 말라죽었다. 다행히 다른 한 그루는 마르지 않았다.
3월이 되었다. 초간정은 이제 소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완성되었고, 3월 3일 권문해는 초간정에서 처음으로 소일을 보았다.
3월 8일 초간정에 가서 미처 쌓지 못했던 초간정 뒤쪽의 축담을 쌓게 하였다. 그렇게 한 달 만에 마을사람들과 용문사 승려들의 도움으로 초간정은 완성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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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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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초간일기(草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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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문해(權文海)
주제 : 예천, 초간정사
시기 : 1582-02-08 ~ 1582-03-08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예천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권문해, 마을주민, 용문사 승려, 신경조, 박공직, 권욱재, 한석, 정이수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38호
웹진 담談 5호
웹진 담談 39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권문해
◆ 조선중기의 사림세력의 주도적 건축문화
조선 중기의 건축은 사상적으로는 16세기 지방사림세력이 커지면서 조선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한다. 이들 사림세력은 주자학의 가르침에 따라 충절과 도덕, 의리가 강조된 생활체계를 추구하였으며, 가례(家禮)에 입각 한 건축이 나타난다. 따라서 서원과 양반들의 개인 주거공간이 크게 늘어난다. 또한 조선 중기에는 관청이나 궁궐에 예속되었던 장인(匠人)체계가 붕괴되며 이들은 궐을 벗어나 양반들의 개인주거 건축에 참여하였다. 또한 오래전부터 사찰을 지어왔던 승려들의 건축기술도 당시의 건축물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2년 2월 8일 흐리다가 맑다가 하였다. 정사(精舍)의 터를 초간(草澗) 도연(陶淵)의 가에 얻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 30명을 빌려 술과 음식을 먹이고 터를 매워서 축대를 쌓았다. 정원(靜元) 및 얼속(孽屬, 서손)들과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1582년 2월 12일 맑음. 또 용문사(龍門寺)의 승려 및 용문동(龍門洞) 주민들의 힘을 빌려 정사(精舍)의 터를 닦았다. 단지 돌을 메꿔 고르게 하기만 하였고 일을 마치지는 못하였다. 1582년 2월 15일 맑음. 집안에 역병(疫病)이 번지기 시작하여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행하지 못하니 몹시 미안하였다. 성주(城主) 이광준(李光俊)이 사간원의 탄핵[院駁]을 입어 파직을 당하였다. 그의 성품이 본디 가혹하고 각박하였기에 오로지 감독하고 거두는 것으로[以] 일 삼아 백성들이 그 고초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후에 내려가 (이광준을) 관아에서 만났다. 눈이 크게 내리니 겨울과 다름이 없었다. 준수[俊秀, 이광준(李光俊)]가 먼저 절구(絶句) 한 수를 짓고, 내가 차운하였다. 어떤 이가 우리의 수령을 빼앗았는가 何人奪我蜀遨頭 백성들에게 이미 4년 동안 은혜 남겼네 留惠吾民已四秋 술자리 마친 이별하는 정자에는 날 저물려고 하고 酌罷離亭天欲暮 애써 돌아가는 등 당기며 짐짓 머뭇거리네 强攀歸燈故遲留 준수(俊秀)에게 말하여 얼매(孼妹)와 망해(望海)[孼妹及望海]의 대신(代身)하는 물고입안(物故立案)을 내어주게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풍기(豊基) 태수(太守) 안서경(安瑞卿)과 상방(上房)에서 함께 묵었다. 1582년 2월 16일 맑음. 정언(正言) 류영경(柳永慶)이 상산(商山, 상주)에서 군으로 들어왔다. 서경(瑞卿)과 서헌(西軒)으로 가서 만나본 뒤에 올라 왔다. 1582년 2월 17일 맑음. 증아(憎兒)가 어제부터 홍역(紅疫)에 걸려 아파하기 시작했다. 집 앞의 몇 리 밖 들판 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박정(朴亭)이나 김정(金亭)으로 불려졌다. 어느 해에 심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2백 년 정도 지났다고 말을 하였다. 그 크기가 열 아름 정도이고 그 높이가 20여 장(丈, 길)인데 먼 곳에서 보면 무성한 것이 들판의 한 푸른 일산(日傘)과 같았다. 오래도록 한 동네 안의 구물(舊物)이 되어 왔다. 수 삼년 전에 큰 바람에 의해 뽑히니 원 줄기는 꺾이고 단지 남은 반쪽의 두 가지만 남아 있었다. 만약 비바람이라도 치는 날이면 가지 뿌리가 요동쳐서 모두 꺾여 뽑힐 듯하였다. 널리[旁] 작은 괴목(槐木)을 구하여 그 곁에 심고서 뒷날 (이 나무가 자라) 오늘 같기를 기다린다. 1582년 2월 19일 맑음. 박공직(朴公直)과 초간정사(草澗精舍)로 가서 소나무 몇 그루를 심게 하였다. 1582년 2월 24일 구름이 끼어 흐렸다. 초간정(草澗亭)의 동쪽 가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어 연못을 만들 만하였다. 노복(奴僕)들 수십 명에게 명을 하여 둑을 쌓고 물을 끌어오니 깊이는 어깨가 잠길 만하고, 맑기는 물고기를 기를 만하였다. 신경조(申敬祖)·박공직(朴公直)·권욱재(權勗哉) 제군(諸君)들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보았다. 밤에 비가 내렸다. 1582년 2월 25일 흐리다가 빛이 나다가 하였다. 쌓은 연못의 둑이 애초 견실하게 쌓여지지 않아 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노복(奴僕) 한석(漢石) 등에게 명하여 다시 돌을 넓게 쌓고 또 수통을 두어 물이 새지 못하게 하였다. 증산(憎山)의 홍역이 이때까지 증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막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582년 2월 26일 오후에 비가 내렸다. 정이수(鄭頤壽)가 용문사(龍門寺)의 승려들을 권하여 괴목(槐木) 여러 그루를 초간지(草澗池) 가에다가 옮겨 심도록 하였는데, 한 그루는 말라 죽고 한 그루는 마르지 않았다. 1582년 3월 3일 맑음. 초간정(草澗亭)에 가서 소일하였다. 1582년 3월 8일 맑음. 초간정(草澗亭)에 갔다. 종들에게 뒤의 축담을 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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