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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약 주는 초간정(草澗亭)
초간정(草澗亭)
을 짓고 난 후, 권문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초간정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홀로 소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교우들과 술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 곳을 찾았다. 5월이 되어 날씨가 맑은 날이 연일 계속되자 초간정에 찾는 일은 더 잦아졌다.
1582년 5월 23일, 초여름에도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더위에도 초간정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다 되어 권자순(權子純)이 편지를 보내 술자리에 나를 초대하였다. 하루 종일 초간정에 앉아 더위를 먹은 탓인지 술에 금방취해 집에 돌아왔다. 밤새 몸이 편치 않았다. 결국 다음날에는 설사가 시작되더니 사흘이나 멈추지 않았다. 5월 26일 아침에 국화 뿌리를 달인 목향원(木香元)을 먹었더니 설사 증상이 멎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두통이 극심하였다. 다음날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1582년 5월 28일이 되어서야 겨우 몸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몸이 회복되는 듯했으나 6월 2일부터는 두통이 다시 심해지고 목의 통증이 극심하여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열흘 넘게 복통과 두통, 인후통까지 심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권문해를 애를 태운 건 다름 아닌 초간정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초간정에 가고 싶은 권문해의 마음과는 달리 이후로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목구멍의 통증은 배로 심해져 물조차 마시지 못하였다.
1582년 6월 9일 남응열(南應說)이 와서 침으로 피고름을 터트리자 통증이 멎는 듯하였고, 밤에는 굼벵이와 지렁이 즙을 죽에 타서 마셨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러나 아직 외출을 할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여전히 초간정에 가지 못하였다. 침을 맞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닷새째인 6월 14일, 몸이 거의 회복되자 권문해는 바로 초간정으로 달려갔다. 이어
이대중(李大仲)
과
권사훈(勸士訓)
을 불러 연못가에 앉아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문해는 초간정에 올랐다가 더위를 먹고 보름 넘게 심한 몸살을 앓고 물조차 마시지 못 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초간정에 가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침을 맞고 약을 먹으며 몸이 회복되자 바로 초간정으로 달려갈 만큼 그곳에 대한 애착이 컸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초간일기(草澗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권문해(權文海)
주제 : 예천, 초간정사
시기 : 1582-05-23 ~ 1582-06-14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예천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권문해, 권자순, 남응열, 이대중, 권사훈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5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권문해
◆ 사림과 정사(亭舍)
◆ 사림세력에게 정사(亭舍)가 갖는 의미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경치 좋은 곳에 크고 작은 정사(亭舍)를 지었다. 정사는 일반주택과 다른 별서(別墅)로서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유학자들의 독립된 활동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러한 별서는 처음에 고위직을 역임하거나 높은 학식을 지닌 인사들에 의해 서울, 경기 부근에 주로 등장했다. 15세기 후반을 지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지방 사림세력에 의해 전국 곳곳에 건립되어 성리학의 이해를 심화하고 사림 세력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영남 지방의 경우 학문과 덕행으로 관직에 나아가거나 세속을 멀리하고 학문으로 이름을 알린 이언적, 이황, 조식, 유성룡 등의 사림파는 대부분 정·당·암·헌·실 등의 명칭을 붙이고, 강학과 회합, 연회, 음영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사림파는 자연에 몸을 의탁하여 혼탁한 현실정치를 염려하면서 심성 수양을 가장 이상적인 대상으로 여겼다. 사림파는 자연을 하나의 이상세계로 인식하고 불합리한 인간은 자연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는 수양과 성찰을 통해 자연과 서로 보완적인 존재로 합일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림은 담장이나 대문이 없는 누(樓)나 정(亭)을 지어 회합과 사색의 공간을 마련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2년 5월 23일 (맑음[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초간정(草澗亭)에 갔다. 권자순(權子純)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편지로 초청하여 저녁때 갔다가 취하여 돌아왔다. 저녁때부터 비가 내리더니 밤에도 비가 왔다. 1582년 5월 24일 맑음. 어제 초간정에 갔다가 서증(暑症)을 얻어 기운이 편치 않더니 밤에는 수리(水痢)를 얻어 여러 번 설사를 하였다. 1582년 5월 25일 (맑음[晴].) 기운이 연일 고르지 않고 설사도 멎지를 않았다. 밤에도 이와 같았다. 1582년 5월 26일 맑음. 아침에 물에 달인 목향원(木香元)을 먹었더니 설사 증상이 멎는 듯하였다. 두통이 또 발작하였다. 1582년 5월 27일 맑음. 기운이 연일 고르지를 못했다. 1582년 5월 28일 맑음. 기운이 점차 평안해졌다. 1582년 6월 2일 맑음. 전날의 두통이 영 낫지를 않고, 인후(咽喉) 사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어 음식이 달지를 않았다. 1582년 6월 3일 맑음. 기운이 연일 편치를 않았다. 1582년 6월 4일 맑음. 기운이 연일 편치를 않아 초간정(草澗亭)에 왕래하지 못한 지 오늘 벌써 10여 일째이다. 1582년 6월 5일 맑음. 동네의 학도(學徒)들이 왔다. 『통감(通鑑)』·『시전(詩傳)』등의 책을 주고 열심히 가르쳤는데,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목구멍의 증상이 날로 가중되어 오후부터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보다 배는 더하였다. 1582년 6월 6일 맑음. 목구멍의 통증이 배로 심해졌고 두통도 아울러 심해져서 먹고 마시는 맛을 점점 모르게 되었다. 김 좌랑[金佐郞, 김복일(金復一)]의 계실(繼室)이 요즘 기허증(氣虛證)을 얻어 연일 기절을 한다고 하는데, 한 번도 문병을 가지 못하였다. 1582년 6월 7일 맑음. 통증이 여전하여 멎지를 않았다. 그곳에 침을 놓고자 하였으나 고름[膿]이 잡히기 전에 침으로 터뜨린다면 훗날 재발할 우려가 있어 통증을 참고 고름[膿]이 잡히길 기다린 지 며칠이 되었다. 1582년 6월 8일 맑음. 통증이 전날과 같아서 밤에 편히 잘 수가 없었다. 1582년 6월 9일 맑음. 남응열(南應說)을 청하여 침으로 그곳을 터뜨렸더니 피고름[膿血]이 두세 숟가락 정도 나왔다. 통증이 멎는 듯하였다. 밤에 굼벵이와 지렁이 즙을 취하여 죽에 타서 마셨다. 이렇게 두세 번 하고나니 기운이 점차 평상시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1582년 6월 10일 맑음. 통증이 전날 같지는 않아 점차로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을해년간(1575년)에 서원(西原, 淸州)의 목사로 나갔을 때 이와 같은 증상이 거듭 나타나 통증을 참으며 고름[膿]이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침으로 찔러 터뜨렸던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재발하지 않은 것이 7년이었다가 지금 다시 재발한 것이다. 1582년 6월 11일 비가 내렸다. 이날은 증조고(曾祖考)의 기신(忌辰, 忌日)이다. 나는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정원(靜元)이 모든 얼속(孽屬, 서손)을 거느리고 비를 맞으며 내려가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1582년 6월 12일 (맑음[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기운은 점차 정상처럼 되어갔다. 1582년 6월 14일 맑음. 초간정(草澗亭)에 갔다. 이대중(李大仲)·권사훈(權士訓)이 올라와 종일 못가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이미지
초간정 가는 길
초간정 입구
초간정 사주문
초간정 안내판
초간정
초간정 내부
초간정 서까래
초간정 서까래와 보
초간정 내부
초간정 내부
초간정 난간
초간정 현판
초간정사 중수기
초간정 현판
초간정 정면
초간정 측면
초간정 석조헌 현판
초간정 석조헌 현판
초간정에서 바라본 마당과...
초간정이 새겨진 바위
초간정 원경
초간정 전경
초간정 전경
초간정 전경
초간정 전경
초간정 원경
초간정 원경
초간정 원경
초간정 앞 계곡
초간정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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