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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추위, 사신일행의 얼굴과 손이 모두 트다
의주의 강을 건너온 후에는, 서장관은 예에 따라 좌거(坐車)를 탄다. 수레의 구조는 대략 쌍교(雙轎)와 같은데 약간 작다. 차체는 무겁고 바퀴는 넓어 모래자갈 길을 삐그덕거리고 가는데 그 속에 타면 자기도 모르게 이쪽 저쪽으로 굴러서 쓰러진다. 나도 시험 삼아 타 보았더니 편안히 앉을 수가 없었다. 역관 이의성(李義成)이 종기가 급작스레 악화하여 낙오되더니, 곧 돌아가게 되었다. 그 편에 집에 편지를 올렸다.
다음날 통원보(通遠堡) 35리를 가서 이씨(李氏) 성의 민가에서 묵었다. 팔도하(八渡河)는 장항(獐項) 아래에 있다. 어떤 사람은 금가하(金家河)라고도 한다. 산협의 길이 우회해서 재를 넘고 골짜기를 안고 가는데, 물을 도합 여덟 차례 건넌다. 팔도하도 곧 그 한 줄기 물이다. 눈 속의 추위가 갑작스레 심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얼굴이 트고 손이 갈라졌다.
통원보(通遠堡)는 옛 진이보(鎭夷堡)이다. 천총(天聰) 연간에 이곳에 요새를 설치하였고 숭덕(崇德) 연간에 봉황성으로 옮겼다. 통원보에는 말이 열세 필이 있다. 처음에는 우체(羽遞)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비체(飛遞)라고 고쳤다. 이것은 관우[關帝]의 이름을 피한 것이다. 일찍이 남쪽 선비로 호를 수원(隨園)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한번은 꿈에 표범 머리에 제비 턱을 한, 한(漢)의 거기 장군 장비(車騎將軍張飛)라고 자칭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내 둘째 형의 이름은 피한다고 도리어 내 이름은 범하였으니 어찌 그리 불공평한가?’라고 하였다 한다. 비체라는 것은 두 시간 사이에 70리를 가는데, 책문(柵門)에서 북경(北京)까지를 사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날. 답동(畓洞) 25리를 가서 노씨(盧氏) 성의 민가에서 점심을 하고 연산관(連山關) 30리를 가서 기하(旗下)의 이씨(李氏) 성의 집에서 묵었다. 화상장(和尙莊)은 석우(石隅) 10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퇴락된 불당이 하나 있는데, 아미타소상(阿彌陀塑像) 셋이 놓여 있다. 들판의 땅이 꺼져서 물이 많아 얼음 길로 5리 남짓을 갔다. 지세가 평평하고 질퍽한 것이 마치 논이 못쓰게 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답동(畓洞)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 같다.’고 한다.
분수령(分水嶺)은 그리 험준하지 않고 숲이 그 마루터기를 둘러싸고 있다. 가재(稼齋) 김창업(金昌業)의 기행문에 따르면, ‘지남철로 방위를 잡아보면 분수령 산맥은 자방(子方)과 축방(丑方) 사이에서 왔다. 요동(遼東)의 여러 산들은 다 여기서부터 맥이 나간다. 분수령 밑에 물이 있는데 그 근원은 달자(韃子) 땅에서 나와 이곳에 모였다가 다시 갈라져서 팔도하(八渡河)가 된다.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요하(遼河)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鴨綠)의 중강(中江)으로 들어간다. 영의 이름을 또 금복해(金復海)라고도 한다. 이곳을 지나면 또 고가령(高家嶺)과 유가령(兪家嶺) 둘이 있다.’고 했다.
연산관(連山關)은 옛날에는 아골관(鴉鶻關)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부터 지름길이 있어 심양(瀋陽)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산해관(山海關)으로 달려갈 수 있다. 성화(成化) 16년(1480)에 조공 길을 바꾸기를 청했었으나 병부 상서(兵部尙書) 유대하(劉大夏)가 조선의 조공 길이 우회함은 곧 조종(祖宗)의 깊은 뜻이라고 아뢰어 그대로 두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후에는 마침내 이 관을 보루로 만들었다. 지금도 아직 성과 망대가 있는데 황폐한 채로 보수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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