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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치고 차고 밟고, 전쟁터에 있는 듯 - 사람 253명, 말 196필의 사신일행이 책문을 통과하다
책문(柵門) 밖 32리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책문 안 기하(旗下) 악성(鄂姓)을 가진 민가에서 묵었다. 의주목을 통해서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방책을 들어갈 인마의 명단편에 글을 올렸다.
어룡퇴(魚龍堆)부터는 산이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빨리 흘러 조금도 사막 같은 느낌이 없었다.
상룡산은 봉황산(鳳凰山)의 끝 줄기이다. 산 위에 소나무가 있는데 오종종하고 키가 크지 않았다.
책문(柵門)은 상룡산 아래에 있다. 나무를 가지고 방책(防柵)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어깨를 넘지 않고 책목 사이는 엉성하여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이 방책을 세운 것은 북쪽으로는 탑라(嗒剌) 땅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해문(海門)에 이르는 2000여 리에 70개 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중의 하나다. 획정된 경계를 나타내는 뜻인데 변경의 방비는 심히 소홀하다. 문에는 항상 자물쇠가 걸려 있고 봉성(鳳城, 궁궐을 둘러싼 성벽)의 수비장(守備將)이 그것을 주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신 행차가 방책에 도착하면 먼저 성장(城將) 등의 관원에게 통고해야 비로소 문에 와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방책 밖에서 점심을 하고 곧 도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마를 점검하여 성장소(城將所)에 입책보단(入柵報單)을 냈다. 사람은 도합 253명이고, 말은 도합 196필이다. 또 인마가 낙오하여 의주로 돌아간 것이 110여 쯤 된다. 시끄럽게 밀치고 차고 밟는 것이 전진(戰陣) 속에 있는 것 같다.
관제묘(關帝廟)는 방책 안 북쪽 언덕에 있다. 그 곁에 불전(佛殿)이 서 있는데 단청이 눈부시다. 대체로 북방의 풍속이 신불(神佛)을 숭상하고 받들어서, 여기서부터 황성(皇城)까지는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관제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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