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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임무 - 중국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종계를 바로 잡아주소서
사신단 일행이 예부(禮部)에 나아가니 3명의 당상(堂上)이 모두 출근하였다. 차례로 계단을 올라가서 2번 절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무릎을 꿇고
표문(表文)
을 올렸다.
표문을 올린 후 또 차례로 나와 주객사 낭중(主客司郎中)
허륜(許倫)
을 만났다.
이응성(李應星)
을 시켜 상주하여 청하는 일을 주객사 낭중에게 말하였다.
“
우리나라 종계(宗系)가 중국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일
은
영락(永樂)
원년(1403),
정덕(正德)
13년(1518), 지금 황제 가정 8년(1529)에 아뢰어 그렇게 고쳐 바로잡으라는
성지(聖旨)
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책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지 못하여 우리나라 임금과 백성들이 그지없이 울적해합니다. 대인께서 상세하게 마감하여 한 나라의 울적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낭중이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또 말하였다.
“이 종계에 관한 일을 여러 번 아뢰어 상국(上國)을 번거롭게 하여 지극히 황공합니다. 그리고 상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변경에서 끊임없이 왕래하여 폐해도 적지 않으니 이번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낭중이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조정에서 틀림없이 잘 할 것이니 물러들 가십시오.”
이응성을 시켜 주객사에 동지에 바치는 방물을 바쳤다. 또
압마(押馬)
황맹정(黃孟貞)을 시켜 조공할 말을 점검하게 하였다.
다음날 식후에 북관(北館)에서 제독 주사(提督主司)
시천상(施千祥)
을 만났다.
이응성(李應星)을 공(龔)·화(華)·설(薛) 등의 명나라 사신에게 보냈다.
공 천사가 나와서 보고 기뻐하며 주상과 세자의 안부를 묻기에 편안하시다고 대답하였다. 다음으로
정사룡(鄭士龍)
의 관직을 묻기에 형조 판서라고 대답하니, 또
소세양(蘇世讓)
의 안부를 물었다. 잘 계시다고 대답하니,
김근사(金謹思)
ㆍ
김안로(金安老)
ㆍ
허흡(許洽)
ㆍ
허항(許沆)
은 잘 계시냐고 차례차례 물었다. 김근사ㆍ김안로ㆍ허항은 이미 돌아가셨고 허흡은 지방으로 귀양 갔다고 대답하니, 무슨 죄냐고 묻기에 대답하였다.
“제가 그 당시 부모상을 당하여 지방에 있었는데, 신중하지 않아서 죄를 지었다고 들은 듯합니다.”
또 물었다.
“그대는 어전(御前)의 통사인데 왜 이곳에 왔소?”
대답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를 중요하게 여기셔서
배신(陪臣)
을 특별히 사신으로 보내셨고 또 신을 보내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이어 말하였다.
“국왕께서 대인이
소방(小邦)
을 잊지 않고 있다고 여기십니다. 배신이 오면 매번 왕림해서 문안해 주시고 정성스레 대해 주시니 매우 감사함을 가눌 수 없는데, 단지 부채와 모자로 그저 공경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대답하였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어 말하였다.
“배신이 관(館)에 도착하면 번번이 찾아와 문안하는 것도 전하의 크고 훌륭한 덕을 잊지 않고 항상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를 뵙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사신 갔다 돌아온 뒤로, 그대 나라의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다르지 않다는 뜻을 이미 조정에 전달하였습니다. 사대부들과 말할 때마다 조선에 대한 말을 하게 되면 내가 칭찬하며 유림(儒林)에 전파하여 중국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대 나라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대인께서 작은 나라를 버리지 않은 마음을 우리 국왕께서 늘 감격해 마지않고 계십니다. 대인께서 소방을 이처럼 지극하게 칭찬하고 장려해 주시니 참으로 우리 동방의 행운이며 온 나라 백성이 감격하여 우러러봅니다.”
이응성이 또 종계에 관해 황제께 아뢰어 밝힌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고하고 청하였다.
“예전에 대인께서 소방에 사신 왔을 적에 전하께서 이미 이러한 뜻을 얼굴을 마주 보고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인께서 관심을 기울여 우리 국왕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답하였다.
“잘 알았습니다. 다만 조정에 일이 많아서 『
대명회전(大明會典)
』을 만드는 일이 정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 이미 주달되었으니 틀림없이 잘 될 것입니다. 나도 예부 당상을 만나서 말을 하겠습니다. 주본을 베껴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는 술과 음식을 차려 자제를 시켜 대작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화 사신의 집에 가니 화 사신도 나와서 보고 기뻐하였다. 후당(後堂)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읍(揖)
만 하게 하였는데 이응성이 굳이 거절하고 우겨서 절을 했다. 화 사신도 전하와 세자의 기거를 묻기에 여전하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소세양은 잘 계시냐고 묻기에 편안하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고하기를 “전하께서 예전에 배신 홍신(洪愼)이 돌아왔을 적에
천선(川扇)
과
화전(華牋)
을 받으셨고 이기가 돌아왔을 적에 또 보내주신 비단을 받으셔서 고마움을 가누지 못하셨는데, 보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부채와 모자로 그저 작은 성의를 표합니다.”
대답하였다.
“매우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작하였다. 이응성이 또 주청하는 일을 말하였다.
“그 일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
황화집(皇華集)
』 예전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울러 부쳐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설 천사(薛天使) 집에 찾아가니, 설 천사가 마침 외출하여 아들
설일거(薛一擧)
가 나와서 서로 읍을 하고, 내청(內廳)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음식을 차리고 술을 대접해 보냈다. 설일거는 용모가 단정하고 나이 겨우 20살인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였다.
이날 설 천사가 일하는 관청에서 곧바로 주사청으로 와서 만나기를 청하여, 즉시 관복을 차려 입고 가서 절을 하였다. 예가 끝나자 설 천사도 전하와 세자의 기거를 묻기에 강녕하시다고 대답하였다. 또 소세양ㆍ
최연(崔演)
ㆍ
임형수(林亨秀)
ㆍ
엄흔(嚴昕)
등의 안부를 묻기에 잘 계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종계에 관해 주청한 일을 말하였다.
그리고 물었다.
“주본이 내려왔습니까?”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였다.
“예부에서 틀림없이 잘 처리할 것입니다. 『대명회전』을 만드는 일이 정지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예부 당상을 만나서 간절하게 말하겠습니다.”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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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조천록(朝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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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벌(權橃)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539-10-23 ~ 1539-10-24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권벌, 이응성, 공 천사(龔天使), 화 사신, 설일거, 정사룡, 김근사, 김안로, 허항, 소세양, 김근사, 김안노, 허흡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20호
조선왕조실록
◆ 종계변무 시말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이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연해민이 해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압송을 요구하는 항의문에 “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 금명단자운운(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 :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한 것으로부터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宗系誤記)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그해 6월 명나라의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 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내용은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1402년(태종 2) 1월 성절사 장온(張溫)의 귀국 복명 속에 명태조의 유훈 가운데 조선왕의 가계는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지난번의 변명이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곧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는 2대 건문제(建文帝)와 3대 성조(成祖) 사이에 황제위의 계승 문제로 내란 중에 있었으므로 변무(辨誣)의 시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어 10월에 면복(冕服) 등을 받아 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러자 조선은 11월에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했는데, 그 때에 종계변무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주청문(奏請文)에는 그 동안 명나라와의 사이에 내왕한 문서와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중종 때 반정의 합법성을 강조할 때에도 다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즉, 1518년(중종 13)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旦 : 이성계의 이름)이 홍무 6년부터 28년까지 무릇 네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곧 남곤(南袞)·이자 등을 보내어 “태조의 세계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선세(先世)에 시역(殺逆)한 일이 없다.”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이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개정하지 않았다. 그 뒤 1529년에 가절사 유보(柳溥)가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이 중찬되리라는 것을 듣고, 곧 예부에 주청해 이 기회에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 1539년에도 주청사 권벌, 1557년(명종 12)에는 호조판서 조사수(趙士秀), 1563년에는 주청사 김주(金澍), 1573년(선조 6)에는 주청사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1575년에는 사은사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어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의 주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대명회전≫은 반포되지 않았고, 또한 중찬의 내용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중찬할 때 조선측의 주장을 부록하겠다고 언약하는데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어 대사간 이이(李珥)는 국군(國君)이 수무(受誣 : 무고로 인한 모욕을 당함)를 한 지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를 고치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인재를 주청사로 보내어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81년(선조 14)에는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을 보냈다. 그리고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 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번에는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황제의 친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 중에서 조선 관계 부분 한 질을 보냈다. 선조는 이것을 종묘·사직·문묘에 친히 고하였다. 그 뒤 1589년에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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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1539년 10월 23일 조회를 보지 않음. 예부(禮部)에 나아가니 3명의 당상(堂上)이 모두 출근하였다. 차례로 계단을 올라가서 2번 절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무릎을 꿇고 표문(表文)을 올렸다. 표문을 올린 후 또 차례로 나와 주객사 낭중(主客司郎中) 허륜(許倫)을 만났다. 이응성(李應星)을 시켜 주청하는 일을 주객사 낭중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 종계(宗系)가 중국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일은 영락(永樂) 원년(1403), 정덕(正德) 13년(1518), 지금 황제 가정 8년(1529)에 아뢰어 그렇게 고쳐 바로잡으라는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책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지 못하여 우리나라 임금과 백성들이 그지없이 울적해합니다. 대인께서 상세하게 마감하여 한 나라의 울적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낭중이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또 말하였다. “이 종계에 관한 일을 여러 번 아뢰어 상국(上國)을 번거롭게 하여 지극히 황공합니다. 그리고 상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변경에서 끊임없이 왕래하여 폐해도 적지 않으니 이번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낭중이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조정에서 틀림없이 잘 할 것이니 물러들 가십시오.” 이응성을 시켜 주객사에 동지에 바치는 방물을 바쳤다. 또 압마(押馬) 황맹정(黃孟貞)을 시켜 조공할 말을 점검하게 하였다. 10월 24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붊. 조회를 보지 않음. 식후에 북관(北館)에서 제독 주사(提督主司) 시천상(施千祥)을 만났다. 이응성(李應星)을 공(龔)·화(華)·설(薛) 천사(天使)에게 보냈다. 공 천사가 나와서 보고 기뻐하며 주상과 세자의 안부를 묻기에 편안하시다고 대답하였다. 다음으로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관직을 묻기에 형조 판서라고 대답하니, 또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안부를 물었다. 잘 계시다고 대답하니, 김근사(金謹思, 1466〜1539)ㆍ김안로(金安老, 1481〜1537)ㆍ허흡(許洽)ㆍ허항(許沆, ?〜1537)은 잘 계시냐고 차례차례 물었다. 김근사ㆍ김안로ㆍ허항은 이미 돌아가셨고 허흡은 지방으로 귀양 갔다고 대답하니, 무슨 죄냐고 묻기에 대답하였다. “제가 그 당시 부모상을 당하여 지방에 있었는데, 신중하지 않아서 죄를 지었다고 들은 듯합니다.” 또 물었다. “그대는 어전(御前)의 통사인데 왜 이곳에 왔소?” 대답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중요하게 여기셔서 배신(陪臣)을 특별히 사신으로 보내셨고 또 신을 보내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이어 말하였다. “국왕께서 대인이 소방(小邦)을 잊지 않고 있다고 여기십니다. 배신이 오면 매번 왕림해서 문안해 주시고 정성스레 대해 주시니 매우 감사함을 가눌 수 없는데, 단지 부채와 모자로 그저 공경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대답하였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어 말하였다. “배신이 관(館)에 도착하면 번번이 찾아와 문안하는 것도 전하의 크고 훌륭한 덕을 잊지 않고 항상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를 뵙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사신 갔다 돌아온 뒤로, 그대 나라의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다르지 않다는 뜻을 이미 조정에 전달하였습니다. 사대부들과 말할 때마다 조선에 대한 말을 하게 되면 내가 칭찬하며 유림(儒林)에 전파하여 중국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대 나라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대인께서 작은 나라를 버리지 않은 마음을 우리 국왕께서 늘 감격해 마지않고 계십니다. 대인께서 소방을 이처럼 지극하게 칭찬하고 장려해 주시니 참으로 우리 동방의 행운이며 온 나라 백성이 감격하여 우러러봅니다.” 이응성이 또 종계에 관해 황제께 아뢰어 밝힌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고하고 청하였다. “예전에 대인께서 소방에 사신 왔을 적에 전하께서 이미 이러한 뜻을 얼굴을 마주 보고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인께서 관심을 기울여 우리 국왕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답하였다. “잘 알았습니다. 다만 조정에 일이 많아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만드는 일이 정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주본(奏本)이 이미 주달되었으니 틀림없이 잘 될 것입니다. 나도 예부 당상을 만나서 말을 하겠습니다. 주본을 베껴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는 술과 음식을 차려 자제를 시켜 대작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화 천사의 집에 가니 화 천사도 나와서 보고 기뻐하였다. 후당(後堂)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읍(揖)만 하게 하였는데 이응성이 굳이 거절하고 우겨서 절을 했다. 화 천사도 전하와 세자의 기거를 묻기에 여전하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소세양은 잘 계시냐고 묻기에 편안하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고하기를 “전하께서 예전에 배신 홍신(洪愼)이 돌아왔을 적에 천선(川扇)과 화전(華牋)을 받으셨고 이기가 돌아왔을 적에 또 보내주신 비단을 받으셔서 고마움을 가누지 못하셨는데, 보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부채와 모자로 그저 작은 성의를 표합니다.” 대답하였다. “매우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작하였다. 이응성이 또 주청하는 일을 말하였다. “그 일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황화집(皇華集)』 예전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울러 부쳐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설 천사(薛天使) 집에 찾아가니, 설 천사가 마침 외출하여 아들 설일거(薛一擧)가 나와서 서로 읍을 하고, 내청(內廳)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음식을 차리고 술을 대접해 보냈다. 설일거는 용모가 단정하고 나이 겨우 20살인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였다. 이날 설 천사가 일하는 관청에서 곧바로 주사청으로 와서 만나기를 청하여, 즉시 관복을 차려 입고 가서 절을 하였다. 예가 끝나자 설 천사도 전하와 세자의 기거를 묻기에 강녕하시다고 대답하였다. 또 소세양ㆍ최연(崔演, 1503〜1546)ㆍ임형수(林亨秀, 1504〜1547)ㆍ엄흔(嚴昕, 1508〜1553) 등의 안부를 묻기에 잘 계시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종계에 관해 주청한 일을 말하였다. 그리고 물었다. “주본이 내려왔습니까?”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였다. “예부에서 틀림없이 잘 처리할 것입니다. 『대명회전』을 만드는 일이 정지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예부 당상을 만나서 간절하게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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