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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8) 연행(燕行)의 목적지, 연경(燕京)에 도착하다

신춘호

한양을 출발한 조선 사신이 압록강, 심양, 산해관을 거쳐 연경(燕京, 이하 북경) 인근의 통주에 도착하면 청의 예부에서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관아인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의 통사판관(通事判官)을 보내 조선 사신을 북경의 관소(館所:공식숙소)까지 안내하였습니다. 통주 팔리교(八里橋)에서 북경에 이르는 대로(大路)인 조양문내대가(朝陽門內大街)는 박석(薄石)을 깔아 길을 내고, 오가는 인마가 북적북적 대는 등 대도(大都)의 활기가 물씬 넘쳐나는 번화한 거리였습니다. 사행단은 조양문(朝陽門) 밖 동악묘(東嶽廟)에서 휴식하며 의관을 갖춰 입은 후에 문무반열을 지어 회동관(會同館), 즉 옥하관(玉河館)으로 향하였습니다. 옥하관은 사신들이 북경에서 몇 개월간 머무르게 되는 공간을 말하는데요, 당시 사행단의 공식 숙소이자 조선사행단의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조선대표부’인 셈입니다. 자, 그럼 사신들의 행적을 따라 옥하관의 사행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연행의 목적지, 연경(燕京)

조선 사신들의 중국여행 최종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북경(北京)을 말합니다. 연경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던 것에서 ‘燕’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습니다. 원대에도 연경으로 불려 졌고, 명의 북경 천도이후부터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로 자리 잡았으며, 현대 중국의 수도이기도 합니다. 명의 쇠퇴, 그리고 청의 중원 장악과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로 이어지는 17~18세기의 연경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분위기와 맞물려 정치·경제·사회·학술·문화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조선사신을 비롯한 각국의 국제외교활동 목적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견문(見聞)에 목말라있던 조선지식인들에게는 ‘천하의 물산과 문명이 모여드는 곳’으로,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연행(燕行)은 평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던 셈입니다.
연행사의 활동은 외교적 현안을 처리하고 그 답을 받아가는 1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선진문물의 체험과 수용,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연행사의 활동 공간 역시 외교문서의 전달과 각종 하례 참석 등과 같은 공적업무를 수행하는 공간 외에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와 관심, 조․청 문인들의 학술교류의 양상과 북경의 명소유람 동선에 따라 사적활동 공간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요,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 공식외교업무 수행 공간, 둘째 학술문화 교류 공간, 셋째 서양과학기술 수용 공간, 넷째 북경명소 유람 공간입니다. 이러한 공간들을 한꺼번에 소개하기엔 각각의 공간들이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기에 이번호에서는 공적업무를 수행해온 옥하관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주요 공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고지도인 「북경도성삼가육시오단팔묘전도(北京都城三街六市五壇八廟全圖)」를 참고하겠습니다.

[그림1] 연행의 초-중-종절(여지도/서울대 규장각 소장) [그림 1] 북경 고지도, 「북경도성삼가육시오단팔묘전도[北京都城三街六市五壇八廟全圖] ①공식사행업무수행 공간,
②학술문화교류 공간, ③서양과학기술수용 공간, ④ 북경명소유람 공간

사행단의 공식 숙소, 옥하관(玉河館)에 들다.

북경의 조선관을 대체로 회동관(會同館) 혹은 사역회동관(四譯會同館)이라고 했지만, 옥하관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는 회동관이 통주에서 북경 자금성 안으로 이어지는 통혜하(通惠河)의 지류인 옥하(玉河)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현재 정의로(正義路)에 복개된 옥하중교(玉河中橋)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으로 골목이 있는데 동교민항(東郊民港)이라고 부릅니다. 옥하관은 동교민항 옥하중교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최고인민법원(最高人民法院)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림2] 회동관 위치(추정)-동교민항 최고인민법원 입구 [그림 2] 회동관 위치(추정)-동교민항 최고인민법원 입구

  • 정의로 공원(옥하 복개지)

    [그림 3] 정의로 공원(옥하 복개지)
  • 옥하중교에서 바라본 회동관 방향

    [그림 4] 옥하중교에서 바라본 회동관 방향

삼사(三使)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행원들이 옥하관에 머물렀지만, 왕자(王子)가 정사(正使)로 참여하는 경우 별관(別館)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1658)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이후 조․청간의 현안 해결을 위해 일생의 대부분을 사행노정에서 보냈던 인물입니다. 청 조정은 1645년(인조23) 사은 겸 진하사의 정사로 참여한 인평대군을 옥하관이 아닌 별관으로 초치하여 예우했고, 부사, 서장관 등은 옥하관에서 머물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사항이었고, 대부분의 조선 사행은 옥하관과 혹은 정해진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림5] 조선사행단의 숙소 위치(비정) [그림 5] 조선사행단의 숙소 위치(비정)

그러나 명․청대의 조선사절단 숙소로 활용되던 옥하관은 1693년 러시아인들에 의해 관소를 선점당하면서 점차 인근의 옥하교관(玉河橋館 : 南館, 南小館, 高麗館, 朝鮮館으로도 불림), 서관(西館) 등 새로운 숙소를 이용하였으며, 때로는 청측의 사정에 따라 독포사, 융복사, 십방원, 북극사, 지화사, 법화사 등 사찰을 사행 관소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옥하남교에 있던 남관, 즉 옥하교관은 사행단의 숙소로 많이 활용되었는데, 담헌 홍대용, 유언호, 서호수, 홍양호, 김경선, 홍순학 등 사행이 끝나는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행의 숙소로 이용되었습니다. 현재 북경시공안국(北京市公安局)이 있는 자리로 파악됩니다.

서관(西館)은 1780년 건륭70세 만수절 사행에 참여한 연암 박지원 일행이 머물렀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행이 머물던 옥하관이 아닌 곳으로 숙소를 정한 이유는 1779년에 옥하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아직 복구를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서관으로 숙소를 정해야 했던 것인데요, 당시 서관의 위치는 자금성 서남쪽 선무구 서단(西單)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첨운(瞻雲)’이라는 편액이 걸린 서단패루(西單牌樓) 서쪽 골목의 백묘(白廟) 왼쪽”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현재의 민족문화궁(民族文化宮) 뒤쪽 경기호동(京畿胡同) 일대입니다. 백묘(白廟)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중국은행(中國銀行)의 서쪽에 해당되는 지점쯤 됩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당시 옥하관에 들지 못하고, 서관에 든 이유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간혹 우리나라 별사(別使)와 동지사(冬至使)가 연경(燕京)에 들어와서 서로 마주치게 되면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된다. 별사가 먼저 건어호동(乾魚胡同)의 회동관에 들어있어서 금성위(錦城衛:정사 박명원을 말함)는 동지사(冬至使)로 왔다가 서관(西館)에 들었으며, 작년에 회동관(會同館)이 불에 타버린 후 미처 고쳐 짓지 못했음으로 이번 사행 역시 서관(西館)에 들게 되었다”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黃圖紀略>, 서관(西館), 1780-8-1

[그림6] 조선사행단의 숙소 위치(비정) [그림 6] 옥하남관 위치(추정)-북경시공안국

[그림7] 서관 일대(추정), 민족문화궁 뒤 경기호동 [그림 7] 서관 일대(추정), 민족문화궁 뒤 경기호동

조공-책봉의 외교관계, ‘고명(誥命)을 받아오라’

현재 북경에 남아있는 사행들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면, 국가외교사절로서 공무를 수행하던 삼사(三使)를 비롯한 통관(通官:역관(譯官))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공간이 바로 동교민항거리와 정의로 일대입니다. 옥하관의 시끌벅적한 풍정(風情)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조선 사신들의 공식사행업무는 사행단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사행은 북경에 도착한 후부터 청조의 통제에 따라야 했으므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사행의 입관(入關)전부터 자국(自國) 인사들의 접촉을 금지하는 등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였습니다. 특히 삼사(三使)의 경우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옥하관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조선후기 정기사행인 동지사의 경우 대략 음력12월 22일 전후에 입경하여 후년 2월 초순까지 약 40~50일 정도 머무르게 되는데요, 조선의 외교대표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림8] 북경 경산공원에서 조망한 자금성 전경  [그림 8] 북경 경산공원에서 조망한 자금성 전경

조선 사행이 청(淸) 조정을 상대로 직접적으로 대응했던 주요관서는 예부(禮部)입니다. 사행은 외교문서의 전달 및 답신 수령을 위해 예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했고, 예단방물의 납부를 위해서 황궁 동화문 안 체인각(體仁閣)을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황제가 주관하는 조회(朝會)를 비롯한 사은(謝恩) 의례 참석을 위해서는 홍로사(鴻矑寺)에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인사법을 사전에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예법을 연습하던 곳이 ‘습례정(習禮亭)’입니다. 또한 황제의 태화전(太和殿) 조회나 원명원(圓明園) 행차에 참여하여 황제를 알현하거나 황제의 천단(天壇) 거둥 때 나가서 전송(祗送)과 영접(祗迎)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황제가 자금성을 거둥할 때 조선 사신들이 황제의 영송을 위해 대기했던 곳은 주로 오문(午門)의 서쪽 각루 아래였습니다.

  • 자금성 오문과 오봉루

    [그림 9] 자금성 오문과 오봉루
  • 오문 서쪽 각루

    [그림 10] 오문 서쪽 각루

이밖에도 관소출입에 관한 협조, 관소에서 열리는 무역활동, 사신들을 위해 베푸는 하마연(下馬宴)․상마연(上馬宴) 역시 모두 공적활동에 속하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담당 관청이 바로 예부였습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예부와 홍로시 등이 있던 공간은 천안문광장에 편입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으며, 사행들이 황제 알현을 위해 예를 익혔다던 습례정(習禮亭)은 천안문 서쪽 중산공원 한 켠에 옮겨져 있습니다. 혹여 독자여러분께서 이곳을 들린다면, 오랑캐로 여기던 청의 황제에게 예(禮)를 표하기 위해 삼배구고두(三跪九叩頭)를 익혔던 조선 사행의 참담한 심정을 잠시나마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림11] 예부 홍로시에 있던 습례정.(현재 중산공원 소재) [그림 11] 예부 홍로시에 있던 습례정.(현재 중산공원 소재)

정월 초하루 예식의 리허설을 위해 의관을 차려입고 뜨락에 나오다
임진일(1668년 12월 28일) 흐리고 밤에 눈이 내림.
제독 이일선이 와서 사신단 일행에게 하는 말이 내일 홍려시(鴻臚寺)에서 정월 초하루 예식을 익히게 될 것이니, 오늘 회동관 안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기에, 그의 말에 따라 의관을 차려 입고 뜨락에 나와서 수행원 일행을 인솔하여 북향하여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이일선은 수행원들이 행례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하면서 다시금 재연하게 하였는데, 나와 정사 부사는 서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계사일(12월 29일) 흐리고 눈이 약간 내림.
이른 아침에 홍려시에 도착하여 어제처럼 예행연습을 하였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연록(西溪燕錄)』, 1668-12-28 ~

[그림12] 황제 행차도(열하박물관 소재) [그림 12] 황제 행차도(열하박물관 소재)

수백명의 의장대가 황제를 둘러싸고 행차하다 - 청나라의 신년하례에 참석하다
기유년(1669) 정월 초하루(1월 1일) 을미일.
우리는 오경(五更 : 새벽3시~5시)에 의관을 갖추어 입고 동장안문(東長安門)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왼쪽을 끼고 돌아 문루에 들어갔다. 기둥과 들보 서까래가 모두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명나라 때 이 문루에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기 때문에 석재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교를 지나 천안문(天安門)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단문(端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오문(午門) 밖 큰 마당에 나아갔다. 서쪽 행각 아래에 좌정하였는데, 행각의 서쪽은 사직(社稷)이고 행각의 동쪽은 태묘(太廟)이다. 조회에 참여한 자들은 좌우로 반차(班次)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은 서반(西班)에 나아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중략)
황제가 황옥교(黃屋轎)를 타고 오문에서 나왔는데, 가마를 마주든 자가 앞과 뒤에 각각 8인으로 모두 붉은 비단옷에 표미(豹尾)를 꽂았다.
해가 뜨자 황제 일행이 궁으로 돌아왔는데, 의장과 음악이 열을 나누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궁을 나설 때의 간략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황제가 궁을 나가고 돌아오는 동안 동반과 서반의 관원들은 그저 줄곧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중략)
연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계단을 따라 대정으로 내려와서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한 뒤에 물러나와 회동관으로 돌아왔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연록(西溪燕錄)』, 1669-01-01

[그림13] 자금성 태화전 전경  [그림 13] 자금성 태화전 전경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부(禮部)는 조선 정부의 고민거리이자 현안을 처리하는데 적극 협력해야하는 주요한 파트너였습니다. 왕위(王位)의 계승과 책봉(冊封),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은 조선정부가 가장 중요시 여겼던 현안(懸案)들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신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고, 산해관(山海關)을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특히 ‘조공과 책봉’을 외교의 큰 틀로 삼았던 관계로 왕위의 계승에 책봉과 고명을 받아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외교 사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24년 인조(仁祖)의 고명(誥命=誥命冊印:황제가 왕위를 승인한다는 문서와 금인)과 면복(冕服:임금의 정복인 면류관과 곤룡포)을 받기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정사였던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 1566∼1645)의 사례는 특별합니다. 당시 반정(反正)을 통해 등극한 인조(仁祖)에게 가장 시급한 외교현안은 명(明) 조정으로부터 왕위 계승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한 해 전인 1623년에 같은 목적으로 사행한 인조책봉주청사 이민성(李民宬,1570~1629) 역시 끈질긴 노력 끝에 명 조정으로부터 책봉의 언질을 받았지만, 명쾌한 답이 아니어서 재차 사신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건 바닷길(海路)로 북경을 향한 이덕형은 인조의 고명(誥命)을 받아내기 위해 숱한 굴욕과 참담함을 무릅쓰는 등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당시 명은 요동의 오랑캐 문제를 해결한 후에나 조선 왕의 책봉 문제를 해결하려던 상황이었기에 이를 주청하여 성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공공연하게 뇌물(인삼과 금은)을 요구하는 관리들 앞에서 약소국의 나약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그의 한글 사행기록인 『죽천행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동짓달이 반이나 지나도록 국가의 대사를 이룰 기약이 없어 민망하게 지내는데, 관아의 서리들이 말하길, “너희나라 이 대사를 이루려면 인삼과 금은을 상서와 시랑에게 많이 봉송하여야 일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옥하관에 십년을 있어도 이를 이룰 기약이 없으리라.” (중략)
“공이 또 길가에 엎드려 손을 묶어 부비니 모두 불쌍히 여겨 칭찬하기를 ‘조선에 충신이 있도다.’ 하고 ‘내일 도찰원으로 오라’ 하거늘 공이 무수히 사례하시고 관에 돌아와 앉아 파루를 기다려 마을 밖에 가 대령하니 춥기가 우리나라에 비하면 더한지라, 사람이 다 떨고 섰더니….”
곡절 끝에 관청에 나가 고위관료들을 만나게 됐으나 관아에서 쫒겨 날 위기에 처하자, 죽천은 섬돌을 붙들고 내쫒기지 않으려 애원한다.
“한 대신이 갑자기 소리 질러 꾸짖되 ‘변방 적은 나라 신하가 우리 존위를 범하랴. 들어 내치고 문 닫으라.’ 공이 울며 빌어 가로되, ‘대조 모든 대인들께선 적선 하소서’, 섬돌 붙들고 나오지 않으니 …”
이덕형(李德泂), 『죽천행록』 기사(1624년 11월 22일) 中에서.

사신(使臣)들은 목숨 걸고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라.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중국 명(明)나라 실록에 조선 왕조의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치도록 주청(奏請)한 일로 조선전기 왕조의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 중 하나였습니다. 명(明)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조선의 개국조인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재되어 있어 여러 차례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던 사항입니다.

사신의 임무 - 중국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종계를 바로 잡아주소서
사신단이 예부(禮部)에 나아가니 3명의 당상(堂上)이 모두 출근하였다. 표문(表文)을 올렸다. 표문을 올린 후 또 차례로 나와 주객사 낭중(主客司郎中) 허륜(許倫)을 만났다. 이응성(李應星)을 시켜 상주하여 청하는 일을 주객사 낭중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 종계(宗系)가 중국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일은 영락(永樂) 원년(1403), 정덕(正德) 13년(1518), 지금 황제 가정 8년(1529)에 아뢰어 그렇게 고쳐 바로잡으라는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책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지 못하여 우리나라 임금과 백성들이 그지없이 울적해합니다. 대인께서 상세하게 마감하여 한 나라의 울적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말하였다.
“이 종계에 관한 일을 여러 번 아뢰어 상국(上國)을 번거롭게 하여 지극히 황공합니다. 그리고 상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변경에서 끊임없이 왕래하여 폐해도 적지 않으니 이번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낭중이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조정에서 틀림없이 잘 할 것이니 물러들 가십시오.”(중략)
“그대는 어전(御前)의 통사인데 왜 이곳에 왔소?” 대답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중요하게 여기셔서 배신(陪臣)을 특별히 사신으로 보내셨고 또 신을 보내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권벌(權橃) 『조천록(朝天錄)』, 1539-10-23 ~ 1539-10-24

조선에서는 그간 수차례의 주청사를 보내오다 1581년(선조 14)에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중찬(重撰)된 ≪大明會典≫의 수정된 조선 관계 기록의 등본(謄本)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번에는 ≪大明會典≫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황제의 친람(親覽)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황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大明會典≫ 중에서 조선 관계 부분 한 질을 보냈고, 선조는 이것을 종묘·사직·문묘에 친히 고하였습니다. 이후 1589년에 성절사 윤근수가 ≪大明會典≫ 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 조선 왕조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행단의 임무가 가히 집요하고도 지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근수(尹根壽), 황정욱(黃廷彧), 유홍(兪泓)은 이후 광국공신 1등에 오르기도 합니다.

대명회전에 변계종무를 고친다는 칙서를 받다
서장관을 보내어 예부에 문서를 올린 일에 대해 좌시랑(左侍郞)에게 아뢰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당신들이 문서에 기록한 내용대로 잘못된 것을 고쳐 줄 것을 황제께 아뢰었고 별도의 문서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으니 조만간에 조칙을 내려 당신들에게 자세히 알려 줄 것이다."
다음날 일행이 대궐로 가서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칙서를 받았다. (중략)
100여 년 동안 모함을 받은 것을 하루아침에 깨끗이 씻어버렸고, 황제의 칙서가 간곡하여 만 리 밖의 사정에 대해 밝게 알고 계셨기에 황제의 은혜에 감격하여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배삼익(裵三益), 『조천록(朝天錄)』, 1584-07-06 ~ 1584-07-07

종계변무 해결 과정에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는데요, 특히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의 일화는 『통문관지(通文館志)』 에 잘 드러납니다. 홍순언은 북경 사행노정의 유곽에서 만난 여인과의 인연으로 후일 종계변무를 해결하는데 공을 세워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올랐습니다.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에 기록된 공신 19명 중 역관은 홍순언 단 한명 뿐이었습니다.
종계변무는 조선왕조의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고, 명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얕잡아 보는 등 외교적인 문제가 많았기에 종계오기(宗系誤記)를 수정하고자 주청사행(奏請使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행무역(使行貿易)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사행이 북경 회동관(옥하관)에 머무르는 동안 사행무역(使行貿易)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조공책봉체제에서 사행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은 사행의 또 다른 목적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활동입니다. 조선과 같이 약소국인 경우에는 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양측의 교역(交易)은 예부(禮部)의 감시 하에 이루어졌으며, 정해진 날에 정해진 물품만을 매매(賣買)할 수 있었으며, 조선 상인들이 청상(淸商)과 사사롭게 교역하는 것을 엄금하였습니다.

<광국공신녹권 />(상)에 수록된 홍순언의 공신 등급 [그림 14] <광국공신녹권>(상)에 수록된 홍순언의 공신 등급

회원관의 시장, 교역할 물건을 가져온 사람들과 탐욕스러운 대인들로 가득하다
5월 1일 이날 회원관 안에서 시장을 개설하니 교역할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대인 3명도 교역할 물건을 보내 왔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 하니, 저들의 탐욕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배삼익(裵三益), 『조천록(朝天錄)』, 1584-04-24 ~ 1584-05-01

조선은 왕조 초기부터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를, 얼마 후에는 동지사(冬至使)를 더하여 매년 네 차례의 정기사행과, 임시사행을 명에 보냈습니다.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예가 유지되었습니다. 조공(朝貢)과 상사(賞賜) 등의 형태로 양국 사이에 이른바 관무역(官貿易)이 행해지는 동시에 사행의 사무역(私貿易)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대청무역은 청과의 새로운 조공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만, 근본적인 무역의 큰 틀은 사행무역(使行貿易)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연행사절단(1863년)의 모습, 우측사진은 삼사의 수행원과 역관들로 보인다 [그림 15] 연행사절단(1863년)의 모습, 우측사진은 삼사의 수행원과 역관들로 보인다

대청(對淸) 무역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그룹은 주로 역관(譯官)들입니다. 역관들은 통관(通官:통역)으로서의 고유한 업무 외에 조정으로부터 부여 받은 교역의 임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행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고,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역관은 상대국의 언어소통이 가능한 점과 ‘팔포무역’(八包貿易)과 같은 권리, 사행단(使行團)내에서의 지위를 십분 발휘하여 상인으로서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관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이나 장희빈의 숙부 장현(張炫, 1613년 ~ ) 역시 사행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역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행무역은 주로 사행의 공식 외교업무가 마무리될 즈음이나, 귀국 일정이 잡히면 회동관에서의 무역활동이 진행되는데요, 교역이 이루어지는 회동관은 상인들 간의 교역행위의 장소를 넘어서서 조․청간 문화경제 교류의 현장이자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하는 중요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유리창 고서의 서가 [그림 16] 유리창 고서의 서가

다음 회에는 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빠지지 않고 드나들었던 당대 문화의 중심지 유리창(琉璃廠)일대와 서구의 선진과학기술을 경험했던 천주당(天主堂)을 중심으로 한중인문교류가 펼쳐진 역사의 현장을 영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작가소개

신춘호 작가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준험한 벼랑이 다퉈선 곳, 무당의 장구 소리와 부채춤이 밤낮없이 이어지다”

양대박 <두류산기행록>, 1586-09-06
1586년 9월 6일, 양대박 일행이 지리산 유람을 하고 있는데 그 형세가 준험한 벼랑이 다투듯 서 있고, 웅장한 수석(水石)이 아름다워 어제 본 것과 백중세를 이루었다. 또 산길로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니 집은 길 옆의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으로 장구를 치는 것이 밤낮없이 이어졌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기이하여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수없는 곳이어서 밥을 재촉해 먹고 신을 신고서 돌아보지 않고 출발하였다.

“가마 위에 오른 선비와 가마 멘 승려들, 험준한 산길을 가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11
1618년 5월 11일 무술 아침엔 맑고 저녁엔 흐림. 남도 일대를 유람 중이던 양경우는 느즈막히 일어나 정돈한 다음에 늙은 승려 8, 9명과 함께 절 뒤의 험준한 절벽을 개미처럼 부여잡고 올랐다. 여러 승려들이 견여를 가지고 뒤따랐다. 양경우가, “나는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튼튼한 몸을 갖추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비록 늙었으나 어찌 너희들에게 수고를 끼치겠는가? 그것을 두고 와라.”라고 하였다. 몇 리를 가니 자못 힘이 들어 젊은이로 하여금 등 뒤에서 밀게 하였다. 오래지나 더욱 힘이 들자 돌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사당 공사 석 달, 목수의 품삯 22냥”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8-30
사당 공사를 시작한 것이 1699년 8월 30일이었고, 사당 공사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30일이다. 겨울에 공사를 중단한 4개월 동안을 제외시키면 대략 3개월만에 사당 공사가 끝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당 공사를 맡았던 목수는 품삯 22냥을 받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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