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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도착하여 제독에게 협조를 요청하다
1632년 10월 22일, 홍호 일행이 북경에 도착한지도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정사와 부사, 그리고 서장관인 홍호가 모두 제독청으로 나아가 글을 올렸다. 그러자 명나라 측 제독인 공제독이 나와 말하였다.
“이전에 이미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오늘 인사는 약식으로 하지요.”
인사를 마치고는 부사가 말하였다.
“이런 엄동설한에 대감께서 작은 나라의 보잘것없는 벼슬아치들 때문에 날마다 옥하관에 납시게끔 하고 있으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제독이 글을 받아들어 읽어보고는 말하였다.
“이 사안은 그대 나라 임금의 효성과 관련된 일인데, 지금 해당부서에서 사례를 조사하고 있으니, 조사를 마치면 금방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임금께서 저희들을 파견한 뒤로 밤낮으로 기다리고 계시는지라 저희는 한 시각도 편히 먹고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행길 바다 5,000리에 악풍과 역류에 막혀 도착일자가 늦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북경에 오고서도 숙소에만 갇혀 있어 저희들의 간절한 심정을 호소할 길이 없는데, 그나마 저희 작은 나라의 사정을 살피고, 저희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라곤 오직 대감밖에 없습니다.
예전 성화(成化) 연간에도 조선에서 국왕의 친부를 추숭했던 전례가 있으니, 이 사실에 근거하여 예부관리들을 설득하면 일을 마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일은 대감을 통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예전 성화 연간에 왔던 배신(陪臣)들은 북경에 온 지 20여 일 만에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 저희는 1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고 한낱 양식만 축내고 있으니, 부디 대감께서 굽어살피십시오.”
그러자 제독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예부 상서께 곡진히 말씀드려 보겠소이다.”
대화를 마치고 사신단은 제독에게 읍을 하고 물러 나왔다. 나라의 공무를 맡아 바닷길을 험하다 여기지 않고 달려왔는데, 시간만 지체되고 일은 진행이 되지 않으니 정사와 부사, 서장관 홍호 모두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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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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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조천일기(朝天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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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호(洪鎬)
주제 : 외국관료와의 만남
시기 : 1632-10-2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홍호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20호
웹진 담談 20호
조선왕조실록
◆ 인조의 국왕 등극과 원종추숭문제
이 이야기는 사신단이 옥하관에 머물면서 본래 명나라에 주청하려 했던 사안의 처리를 부탁하는 장면이다. 당시 사행단은 인조의 친부인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한 것에 대하여 명나라의 인정을 구하고 또 시호를 받아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원종은 조선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인조의 친부였다. 생전의 작위는 정원군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 선조를 호종하여 호종공신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능창군, 능양군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능창군이 광해군 즉위 이후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 그리하여 걱정과 울분에 싸여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향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형이 역모란 누명으로 죽고 이 때문에 아버지 역시 화병으로 죽게 되자 능양군은 광해군을 몰아낼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귀, 김류, 신경진 등의 사림 및 무신들과 손을 잡고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였고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조선 16대 왕인 인조였다. 인조는 즉위 이후 친부인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에 봉하였는데, 대원군은 왕의 친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인조의 생각에는 선조 – 정원대원군 – 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를 왕가의 정통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 계획하였다. 이리하여 정원대원군을 다시 추존하여 왕의 지위에 올리고 종묘에 모실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조의 구상에 대해 서인계 학자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서인계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과 남인의 예학자 허목 등은 인조가 선조의 왕통을 이은 것이며, 친 혈육관계로는 비록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지만 왕통상으로는 선조가 아버지이며 정원군은 숙부뻘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예학자들의 주장은 왕가 혈통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친혈연보다 의리관계를 중시한 예론을 주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공신계 세력과 연합하여 결국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였다. 묘호는 원종이라 하였고, 능호는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원종 추숭의 강행으로 서인계 원로 학자인 김장생과 김집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허목의 경우 이에 대한 비판을 지속하다가 관직 임용이 한동안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 원종 추숭은 정치적으로는 당시 국왕을 비롯한 훈신계열 관료와 사림 세력 간의 갈등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혈통에 입각한 예법과 의리론에 입각한 예법의 충돌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국왕의 친부에 대한 추숭은 원종이 처음이 아니었다. 바로 조선 9대왕인 성종의 경우도 친아버지가 왕이 아니면서 재위에 오른 경우였다. 성종의 아버지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였는데 의경세자는 세조보다 먼저 사망함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동생인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종이 20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 후사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성종은 즉위 후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숭하고 종묘에 신위를 모셨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성화 연간의 전례’ 란 바로 이때의 일을 말한 것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632년 10월 22일 맑음. 정사와 부사 그리고 나는 모두 제독청(提督廳)에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렸다. 제독이 말하였다. '이전에 이미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오늘은 서로 읍만 합시다.' 서로 읍을 마치자, 부사가 역관 장예충(張禮忠)을 시켜 말하였다. '이런 엄동설한에 대감께서 작은 나라의 보잘 것 없는 벼슬아치들 때문에 날마다 옥하관(玉河館)에 납시게끔 하고 있으니, 생활하시는 절도에 허물이 될까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는 정문을 올리니, 제독이 내용을 훑어보고 나서 말하였다. '이것은 그대들의 나라 국왕의 효성(孝誠)과 관련한 일인데, 해당부서에서 지금 사례를 조사하고 있으니, 조사가 끝나면 마땅히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말하였다. '우리 임금께서 저희들을 파견한 뒤로 밤낮으로 우러러 보며 기다리고 계시는지라 일찍이 한 시각도도 편안히 먹고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닷길 5,000리에 악풍과 역류에 가로막혀 오늘에서야 도착하여서는, 머리를 맞대고 숙소에만 갇혀 있어 저희들의 간절한 심정을 호소할 길이 없는데, 우리 하방국(下邦國)의 사정을 살피고, 저희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이라곤 오직 대감밖에 없습니다. 옛날 성화(成化) 연간의 사례가 마치 해와 달처럼 분명하니,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예부상서[堂上]를 설득하여 끝내 큰 은혜로써 성전(聖典)을 완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감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성화 연간에 주청을 받들고 왔던 배신(陪臣)들은 북경에 도착한 지 20여 일 만에 명을 받들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행차에는 옥하관에 하루 머물 때마다 광록시(光祿寺)의 하루 분의 전량(錢糧)을 소비하고 있으니, 다방면으로 찬조(贊助)하셔서 일찍 답신이 내려와 저희들이 일을 끝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하시는 것이, 먹고 자는 일상사에서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대감에 대한 저희들의 바램입니다.' 제독이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곡진히 예부 상서께 말씀드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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