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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옆에 무릎 꿇고 앉은 사신들, 내려준 상을 받다
1584년 7월 3일, 우리(배삼익과 사신 일행)는 황제가 내려준 상을 받았다. 새벽녘에 황제가
황극문(皇極門)
에 앉아 있었는데 많은 관원들이 1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갔다.
서반(序班)
이 우리 일행을 인도하여 들어가 황제가 다니는 길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무릎 꿇고 상을 반포할지의 여부를 물으니, 황제가 ‘시행하라.’ 하였다. 그리고 즉시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나왔다.
황극문에서
경천백옥주(敬天白玉柱)
에 이르니 그 문의 넓이가 넓어 모두 30걸음 정도 되었는데
동장안문(東長安門)
은 10걸음 정도 되었다. 이날 새벽에 해가 뜨지 않아 황제의 얼굴이 어떠한지는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동장안문에서 금천교(錦川橋)를 건너니 승천문(承天門)이 있었고 안에는
단문(端門)
이 있었고 그 안에는
오문(午門)
이 있었으며 그 안에 황극문이 있었다. 승천문 밖에는 대명문(大明門)이 있고 서쪽에는 서장안문(西長安門)이 있었으며, 오문 위의 누각은 9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운데 한 칸은 넓고 양쪽은 협소하였으며 각각 13칸이었다. 좌우의 누각은 각각 5칸인데 사면이 같았고 가운데 1칸은 넓었다.
4일, 새벽에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오문(午門) 밖으로 가서 5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여 어제 상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천단(天壇)으로 갔다.
정양문(正陽門)
에 도착하였는데 문을 지키는 관원이 허가서가 없다는 이유로 매우 편치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는 통사 등이 매우 어리석어 허가서를 문지기에게 주었어야 하는데도 아직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향전(大享殿)에 올라 보니 대향전은 하늘을 형상하여 둥글게 만들었는데, 위에는 짚은 청색의 기와가 덮혀 있었고, 중간층은 붉은 기와로 아래층은 청색 기와로 덥혀 있었다. 북쪽에 황건전(皇乾殿)이 있었는데, 이곳도 푸른 기와로 덥혀 있었다.
이어 문을 나서 또
원구(圓丘)
로 가보니 난간과 벽돌을 깔아 둔 것이 모두 짙은 청색이었다. 모두 3층이었는데 4개의 문으로 둘러져 있고 문은 각각 3개의 석문이 있었으며 2중으로 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옥황전(玉皇殿)이 있었다. 대체로 황건전에서 원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결하여 곧은길로 만들었고 안팎에 향나무를 나열해 심어 두어 가는 길이 잘 정돈되어 있어 혼잡하지 않았으니 또한 좋은 볼거리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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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조천록(朝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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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삼익(裵三益)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584-07-03 ~ 1584-07-04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배삼익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20호
◆ 중국 황제 배알 의식
다음은 사행단의 북경 입경 이후의 일정이다. 이것으로 보아 입경이후 황제알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고, 알현의식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부의 회동관에 조선 사행 도착을 알리다. 사행이 북경에 들어가는 날에는 청나라 쪽의 영송관(迎送官)과 아역(衙譯: 통역관)이 앞의 참(站)에서 먼저 달려가 조선 사신의 북경 숙소인 예부(禮部)의 회동관(會同館)에 조선 사행의 도착을 알린다. 나중에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불리는 회동관 소속의 아역 몇 사람이 나와 동악묘(東岳廟)에서 조선 사행을 맞이한다. 이때 삼사는 공복을 갖추어 입고, 행렬의 앞을 인도하는 전배(前輩)와 타고 오던 교자(轎子), 해를 가리던 일산(日傘)을 없앤다. 사행은 아역의 인도를 받아 제화문(齊華門)으로 들어가 회동관으로 향한다. 회동관에 다른 나라 사신이 들어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 관소에 이르면 책임자인 제독(提督) 이하 여러 아역들과 행정을 맡은 하급관리, 심부름을 하는 일꾼[館夫]과 종[皁隷]들이 문 앞에 줄을 지어 있으면서 사신을 맞아들였다.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예부에 나가 표문과 자문을 바치다. 관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정사 이하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아갔다. 예부 상서와 낭중(郎中)과 함께 공복을 갖추고 삼사를 맞이하였고, 삼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표문과 자문을 바쳤다. ○홍려시에서 황제를 만나기 위한 의식을 연습하다. 삼사는 조회에서 황제를 만나기에 앞서 홍려시(鴻臚寺)에서 의식을 연습하였다. 정사 이하 공식 인원 모두가 참여했으며, 몸이 아파 결원이 있으면 만상군관에게 옷을 입혀 대신하게 하였다. 삼사신이 맨 앞줄에 서고, 당상역관부터 압물관에 이르기까지 27명은 9명씩 3줄을 이루어 그 뒤에 차례로 섰다. 절하라는 소리에 맞춰 일제히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하였는데, 한 사람도 틀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해야 했다. ○태화전에 나가 황제를 알현하다. 정월 초하루 새벽 황제가 태화전(太和殿)에 나아가면, 조선 사신은 몽골을 비롯한 다른 외국의 사신들과 함께 서반(西班)의 뒷자리에 서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정사가 1품의 왕족이면 궁전 안에 들어가 청나라의 5등 제후(諸侯)의 말석에 앉아 차(茶)를 마시고 파하기도 하였다. 가지고 간 방물과 세폐는 당상역관과 압물관이 품목별로 호부의 창고와 황궁의 내탕고(內帑庫: 황실의 창고) 등에 바쳤다. 물건을 받은 곳에서는 각기 예단을 내어주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4년 7월
3일. 흐리고 비가 내림.
황제가 내려 준 상을 받았다. 새벽녘에 황제가 황극문(皇極門)에 앉아 있었는데 많은 관원들이 1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갔다.
서반(序班)이 우리 일행을 인도하여 들어가 황제가 다니는 길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무릎 꿇고 상을 반포할지의 여부를 물으니, 황제가 "시행하라" 하였다. 그리고 즉시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나왔다.
황극문에서 경천백옥주(敬天白玉柱)에 이르니 그 문의 넓이가 넓어 모두 30걸음 정도 되었는데 동장안문은 10걸음 정도 되었다. 이날 새벽에 해가 뜨지 않아 황제의 얼굴이 어떠한지는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동장안문(東長安門)에서 금천교(錦川橋)를 건너니 승천문(承天門)이 있었고 안에는 단문(端門)이 있었고 그 안에는 오문(午門)이 있었으며 그 안에 황극문이 있었다. 승천문 밖에는 대명문(大明門)이 있고 서쪽에는 서장안문(西長安門)이 있었으며, 오문 위의 누각은 9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운데 한 칸은 넓고 양쪽은 협소하였으며 각각 13칸이었다. 좌우의 누각은 각각 5칸인데 사면이 같았고 가운데 1칸은 넓었다.
4일. 맑음.
새벽에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오문(午門) 밖으로 가서 5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여 어제 상을 내려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천단(天壇)으로 갔다. 정양문(正陽門)에 도착하였는데 문을 지키는 관원이 허가서가 없다는 이유로 매우 편치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는 통사 등이 매우 어리석어 허가서를 문지기에게 주었어야 하는데도 아직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형전(大亨殿)에 올라 보니 대형전은 하늘을 형상하여 둥글게 만들었는데, 위에는 짚은 청색의 기와가 덮혀 있었고, 중간층은 붉은 기와로 아래층은 청색 기와로 덥혀 있었다. 북쪽에 황건전(皇乾殿)이 있었는데, 이곳도 푸른 기와로 덥혀 있었다.
이어 문을 나서 또 원구(圓丘)로 가보니 난간과 벽돌을 깔아 둔 것이 모두 짙은 청색이었다. 모두 3층이었는데 4개의 문으로 둘러져 있고 문은 각각 3개의 석문이 있었으며 2중으로 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옥황전(玉皇殿)이 있었다. 대체로 황건전에서 원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결하여 곧은길로 만들었고 안팎에 향나무를 나열해 심어 두어 가는 길이 잘 정돈되어 있어 혼잡하지 않았으니 또한 좋은 볼거리였다.
이미지
자금성 오문(午門)
1860년 자금성 오문(...
1901년 자금성 단문(...
1915년 촬영한 정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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