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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예식의 리허설을 위해 의관을 차려입고 뜨락에 나오다
임진일(1668년 12월 28일) 흐리고 밤에 눈이 내림.
제독 이일선이 와서 사신단 일행에게 하는 말이 내일
홍려시(鴻臚寺)
에서 정월 초하루 예식을 익히게 될 것이니, 오늘
회동관
안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기에, 그의 말에 따라 의관을 차려 입고 뜨락에 나와서 수행원 일행을 인솔하여 북향하여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이일선은 수행원들이 행례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하면서 다시금 재연하게 하였는데, 나와 정사 부사는 서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계사일(12월 29일) 흐리고 눈이 약간 내림.
이른 아침에 홍려시에 나아갔다. 길에서 길들인 코끼리 4마리를 보았는데, 엄청나게 컸다. 그 위에 5~6명의 사람이 올라탔는데, 마치 지붕 위에 있는 것 같았고, 코는 거의 땅에 닿을 듯하였으며, 이빨은 길이가 6~7척 가량 되는 것이 커다란
서까래
같았다.
홍려시에 도착하여 어제처럼 예행연습을 하였다. 통관의 말로는
탕약망(湯若望)
의 문하생들이
양광선(楊光先)의 역법(曆法)의 오류
에 대해 고발하여서, 어제 조정에서 양측이 변론을 벌였는데, 현직
역관(曆官)
측의 논리가 딸려서 장차
양광선
에게 벌을 주고 내년부터는 역법을 바꾸어 탕약망의 역법을 따를 것이라고 한다. 탕약망은 6~7년 전에 이미 죽었는데, 그가 배척을 받았을 때 다들 억울한 처사라고들 했다 한다.
갑오일(12월 30일)
이른 아침에
광록시(光祿寺)
의 관리가
세식(歲食)
을 보내왔는데, 다섯 소쿠리였고, 소쿠리마다 43그릇의 음식이 있었다. 총 3벌을 보내주었는데, 삼사가 그 중 2벌을 사행원들에게 내려주었다. 이전의 제도에는 광록시가 군관[巨軍]편에 보내면서 황제가 몸소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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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서계연록(西溪燕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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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세당(朴世堂)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668-12-28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박세당, 이일선, 정사 부사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20호
조선왕조실록
◆ 청나라 서양역법의 수용과 그 과정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역법을 운영해 왔다. 그것은 농업사회에서 농사의 풍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고, 이를 정책에 제대로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몇가지 전통적인 역법의 변화가 있었으며, 특히 청나라대에는 서양 역법이 수용되었다. 이를 시헌력이라 하는데, 시헌력이 시행되면서 청나라 내부에서는 치열한 역법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기에 나오는 탕약망과 양광선 일파의 주장이 그것이다. - 청대의 역법 1644년 청조(淸朝)가 들어선 후 11월에 예수회 선교사 탕약망(湯若望; Schall von Bell, Johann Adam, 1591∼1666)이 흠첨감(欽天監)의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탕약망은 숭정역서를 고쳐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 103 권으로 만들었고, 청 조정은 1644년 이것을 `시헌력(時憲曆)`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시헌력에 쓰인 원리와 수치는 모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의 지구 중심의 행성체계와 그가 측정한 천문수치를 사용하였다. 시헌력의 전반적인 체제는 중국의 역법을 따랐고, 여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아닌 티코 브라헤의 지구 중심 우주체계를 채택하였다. 천체의 운동을 본륜(本輪;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의 소원을 말함)과 균륜(均輪; 소원을 도는 또 다른 소원)을 이용하여 빠르고 느린 현상을 설명하였다. 시헌력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지구(地球)의 개념을 도입하여 달의 지반경차(地半徑差)를 썼다는 점이다. 또한 대기차(大氣差)라 하여 대기의 굴절 개념을 도입하였고, 계산상에서는 평면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이용하였다. 24절기의 문제에 있어서는 항기법(恒氣法)을 버리고 정기법(定氣法)을 채택하였다. 시헌력은 순치원년(1644년)에 시행하여 건륭 6년(1741년)까지 무릇 98년간 시행되었다. 강희 23년(1684년)에는 『역상고성(曆象考成)』 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갑자를 역원으로 하였기에 이것은 `갑자원력(甲子元曆)`이라고도 불리운다. 옹정 8년(1730년) 6월 삭(朔)의 일식은 역(曆)의 오차가 1분이었다. 이에 예수회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등으로 하여금 역상고성의 일전월리표를 수정하게 하여 일월교식을 추산하였다. 건륭 7년(1742년), 그들은 시헌력을 중수하여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篇)』 을 편찬하였다. 여기서는 옹정 계묘(1723년)를 역원으로 하였는데 그래서 `계묘원력(癸卯元曆)`이라고도 부른다. 중수한 시헌력(즉, 계묘원력)에서는 뉴튼이 개정한 세실을 채용하였다. 계묘원력은 소륜(小輪)체계를 포기하였고, 지구중심설의 타원운동법칙과 면적의 법칙을 고쳐서 사용하였다. 아울러 시차와 몽기차의 영향도 고려하였다. 계묘원력은 청조가 망할 때까지 266 년 간 사용되었다. 이것은 건륭 7년에 시행하여 청조가 망하는 1911년까지 무릇 170년 간 사용하였다. - 시헌력(時憲曆) 논쟁 시헌력에 관해서는 절기배치법인 정절법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이에 반대한 논리가 있었다. 먼저 정절법 시행을 옹호하는 논리의 요지는 태양이 부등속 운행을 하기 때문에 1년을 24개로 나눠 절기를 매기는 것보다 태양이 황도 상에서 15도씩 운동하는 시간을 한 절기로 매기는 방법이 훨씬 더 자연의 실재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서광계 사후에 『숭정역서』 편찬의 책임을 이어받은 이천경(李天經, 1579-1659)은 1635년 상소에서 “평절법은 천상의 진짜 절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탕약망 역시 “구법의 평절기는 천상의 진짜 절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시헌력의 신법이 우수함은 태양의 실질 운행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계산하기 때문이란 점을 부각했다. 또 다른 시헌력의 정절법 옹호자인 남회인(南懷仁, Ferdinand Verbist, 1623-1688)도 관측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역법이 아니라고 하면서 “신법은 비록 말이 없으나 하늘이 이를 대신하여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옹호한 이런 주장은 정절법이야말로 태양의 실제 운행 위치를 있는 그대로 표상함을 주로 내세우는 논증이라는 뜻을 좇아, 이 글에서는 이런 주장을 ‘실재론 논증(argument from realism)’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한편, 정절법 시행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시헌력 옹호자들의 희망과 달리 서양식 역법이 중국 전통 사회에 들어오면서 절기와 윤달 배치의 문제는 시헌력 논란에서 중심 의제가 되었다. 매문정은 “정기(定氣)를 위주로 역을 만들게 되면 절기의 일수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는 등 불규칙해져서 한 달 안에 세 개의 절기가 있게 되는 일이 있다. 또 원래는 윤월이 아니어야 하는데, 한 달 안에 오히려 하나의 중기만 있는 경우에 윤월을 두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는 논리로 정절법에 반대했다. 양광선(楊光先, 1579-1669)도 윤달의 배치문제와 한 달에 세 개의 절기가 드는 문제를 집중 지적했는데, 1646년 11월에 대설, 동지, 소한의 세 절기가 들어 있는 사실을 거론하며 이런 일은 “개벽 이래 지금껏 없었다.”고 강변했다. 정절법 반대자들은 주로 “중국천문학의 전통과 경전적 원칙을 지키려는 전통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무엇보다도 “정절법이 지닌 전통과의 단절을 우려했다” (전용훈 2002, 11-12쪽). 이런 주장은 시헌력 옹호자들이 내세운 실재론 논증을 부정하고 경전의 원칙과 전통을 따라야 함을 먼저 내세운다는 뜻에서 ‘전통론 논증(argument from tradition)’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문정을 경전의 원칙과 전통에 매달리는 전통론 논증의 범주에 포함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는 시헌력과 신법을 옹호하는 「상위고」에 거의 유일하게 자주 인용되는 인물일 정도로, 서양 천문학과 역법에 대해 전통론 논증과는 다른 태도로 해석되었다. 「상위고」에 인용된 매문정은 전통의 가치를 떼어내고 주천도수를 ‘이름’의 문제로 환원해 설명한다. 매문정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고력(古曆)에서는 365도 4분의 1이었는데, 지금은 360도로 정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어찌 천도(天度)가 증감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천도를 어떻게 증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역시 사람이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포백(布帛)이 여기에 있는데, 주척(周尺)으로 재면 재고 나서 남는 것이 있고 한척(漢尺)으로 재면 꼭 맞는다면, 자가 길거나 짧았을 뿐이지, 포백이 어찌 늘거나 줄었겠는가?’ 하니. . . (『국역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81-82) 그는 같은 글에서 바로 뒤이어 서양식 주천도수 360도가 계산하기에 편리함을 강조했다. 이런 태도는 왕부지(王父之, 1619-1692) 같은 이의 전통론 논증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왕부지는 계산에 유리하다 해서 360도 같이 인위적인 주천도수의 역법 단위를 부과해 자연 실제의 불규칙함을 제거하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헨더슨 2004, 269). 주대(舟代)가 길다 하여 긴 시기를 자르고, 진대(秦代)가 짧다 하여 시기를 보충해 넣어 역사적 시간을 균일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어찌 혼동스럽지 않겠는가? 서양인들이 지니칠 정도로 계산의 정확성을 추구함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왕부지, 『사문록외편』, 53쪽. 헨더슨 2004, 369에서 재인용) 사실 매문정은 서양 천문학의 단위가 단지 계산의 편리성만을 위해 임의로 조작되었다고 이해하지는 않았다. 헨더슨에 따르면, 매문정은 예컨대 황도에 기반을 둔 서양 천문학의 좌표계는 황극의 세차운동의 회전축이라는 ‘실제’의 근거를 지님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는 서양 천문학의 단위를 계산의 편의성만으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헨더슨 2004, 271). 시헌력, 절기법, 주천도수에 대한 매문정의 태도는 순수한 전통론 논증과 구별해 이해해야 한다. -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에 걸쳐 포교와 천문역산(天文曆算)을 위해 활동한 예수회 신부로 중국 이름은 탕약망(湯若望)이다. 신성로마제국 쾰른의 명문 출신으로 1611년 예수회 수도사가 되었다. 1622년 북경에 와서 월식을 3차례 예보한 것이 적중하여 유명해졌다. 1645년 순치제 때 섭정이었던 도르곤은 아담 샬(Adam Schall)을 천문대장인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에 임명하였다. 청의 신임을 얻은 그는 1650년 북경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천주당(天主堂, 南堂)을 세웠다. 1664년 강희제가 아직 친정하기 전 보정대신(輔政大臣) 오보이(鰲拜)가 전단하던 시절에 양광선(楊光先)이 서양역법(西洋曆法)을 반박하고, 신부들이 장차 바다를 건너 정복해 올 유럽의 밀정이라고 상소한 때문에 아담 샬은 한때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태황태후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혼천의․해시계․망원경 등 과학기계와 지도․성도(星圖) 등을 제작했고 명나라 말기에는 대포도 많이 주조하였다. 한문으로 저술한 저서가 다수 전한다.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포교를 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중국보다 앞선 그들의 과학이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무척 관대했다. 그들이 중국의 학자들보다 월등한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와 같은 천문학자들의 축적된 업적에 힘입어, 그동안 중국에서 사용해온 역법 추산방식보다 훨씬 정확한 계산법을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645년에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폰 벨(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이 베이징에 있는 황실 천문대의 소장에 임명되었다. 아담 샬 신부는 1650년 순치제(재위 1643-1661)로부터 베이징 최초의 교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훗날 강희제(재위 1662-1722)의 스승의 반열에 들게 된다. 모두가 그의 과학적 지식 덕분이었다. 1439년에 주조한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인 혼의渾儀를 받치고 있는 용예수회 선교사들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연구방법에 대해 황실의 중국인 천문학자들은 시기와 적대감을 드러냈다. 1668-1669년 사이에는 수학을 관장하는 부서에 있던 벨기에 출신의 신부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1623-1688)와 이슬람교로 개종한 중국인 양광선楊光先(1597-1669) 사이에 갈등을 빚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양광선은 아담 샬을 내쫓고 황실 천문대의 소장이 되었지만 역법 추산에 실패하는 바람에 추방당하고, 그 뒤를 이어 페르비스트가 소장의 자리에 오른다. 책력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는 페르비스트를 자주 찾았다. 페르비스트는 강희제에게 중국인 천문학자들이 책력 계산에 있어 중대한 실수를 어떻게 범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결국 강희제는 이미 선포한 책력을 수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자신들의 과학으로 승리를 거둔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기독교 허용 칙령의 반포를 이루어냈다. 천문대 책임자로서 페르비스트는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수학을 강의하고 새롭고 정확한 기구들을 제작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고관상대 옥상에 전시된 천문 관측기구들은 바로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강희제의 요구에 따라 제작한 것이다. 강희제는 페르비스트의 가장 열성적인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페르비스트는 그에게 서양의 과학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같이 황궁을 방문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1838년까지 황실 천문대의 책임을 맡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의 하늘을 책임지던 이 시기에 세계의 힘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강희 연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천문학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선제인 순치제(順治帝) 때 아담 샬은 欽天監(흠천감, 황실 천문연구소) 監正(감정, 천문대장)이 되어 서양 역학에 기초한 시헌력을 공포했다. 그런데 강희제 즉위 초기에 양광선(楊光先)이 시헌력(時憲曆)을 공격하고 오보이(鰲拜)가 양광선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서 아담 샬과 페르난디난트 베르비스트는 투옥되었다. 아담 샬은 옥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아담 샬을 대신하여 흠천감 감정이 된 양광선은 구력(舊曆)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러나 당연히 실제 천기와는 맞지 않았다. 오보이를 배제하고 친정에 들어간 강희제는 베르비스트와 양광선을 불러 정오의 그림자 길이를 계산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베르비스트의 계산이 양광선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강희제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신뢰하고 아울러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조아생 부베의 「강희제전」에는 강희제는 베르비스트로부터 기하학과 천문학을 배우고 페레이라에게는 서양음악을 배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에는 강희제가 수학을 배울 때 사용했던 책상이 보존되어 있다. 그 옆에는 여러 가지 계산표나 계산 용구가 놓여있다. 또 강희제가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선교사가 몸에 지니고 있던 키니네를 복용하고 회복된 것이 있었다. 그 뒤부터 강희제는 말라리아에 걸린 신하들에게 이 키니네를 하사했다고 한다. ‘기독교만 믿으면 부족함이 없는 완견 무결한 군주(君主)’라고 부베가 말한 것은 이 강희제가 얼마나 지식용이 높고 건전한 군주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원문 번역
1668년 12월 28일 임진일 흐리고 밤에 눈이 내림. 제독 이일선이 와서 하는 말이 내일 홍로시(鴻臚寺)에서 정월 초하루 예식을 익히게 될 것이니, 오늘 회동관 안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길래, 그의 말에 따라 의관을 차려 입고 뜨락에 나와서 수행원 일행을 인솔하여 북향하여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이일선은 수행원들이 행례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하면서 다시금 재연하게 하였는데, 나와 정사 부사는 서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12월 29일 계사일 흐리고 눈이 약간 내림. 이른 아침에 홍로시(鴻臚寺)에 나아갔다. 길에서 길들인 코끼리 4마리를 보았는데, 엄청나게 컸다. 그 위에 5~6명의 사람이 올라탔는데, 마치 지붕위에 있는 것 같았고, 코는 거의 땅에 닿을 듯 하였으며, 이빨은 길이가 6~7척 가량 되는 것이 커다란 서까래 같았다. 홍로시에 도착하여 어제처럼 예행연습을 하였다. 통관의 말로는 탕약망(湯若望: 1591~1666. 아담샬. 독일예수회 선교사로 서양의 역법과 천체관측 기술로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의 문하생들이 양광선(楊光先)의 역법(曆法)의 오류에 대해 고발하여서, 어제 조정에서 양측이 변론을 벌였는데, 현직 역관(曆官) 측의 논리가 딸려서 장차 양광선에게 벌을 주고 내년부터는 역법을 바꾸어 탕약망의 역법을 따를 것이라고 한다. 탕약망은 6~7년 전에 이미 죽었는데, 그가 배척을 받았을 때 다들 억울한 처사라고들 했다 한다. 12월 30일 갑오일 이른 아침에 광록시(光祿寺)의 관리가 세식(歲食)을 보내왔는데, 다섯 소쿠리였고, 소쿠리마다 43그릇의 음식이 있었다. 총 3벌을 보내주었는데, 삼사가 그 중 2벌을 사행원들에게 내려주었다. 이전의 제도에는 광록시가 군관[巨軍]편에 보내면서 황제가 몸소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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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
3
환갑 넘어 명나라 황궁을 보고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다
1617-11-25
중국 북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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