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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의장대가 황제를 둘러싸고 행차하다 - 청나라의 신년하례에 참석하다
기유년(1669) 정월 초하루(1월 1일) 을미일.
우리(박세당과 사신 일행)는 오경(五更 : 새벽3시~5시)에 의관을 갖추어 입고 동장안문(東長安門)에 나아가 밖에서 말에서 내려 왼쪽을 끼고 돌아 문루에 들어갔다. 기둥과 들보 서까래가 모두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명나라 때 이 문루에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기 때문에 석재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교를 지나 천안문(天安門)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단문(端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오문(午門) 밖 큰 마당에 나아갔다. 서쪽 행각 아래에 좌정하였는데, 행각의 서쪽은 사직(社稷)이고 동쪽 행각의 동쪽은 태묘(太廟)이다. 조회에 참여한 자들은 좌우로 반차(班次)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은 서반(西班)에 나아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황옥교(黃屋轎)를 타고 오문에서 나왔는데, 가마를 마주든 자가 앞과 뒤에 각각 8인으로 모두 붉은 비단옷에 표미(豹尾)를 꽂았다. 의장 행렬 앞에서 인도하는 이들이 가마 앞에 5~6인 있어서 황제를 마주하는데,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었고, 여러 왕들과 존귀한 신하 및 그들을 수행하는 자들이 600~700명 이었는데, 그들의 의복과 갖옷이 오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관원들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은 말을 타고 뒤쫓아가는데, 대열을 갖추지는 못했다.
듣자하니 황제가 장차 등장군(鄧將軍)의 제당에 가서 분향한다고 하길래 “등장군은 어떤 귀신이기에 천자가 종묘에 배알하지 않고 등장군의 묘당에 배알하는가.”하고 물었더니, 황제의 먼 조상이 되는 이라고 하였다.
해가 뜨자 황제 일행이 궁으로 돌아왔는데, 의장과 음악이 열을 나누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궁을 나설 때의 간략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노부(鹵簿 : 황제의 의장대)는 오문 밖에 도착하자 좌우로 나누어 섰는데, 그 의식이 매우 엄숙하여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는데, 말을 타고 의장대를 뒤따르던 일행은 출궁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내달려 돌아왔다. 황제가 궁을 나가고 돌아오는 동안 동반과 서반의 관원들은 그저 줄곧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일행이 앉은 자리에서 약간 가까운 곳에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누추하고 이상하였다. 쓰고 있는 모자와 입은 옷은 청나라 사람들과 비슷하였는데, 모자 꼭대기의 구연(裘緣 : 가죽을 마무리하는 모양)하는 제도가 달랐다. 그들 중 제일 윗자리에 앉은 자는 모습이 서양인과 흡사했으며, 녹취구(綠毳裘)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섬세하게 직조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들은 몽고의 특수한 종족으로 북해 가에 삽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서북쪽의 아주 먼 바닷가에 사는데, 서양과 가까운 곳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북경에서 7천 리 떨어진 계국(鷄國)에 사는데, 북경까지 오는데 7개월이 걸립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물어봐도 각각이 다른 답을 하는지라 그들이 사는 땅과 습속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내반(內班)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앉은 자리가 우리 일행의 뒤에 있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역관이 또 말하기를,
“그들은 바지가 없으니, 상의 하나로 온몸을 가립니다.” 하였다.
오문 위에는 5개의 누대가 있었는데, 오봉루(五鳳樓)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통관들이 우리 일행을 인솔하여 반열을 따라 들어갔는데, 여러 왕들과 내시들은 오문의 좌우를 끼고 들어갔으며, 그 나머지 동반들은 좌액문(左掖門)을 따라서 들어가고 서반들은 우액문(右掖門)을 따라서 들어갔으니, 우리 일행도 또한 우액문을 통해 들어갔다.
다리 하나를 건넜는데, 그 북쪽 정중앙이 태화문(太和門)이다. 그 오른쪽에는 정도문(貞度門)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정도문을 통해서 내정의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정전은 옛날의 황극전(皇極殿)인데, 지금은 태화전(太和殿)이라고 부른다. 섬돌이 3단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돌로 만들었고 난간 위에는 청동 향로 4~5 쌍을 설치해 두었다. 일산과 가리개 장막 등이 그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고 의장대는 길을 끼고 도열하였으며, 내관들은 뜰아래 서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모두 모이자, 황제가 다시 가마를 타고 정전을 내려와 서쪽 행랑을 통해 들어가는데, 통관들이 말하였다.
“장차 태황태후, 황태후를 뵈러 가는 것이니 돌아와서 하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한참 지나자 동쪽 행랑으로부터 들어와서 옥좌에 좌정하고는 의장대를 물러나게 하니 곧 붉은 옷을 입고 벽제하는 기구를 잡은 4명의 사람이 황제가 거동하는 길 양쪽에 나누어 서 있다가 3번을 벽제하는 기구를 두드리고 난 후에 그치니, 의장대는 곧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때에 문무관이 자신의 자리에 나가가 북쪽을 향하여 길게 절을 하는데, 이어서 정전 위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찬미하는 의미의 소리가 들려오니, 그것이 뭇 신하들의 축하의 표문인 것 같았다.
읽기를 마치고 전려(傳臚 : 계단 아래 낭독관이 대독하도록 내려주는 행위)를 하니, 3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서 물러 나왔다. 통관들이 비로소 우리 일행 이하를 인도하여 서쪽 마당의 황제가 거동하는 길 가까이에서 순서대로 세우더니 다시 조금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는 것을 연습한대로 하였다.
우리 일행이 물러나자 다시 몽고의 별나게 생긴 종족 일행을 인도하여 절과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하도록 시켰다. 당시에 몽고의 왕자도 또한 예식에 참석하였는데, 듣자하니 앞서 만주족과 한족의 문무관이 예를 행할 때 같이 예를 올렸다고 한다.
정도문(貞度門)을 통해서 나와서 동장안문 밖에서 말을 타고 회동관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재촉해서 먹고는 곧바로 연회장으로 나아갔다. 다시 오문 밖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 태화전에 도착했는데, 태화전의 서쪽 모퉁이로부터 계단을 올라가 태화전의 바깥 계단의 서쪽에 앉았는데, 몽고의 왕자가 제일 앞에 자리하였고, 우리 일행이 다음이요,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 별종이 그 다음에 자리하였다.
계단 동쪽에는 만주족과 한족의 2품 이상의 고관이 줄지어 앉았고, 여러 왕들과 대신들은 모두 태화전 안에 들어가 앉았고, 나머지 문무백관들은 태화전 내정의 가운데에 좌정하였다. 한 종(鍾)씩 차를 내어 주었는데, 색깔이 옅은 붉은 색이고 맛은 굉장히 비릿하였다. 억지로 마셨는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한참 있다가 진찬례(進饌禮)를 행하는데, 아까의 몽고 왕자는 한 사람에 한 상씩 받았고, 우리 일행과 이상하게 생긴 별종 사신들은 삼사(三使) 당 한 상씩 내려 주었다. 편종과 편경 등의 악기를 기둥 사이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며, 장난 같은 춤을 이리 저리 보이는데, 그 모양새가 우아하지 않았다. 춤이라고는 팔을 흔드는 것이었고 북과 기(箕)로 박자를 맞추었다.
연희는 가면을 쓰고 말 인형을 타고 전투하는 것을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또 여장(女裝)을 하고 추는 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연희 중에서 배우가 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길게 소리하는 것과 자못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높은 전립(氈笠)을 쓰고 있었으니 그 모양새가 가소로웠다. 그 연희의 춤이 내전과 계단 위에서 아울러 행해졌는데, 내전 기둥의 안쪽에서 연희를 행할 즈음에는 여러 왕들과 대신들이 서로 차례로 일어나 내전 안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 끝날 때쯤 고기 한 소반과 술 한 종(鍾) 씩이 내려졌는데, 몽고 왕자와 이상하게 생긴 별종 오랑캐 사신은 모두 내전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하사받았다. 연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계단을 따라 대정으로 내려와서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한 뒤에 물러나와 회동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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