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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의장대가 황제를 둘러싸고 행차하다 - 청나라의 신년하례에 참석하다
기유년(1669) 정월 초하루(1월 1일) 을미일.
우리(
박세당
과 사신 일행)는 오경(五更 : 새벽3시~5시)에 의관을 갖추어 입고
동장안문(東長安門)
에 나아가 밖에서 말에서 내려 왼쪽을 끼고 돌아 문루에 들어갔다. 기둥과 들보
서까래
가 모두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명나라 때 이 문루에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기 때문에 석재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교를 지나 천안문(天安門)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단문(端門)
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오문(午門)
밖 큰 마당에 나아갔다. 서쪽 행각 아래에 좌정하였는데, 행각의 서쪽은
사직(社稷)
이고 동쪽 행각의 동쪽은
태묘(太廟)
이다. 조회에 참여한 자들은 좌우로
반차(班次)
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은
서반(西班)
에 나아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황옥교(黃屋轎)
를 타고 오문에서 나왔는데, 가마를 마주든 자가 앞과 뒤에 각각 8인으로 모두 붉은 비단옷에
표미(豹尾)
를 꽂았다. 의장 행렬 앞에서 인도하는 이들이 가마 앞에 5~6인 있어서 황제를 마주하는데,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었고, 여러 왕들과 존귀한 신하 및 그들을 수행하는 자들이 600~700명 이었는데, 그들의 의복과 갖옷이 오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관원들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은 말을 타고 뒤쫓아가는데, 대열을 갖추지는 못했다.
듣자하니 황제가 장차 등장군(鄧將軍)의 제당에 가서 분향한다고 하길래 “등장군은 어떤 귀신이기에 천자가
종묘
에 배알하지 않고 등장군의 묘당에 배알하는가.”하고 물었더니, 황제의 먼 조상이 되는 이라고 하였다.
해가 뜨자 황제 일행이 궁으로 돌아왔는데, 의장과 음악이 열을 나누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궁을 나설 때의 간략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노부(鹵簿 : 황제의 의장대)는 오문 밖에 도착하자 좌우로 나누어 섰는데, 그 의식이 매우 엄숙하여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는데, 말을 타고 의장대를 뒤따르던 일행은 출궁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내달려 돌아왔다. 황제가 궁을 나가고 돌아오는 동안 동반과 서반의 관원들은 그저 줄곧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일행이 앉은 자리에서 약간 가까운 곳에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누추하고 이상하였다. 쓰고 있는 모자와 입은 옷은 청나라 사람들과 비슷하였는데, 모자 꼭대기의 구연(裘緣 : 가죽을 마무리하는 모양)하는 제도가 달랐다. 그들 중 제일 윗자리에 앉은 자는 모습이 서양인과 흡사했으며, 녹취구(綠毳裘)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섬세하게 직조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들은 몽고의 특수한 종족으로 북해 가에 삽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서북쪽의 아주 먼 바닷가에 사는데, 서양과 가까운 곳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북경에서 7천 리 떨어진 계국(鷄國)에 사는데, 북경까지 오는데 7개월이 걸립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물어봐도 각각이 다른 답을 하는지라 그들이 사는 땅과 습속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내반(內班)
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앉은 자리가 우리 일행의 뒤에 있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역관이 또 말하기를,
“그들은 바지가 없으니, 상의 하나로 온몸을 가립니다.” 하였다.
오문 위에는 5개의 누대가 있었는데,
오봉루(五鳳樓)
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통관들이 우리 일행을 인솔하여 반열을 따라 들어갔는데, 여러 왕들과 내시들은 오문의 좌우를 끼고 들어갔으며, 그 나머지 동반들은 좌액문(左掖門)을 따라서 들어가고 서반들은 우액문(右掖門)을 따라서 들어갔으니, 우리 일행도 또한 우액문을 통해 들어갔다.
다리 하나를 건넜는데, 그 북쪽 정중앙이
태화문(太和門)
이다. 그 오른쪽에는
정도문(貞度門)
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정도문을 통해서 내정의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정전은 옛날의 황극전(皇極殿)인데, 지금은
태화전(太和殿)
이라고 부른다. 섬돌이 3단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돌로 만들었고 난간 위에는 청동 향로 4~5 쌍을 설치해 두었다. 일산과 가리개 장막 등이 그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고 의장대는 길을 끼고 도열하였으며, 내관들은 뜰아래 서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모두 모이자, 황제가 다시 가마를 타고 정전을 내려와 서쪽 행랑을 통해 들어가는데, 통관들이 말하였다.
“장차 태황태후, 황태후를 뵈러 가는 것이니 돌아와서 하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한참 지나자 동쪽 행랑으로부터 들어와서 옥좌에 좌정하고는 의장대를 물러나게 하니 곧 붉은 옷을 입고 벽제하는 기구를 잡은 4명의 사람이 황제가 거동하는 길 양쪽에 나누어 서 있다가 3번을 벽제하는 기구를 두드리고 난 후에 그치니, 의장대는 곧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때에 문무관이 자신의 자리에 나가가 북쪽을 향하여 길게 절을 하는데, 이어서 정전 위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찬미하는 의미의 소리가 들려오니, 그것이 뭇 신하들의 축하의 표문인 것 같았다.
읽기를 마치고 전려(傳臚 : 계단 아래 낭독관이 대독하도록 내려주는 행위)를 하니, 3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서 물러 나왔다. 통관들이 비로소 우리 일행 이하를 인도하여 서쪽 마당의 황제가 거동하는 길 가까이에서 순서대로 세우더니 다시 조금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는 것을 연습한대로 하였다.
우리 일행이 물러나자 다시 몽고의 별나게 생긴 종족 일행을 인도하여 절과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하도록 시켰다. 당시에 몽고의 왕자도 또한 예식에 참석하였는데, 듣자하니 앞서 만주족과 한족의 문무관이 예를 행할 때 같이 예를 올렸다고 한다.
정도문(貞度門)을 통해서 나와서 동장안문 밖에서 말을 타고
회동관
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재촉해서 먹고는 곧바로 연회장으로 나아갔다. 다시 오문 밖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 태화전에 도착했는데, 태화전의 서쪽 모퉁이로부터 계단을 올라가 태화전의 바깥 계단의 서쪽에 앉았는데, 몽고의 왕자가 제일 앞에 자리하였고, 우리 일행이 다음이요,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 별종이 그 다음에 자리하였다.
계단 동쪽에는 만주족과 한족의 2품 이상의 고관이 줄지어 앉았고, 여러 왕들과 대신들은 모두 태화전 안에 들어가 앉았고, 나머지 문무백관들은 태화전 내정의 가운데에 좌정하였다. 한 종(鍾)씩 차를 내어 주었는데, 색깔이 옅은 붉은 색이고 맛은 굉장히 비릿하였다. 억지로 마셨는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한참 있다가
진찬례(進饌禮)
를 행하는데, 아까의 몽고 왕자는 한 사람에 한 상씩 받았고, 우리 일행과 이상하게 생긴 별종 사신들은 삼사(三使) 당 한 상씩 내려 주었다. 편종과 편경 등의 악기를 기둥 사이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며, 장난 같은 춤을 이리 저리 보이는데, 그 모양새가 우아하지 않았다. 춤이라고는 팔을 흔드는 것이었고 북과 기(箕)로 박자를 맞추었다.
연희는 가면을 쓰고 말 인형을 타고 전투하는 것을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또 여장(女裝)을 하고 추는 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연희 중에서 배우가 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길게 소리하는 것과 자못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높은
전립(氈笠)
을 쓰고 있었으니 그 모양새가 가소로웠다. 그 연희의 춤이 내전과 계단 위에서 아울러 행해졌는데, 내전 기둥의 안쪽에서 연희를 행할 즈음에는 여러 왕들과 대신들이 서로 차례로 일어나 내전 안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 끝날 때쯤 고기 한 소반과 술 한 종(鍾) 씩이 내려졌는데, 몽고 왕자와 이상하게 생긴 별종 오랑캐 사신은 모두 내전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하사받았다. 연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계단을 따라 대정으로 내려와서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한 뒤에 물러나와 회동관으로 돌아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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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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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서계연록(西溪燕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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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세당(朴世堂)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669-01-01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박세당, 황제, 사신 일행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20호
조선왕조실록
◆ 청나라의 해외 교류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동방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청은 유럽인들의 무역을 허용했는데 오직 광저우를 통해서 무역하도록 했습니다. 무역물품은 중국의 비단 ·향료 ·모피와 서양의 귀금속 ·유리 등 값진 물건 등이 이루어 졌다. 이때 무역 형태는 공행무역으로 청나라 정부로부터 서양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상인인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할수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제한적 무역형태는 유럽인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유럽은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형태였다 청의 경우 유럽과의 무역을 조공의 한 형태로 생각했고 유럽의 제품도 전혀 필요없었기 때문에 이런 무역형태는 아편전쟁까지 지속되었다. 무역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명말청초에는 유럽으로부터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와 그리스트교의 전래와 서양의 학술이 많이 전파되었다. 그리스트교는 당대부터 이미 大秦景敎라는 이름으로 전파된 바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의 본격적인 포교활동은 15세기이후 인도항로의 개척과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구교의 세력확보를 위하여 예수교단의 선교사를 동양으로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문호를 굳게 닫고 전통적 생활양식과 질서에만 집착해온 폐쇄적 중국사회가 서양의 근대적 변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인의 중국 도래는 동서문화교류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활동을 보인 것이 카톨릭 선교사들이었다. 명말청초에 중국에 와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는 스페인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이탈리아인 마테오 릿치, 독일인 아담 샬, 그리고 벨기에인 페르비스트 등이 있다. 중국에 진출하여 포교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처음으로 성공한 자는 마테오 릿치이다. 그가 북경에 도착하여 명의 만력황제로부터 거주허가와 포교의 허락을 얻은 것은 1601년초의 일이었다. 명말에 도래한 기독교(카톨릭)의 예수회가 중국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마테오 릿치가 중국의 전통적 습속을 이해하고 존경하였다는 점이다. 예수교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단순한 의례라고 인정하고 중국의 전통습속을 존중했던 것이다. 후에 청조에 이르러 전례문제(典禮問題) 때문에 기독교 포교활동 금지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전통습속의 존중은 선교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원인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선교활동을 성공으로 이끈 요인은 그들 선교사들이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 서양근대의 자연과학지식을 학습한 것이 주효한 효과를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의하여 중국인 지식층의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청중기 가정년간에 서양에서 전래된 신식 조총과 대포의 제작기술은 동양의 전쟁전술을 뒤바꾸어 놓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그밖에 자명종(自鳴鐘) 등의 진기한 기계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의 학술도 사실은 상류사회의 지식인 들의 호기심과 오락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중국의 자연과학발전에 근본적인 영향으로는 작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특히 중국의 중화주의는 중국 이외의 문화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사대부 지식인들은 오로지 과거시험에 합격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학술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양의 선교활동에 있어서도 뒤를 이어 중국에 들어온 스페인의 프란시스코파(派)와 도미니크파(派)는 이전의 선교활동을 비판하면서 예수교파의 선교사가 중국인이 숭배하는 하늘(天)과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과는 다른 것인데 이를 동일시하는 포교방법은 틀렸다고 하였는데, 로마교황도 이를 받아들여 예수교의 포교를 금지시켜 버렸다. 이에 중국에서 신도들에게 상제와 조상숭배를 금지하게 되니 드디어 전례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대 강희제 시기에는 로마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하여 예수교 이외의 포교는 모두 금지시켜 버렸다. 옹정제 시기에는 학술과 과학기술에 종사하는 선교사만 북경에 머물게 하고 그밖의 선교사들은 출국과 포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건륭제 시기에는 아예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금지시키고 교회를 몰수하고 선교사를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아편전쟁 이후 포교의 자유를 다시 획득하기 이전까지에는 민간 속으로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마테오 릿치는 20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수학, 천문학, 역학, 지리학 등을 소개하고 천주실의(天主實義), 곤여만국전도, 기하원본 등의 저술을 통해 서양학술을 소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학문을 서양에 전달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아담 살은 풍부한 천문학과 역법의 지식으로 명말기에 숭정역서라는 정확한 양력달력을 만들었고, 다시 청의 순치시기에 신임을 얻어 흠천감의 장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한편 명말에 전래된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명조의 고관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학술과 과학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앞장을 서기도 하였다. 그 중에 유명한 인물로는 서광계와 이지조를 들 수 있다. 중국인으로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저술한 내용을 보면 서광계의 농정전서, 송응성의 천공개물 등의 과학서가 유명하다. 그리고 청조 강희제 시기에 서양인 부베가 강희황제의 명을 받아 중국의 전국토를 측량하여 황여전람도라는 중국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중국최초의 실측 지도이었다. 마지막으로 17세기까지에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중국의 문화가 서양에 많이 알려지고 동시에 중국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흠모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중국멸시론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가 프랑스의 몬테스크외이었다. 그 주요 비판이론은 중국은 2천년 동안이나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로서 전제정치가 연속된 후진사회라고 단정하였다. 이렇게 서양인들이 중국 찬미론에서 비판론으로 바뀌게 되는 이유는 18세기이래 서양의 제국주의가 아시아 각국을 침략해 오면서 아시아사회의 정체성을 강조하여 서양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원문 번역
기유년(1669) 1월 1일 오경(五更: 새벽3시~5시)에 의관을 갖추어 입고 동장안문에 나아가 밖에서 말에서 내려 왼쪽을 끼고 돌아 문루에 들어갔다. 기둥과 들보 서까래가 모두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명나라 때 이 문루에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기 때문에 석재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교를 지나 천안문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단문(端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오문(午門) 밖 대정(大庭)에 나아갔다. 서무(西廡) 아래에 좌정하였는데, 서무의 서쪽은 사직이고 동무(東廡)의 동쪽은 태묘이다. 조회에 참여한 자들은 좌우로 반차(班次)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은 서반(西班)에 나아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 황제가 황옥교(黃屋轎)를 타고 오문에서 나왔는데, 가마를 마주든 자가 앞과 뒤에 각각 8인으로 모두 붉은 비단옷에 표미(豹尾)를 꽂았다. 의장 행렬 앞에서 인도하는 이들이 가마 앞에 5~6인 있어서 황제를 마주하는데,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었고, 여러 왕들과 존귀한 신하 및 그들을 수향하는 자들이 6700명 이었는데, 그들의 의복과 갖옷이 오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관원들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은 말을 타고 뒤쫒아 가는데, 대열을 갖추지는 못했다. 듣자하니 황제가 장차 등장군(鄧將軍)의 제당에 가서 분향한다고 하길래 ‘등장군은 어떤 귀신이길래 천자가 종묘에 배알하지 않고 등장군의 묘당에 배알하는가’하고 물었더니, 황제의 먼 조상이 되는 이라고 하였다. ○ 해가 뜨자 황제 일행이 궁으로 돌아왔는데, 의장과 음악이 열을 나누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궁을 나설 때의 간략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노부(鹵簿: 황제의 의장대)는 오문 밖에 도착하자 좌우로 나누어 섰는데, 그 의식이 매우 엄숙하여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는데, 말을 타고 의장대를 뒤따르던 일행은 출궁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내달려 돌아 왔다. 황제가 궁을 나가고 돌아오는 동안 동반과 서반의 관원들은 그저 줄곧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 우리 일행이 앉은 자리에서 약간 가까운 곳에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누추하고 이상하였다. 쓰고 있는 모자와 입은 옷은 청나라 사람들과 비슷하였는데, 모자 꼭대기의 구연(裘緣: 가죽을 마무리하는 모양)하는 제도가 달랐다. 그들 중 제일 윗자리에 앉은 자는 모습이 서양인과 흡사했는데, 녹취구(綠毳裘)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섬세하게 직조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들은 몽고의 특수한 종족으로 북해 가에 삽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서북쪽의 아주 먼 바닷가에 사는데, 서양과 가까운 곳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북경에서 7천리 떨어진 계국(鷄國)에 사는데, 북경까지 오는데 7개월이 걸린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물어봐도 각각이 다른 답을 하는지라 그들이 사는 땅과 습속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내반(內班)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앉은 자리가 우리 일행의 뒤에 있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역관이 또 말하였다. “그들은 바지가 없으니, 상의 하나로 온몸을 가린다.” ○ 오문 위에는 5개의 누대가 있었는데, 오봉루(五鳳樓)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통관들이 우리 일행을 인솔하여 반열을 따라 들어갔는데, 여러 왕들과 내시들은 오문의 좌우를 끼고 들어갔으며, 그 나머지 동반들은 좌액문(左掖門)을 따라서 들어가고 서반들은 우액문(右掖門)을 따라서 들어갔으니, 우리 일행도 또한 우액문을 통해 들어갔다. 다리 하나를 건넜는데, 그 북쪽 정중앙이 태화문(太和門)이다. 그 오른쪽에는 정도문(貞度門)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정도문을 통해서 내정의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정전은 옛날의 황극전(皇極殿)인데, 지금은 태화전(太和顚)이라고 부른다. 섬돌이 3단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돌로 만들었고 난간 위에는 청동 향로 4~5 쌍을 설치해 두었다. 일산과 가리개 장막 등이 그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고 의장대는 길을 끼고 도열하였으며, 내관들은 뜰아래 서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모두 모이자, 황제가 다시 가마를 타고 정전을 내려와 서상(西廂)을 통해 들어가는데, 통관들이 말하였다. “장차 태황태후, 황태후를 뵈러 가는 것이니 돌아와서 하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한참 지나자 동상(東廂)으로부터 들어와서 옥좌에 좌정하고는 의장대를 물러나게 하니 곧 붉은 옷을 입고 벽제하는 기구를 잡은 4명의 사람이 황제가 거동하는 길 양쪽에 나누어 서 있다가 3번을 벽제하는 기구를 두드리고 난 후에 그치니, 의장대는 곧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때에 문무관이 자신의 자리에 나가가 북쪽을 향하여 길게 절을 하는데, 이어서 정전 위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찬미하는 의미의 소리가 들려오니, 그것이 뭇 신하들의 축하의 표문인 것 같았다. 읽기를 마치고 전려(傳臚:계단 아래 낭독관이 대독하도록 내려주는 행위)를 하니, 3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서 물러 나왔다. 통관들이 비로소 우리일행 이하를 인도하여 서정(西庭)의 황제가 거동하는 길 가까이에서 순서대로 세우더니 다시 조금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는 것을 연습한대로 하였다. 우리 일행이 물러나자 다시 몽고의 별나게 생긴 종족 일행을 인도하여 절과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하도록 시켰다. 당시에 몽고의 왕자도 또한 예식에 참석하였는데, 듣자하니 앞서 만주족과 한족의 문무관이 예를 행할 때 같이 예를 올렸다고 한다. ○ 정도문(貞度門)을 통해서 나와서 동장안문 밖에서 말을 타고 회동관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재촉해서 먹고는 곧바로 연회장으로 나아갔다. 다시 오문(午門) 밖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 태화전(太和顚)에 도착했는데, 태화전의 서쪽 모퉁이로부터 계단을 올라가 태화전의 바깥 계단의 서쪽에 앉았는데, 몽고의 왕자가 제일 앞에 자리하였고, 우리 일행이 다음이요,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 별종이 그 다음에 자리하였다. 계단 동쪽에는 만주족과 한족의 2품 이상의 고관이 줄지어 앉았고, 여러 왕들과 대신들은 모두 태화전 안에 들어가 앉았고, 나머지 문무백관들은 태화전 내정의 가운데에 좌정하였다. 한 종(鍾)씩 차를 내어 주었는데, 색깔이 옅은 붉을 색이고 맛은 굉장히 비릿하였다. 억지로 마셨는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한참 있다가 진찬례(進饌禮)를 행하는데, 아까의 몽고왕자는 한사람에 한 상씩 받았고, 우리 일행과 이상하게 생긴 별종 사신들은 삼사 당 한 상씩 내려 주었다. 편종과 편경 등의 악기를 기둥 사이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며, 장난 같은 춤을 이리 저리 보이는데, 그 모양새가 우아하지 않았다. 춤이라고는 팔을 흔드는 것이었고 북과 기(箕)로 박자를 맞추었다. 연희는 가면을 쓰고 말 인형을 타고 전투하는 것을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또 여장(女裝)을 하고 추는 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연희 중에서 배우가 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길게 소리하는 것과 자못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높은 전립(氈笠)을 쓰고 있었으니 그 모양새가 가소로웠다. 그 연희의 춤이 내전과 계단 위에서 아울러 행해졌는데, 내전 기둥의 안쪽에서 연희를 행할 즈음에는 여러 왕들과 대신들이 서로 차례로 일어나 내전 안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 끝날 때 쯤 고기 한 소반과 술 한 종(鍾) 씩이 내려졌는데, 몽고왕자와 이상하게 생긴 별종 오랑캐 사신은 모두 내전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하사 받았다. 연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계단을 따라 대정으로 내려와서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한 뒤에 물러나와 회동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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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1900년 천안문 정면
1900년 천안문 후면
자금성 오문(午門)
1860년 자금성 오문(...
1901년 자금성 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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