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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잡혀온 늙은 조선인을 만나다
사신단 일행은 동트기 전에 출발하였다. 만주족 1명을 만나 지명을 물었는데, 박세당을 보더니 말에서 내려 덥썩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조선말도 할 줄 아는 자였다. 그래서 박세당이 물었다.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냐?” 하니
그가
“본디
과천 상초리
에 살았는데,
선릉(宣陵)
을 지키는 군졸이 되어서 나이 16살에 병자호란을 만나 몽고군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2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2번 다 적발되어, 지금은 요동 근방에 살면서 장원의 농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아버지는 선릉의
수복(首僕)
이셨고 형도 있는데, 살아들 계신 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박세당이 “돌아가고 싶은가?” 물었다.
그가
“하룻밤도 조선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붙들려 와서 2번 결혼했는데 아내들은 모두 죽고, 아들과 딸을 5~6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홀아비가 되고 또 늙어가니 몹시 돌아가고 싶지만, 내일이면 죽을 목숨이라 지금 돌아간다 해도 고향에서 받아주질 않을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따름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박세당이 물었다.
“듣자하니 몽고군이 근래에
산해관
바깥쪽을 침범하였다던데, 알고 있는가?”
그가
“금년 봄에 몽고에서 거듭된 흉년으로 시장을 열어 식량을 수입하려 했는데, 쌀값이 너무 비싸다고 화를 내고는 드디어 소와 말을 겁탈해가고 사람들을 해치고, 곡식 60수레를 빼앗아 돌아갔습니다. 올해도 비가 오지 않으면 7월쯤에 다시금 올 것인데, 지금은 잠시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고령(高嶺)
을 넘었는데, 고개가 하도 높고 험했다. 요사이 이곳을 오간 사신들이 대개들
회녕령(會寧嶺)
이라고들 하는데 잘못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 보니 잘못된 것이다.
고개를 내려가 첨수참을 몇 리 남겨두고 멈추어서 물의 동쪽에서 밥을 먹었다. 그 물의 서쪽에는 산이 있고 중턱은 깎아지는 벼랑인데 탑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역관들은 연개소문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온다는데,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명나라 때
총병(總兵)
한씨(韓氏)의 묘가 산에 있는데, 이 탑은 그 묘를 누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첨수참을 지나서 청석령을 넘어가는데, 고개의 높이가 고령보다는 못했지만 바위들이 삐죽빼죽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서 험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비할 데가 없었다. 우리나라 한양에서 북경까지 약 3천리 되는 여정 중에 높기는 고령이 제일로 높았고 험하기는 청석령이 제일 험했다. 저녁에
낭자산(狼子山)
에서 묵었다.
이날은 총 80리를 갔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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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서계연록(西溪燕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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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세당(朴世堂)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668-11-26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박세당, 만주족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6호
조선왕조실록
◆ 병자호란 때 조선인 포로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선의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가고 여인들은 청(淸)나라 군대의 포로로 끌려갔다. 끌려갔던 양반 사대부가의 아낙과 규수들은 높은 속환가를 지불하고 돌아오고, 일부 운이 좋은 여성들은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돈 없고 권세 없는 일반 백성들의 아낙과 딸들은 대부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1,500냥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한편,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1637년 1월, 청 태종(太宗)이 조선의 인조(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
◆ 원문 번역
1668년 11월 26일 임술일(11월 26일) 동트기 전에 출발하였다. 만주족 1명을 만나 지명을 물었는데, 나를 보더니 말에서 내려 덥썩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조선말도 할 줄 아는 자였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냐?” 대답하였다. “본디 과천 상초리에 살았는데, 선릉(宣陵)을 지키는 군졸이 되어서 나이 16살에 병자호란을 만나 몽고군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2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2번 다 적발되어, 지금은 요동 근방에 살면서 장원의 농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아버지는 선릉의 수복(首僕)이셨고 형도 있는데, 살아들 계신 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물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대답하였다. “하룻밤도 조선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붙들려 와서 2번 결혼했는데 아내들은 모두 죽고, 아들과 딸을 5~6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홀아비가 되고 또 늙어가니 몹시 돌아가고 싶지만, 내일이면 죽을 목숨이라 지금 돌아간다 해도 고향에서 받아주질 않을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따름입니다.” 내가 물었다. “듣자하니 몽고군이 근래에 산해관 바깥쪽을 침범하였다던데, 알고 있는가?” 답하였다. “금년 봄에 몽고에서 거듭된 흉년으로 시장을 열어 식량을 수입하려 했는데, 쌀값이 너무 비싸다고 화를 내고는 드디어 소와 말을 겁탈해가고 사람들을 해치고, 곡식 60수레를 빼앗아 돌아갔습니다. 올해도 비가 오지 않으면 7월쯤에 다시금 올 것인데, 지금은 잠시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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