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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에 둘러앉아 파도 치는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하고, 여색에 취하다
1584년 3월 24일, 우리(배삼익, 유훈, 심원하 등)는 식사 후에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 대동강 부근의 정자)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대동강(大同江)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기백(箕伯)
유훈(柳塤)
과 도사
심원하(沈源河)
등이 배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배 안에 빙 둘러 앉아 서로 술에 취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지도 알지 못하였다.
서윤(庶尹)
윤안성(尹安性)
,
찰방(察訪)
홍세공(洪世恭)
,
판관(判官)
정응소(鄭應韶) 등도 참석하였다.
이전에 술을 경계하던 것을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었다. 나는 여색 두려워하기를 호랑이 같이 하고 술을 약같이 보는 것으로 평소 처신하였다. 게다가 지금은 멀리 떠나와 있고 바람마저 차가운 이곳에서 어떻게 몸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처음 술을 접하게 되고 다소 술에 취하게 되면 어느 누가 여색 밝히는 마음을 벗어버릴 수 있겠는가? 다만 오늘은 나라의 제사가 있는 날이므로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대동관(大同館)
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25일에는 기백(箕伯) 등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패강(浿江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浮碧樓)
를 걸어 다녔다. 밤에 배를 타고 내려오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횃불들이 성위에 빙 둘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횃불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볼거리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듯이 보였다.
26일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랐는데, 이곳은 최고의 강산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27일에는 정오에 쾌재정(快哉亭)에 올랐다. 그곳에는 어제 함께 거닐었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다만 서윤(庶尹)은 집안의 제사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28일 아침 식사 후에
풍월루(風月樓)
에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 기백(箕伯)에게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기백이 벌써 길가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수레를 타고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하여 전별연을 받았다.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부산원(斧山院)에서 쉬었다가
안정관(安定館)
에서 유숙하였다. 고을 수령 유격(柳格)과 가찰방(假察訪) 황윤검(黃允儉) 등과 술을 마셨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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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조천록(朝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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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삼익(裵三益)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584-03-24 ~ 1584-03-28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배삼익, 기백, 유훈, 심원하, 윤안성, 홍세공, 정응소, 유격, 황윤검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15호
◆ 평안감사의 사신단 접대
감사(監司)란 오늘날의 도지사를 말하는 직책이다. 조선시대에 13도(道)에 각 1명씩 두었으며, 세조 때부터는 '관찰사'로 불리었다. 여기서 '평양감사'는 '평안감사'의 잘못표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어교과서에도 '평양감사'로 잘못 표기된 부분이 있다. 많고 많은 요직 중에서 왜 하필 '평안감사'가 자주 회자되는가? 직급으로 보면 당시 감사는 종2품 벼슬이었는데 당시의 장관급인 6조의 판서가 정2품인 것에 비하면 직급은 아주 높지 않은 것이다. '평안감사'는 놀기 좋은 보직의 대명사로 쓰이는 데, 즉 일하기 편하고 놀기 좋은 곳이란 말이다. 일단 평양은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임금 신경 쓸 필요 없어 좋고 평양일대는 대동강변의 평야지대로 먹을 것이 걱정 없고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라 온갖 귀한 물건을 접할 수 있고 남남북녀란 말이 있듯이 미인 기생이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많기로도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다들 평양감사로 가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평양이 된 것이다. 우리의 고전인 ‘오유란전’이나 '이춘풍전은 다 평안감사를 소재로 쓰였다. 예전부터 평양감사와 관련돼서 전해져 오는 것으로는 평양감사놀이가 있고, 애기봉과 관련된 평양감사와 기생애기의 슬픈 사연, 그리고 고전소설인 '옥단춘전' 등이 있다. 그런데 옥단춘전에 보면 ‘평양감사는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 등 대부분 평양감사와 관련된 것은 기생이 아니면 호화로운 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평양감사로 가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평양감사라 하면 현재로 보면 평양시장 쯤으로 생각하겠으나 예전의 감사와 요즘의 시장은 질이 다르다. 그 지방 안에서는 감사가 왕처럼 지냈을 테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평양감사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는 뜻인데, 평양감사는 조선시대 벼슬 중에 인기 있는 지위였다. 평양감사가 왜 인기가 많았을까?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기생을 대표하는 평양기생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이다. 평양에 기생이 많이 몰리게 된 것은 당시 평양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것에 유흥가가 몰리듯, 조선시대의 평양에도 돈이 많이 모임으로써 기생들이 몰렸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글 소설중 이춘풍이 장사한다고 평양에 올라왔다가 기생 소향이에게 홀딱 반해 거금을 날리고 개차반 무일푼이 되 기생집 사환으로 일했던 것을 보면, 당시 평양은 금전적으로 풍족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왜 평양에 돈이 몰리게 된 것일까? 평양이 특별하게 상업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평안도에서 걷은 세금은 중앙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18세기 초반까지 중앙정부는 평안도 지역의 세금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경국대전』의 『속대전』(영조때 편찬된 법전)권2 호전 수세조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나온다. “서북의 세곡은 본도에 유보하고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서북(평안도)의 세금은 원칙적으로 평안도에서만 사용하게 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른 지방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평안도에서 걷은 세금을 평안도에서 관리하게 했으니, 평안도 관리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평양감사가 젤 큰 몫을 차지할 것이고, 밑의 관리들이 서로 나눠가졌을 테니, 기생들이 그런 관리들의 주머니를 놓였을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평양에 기생이 많았던 것이다. - 평안도의 사행단 접대비용 조선시대 때 평안도에서 세금을 관리하도록 하게 한 것은 정부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중국과 경계를 맞닿는 곳으로 항상 군수물자를 비축해둘 필요성이 있었다. 이는 고려 때 거란이나 여진과의 전쟁에서 평안도에 군사시설을 확충하고 정예 병력을 키우기 위해 상시적으로 군수물자를 비축하도록 해놓았는데, 평안도의 낮은 생산성을 고려한다면, 평안도 주민들이 내는 세금이 과중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거기에 운송문제도 그러했고, 한중 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을 평안도에서 자체부담하게도 했다는 점이다. 평안도의 관향(管餉)은 전후(戰後)청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심관(瀋館)의 수요를 충당하는 데 상당 부분 활용되었다. 수취 명분이 사라진 서량(西糧)역시 청과의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 비용을 지원하다 인조 말 혁파되었다. 동시에 양호(兩湖)에 이정된 양서(兩西)의 공물은 본 도로 환속되었는데, 평안도에서는 5∼6두를 거두어 군량으로 비축하였다. 평안도의 공물수미(貢物收米)는 타 도의 대동법(大同法)과 같은 형식을 띠었지만 낮은 수취량과 본도 비축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호란을 거치며 공물 부담은 평안도의 재정 운영 과정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평안도 재정은 대청 외교와 무역 비용 지원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우선 양국간 공식 외교 통로의 하나인 칙행(勅行)을 보면 그 빈도는 병자호란 직후 가장 높았으며 18세기 초까지는 대체로 연평균 1회를 상회하였다. 한 차례의 사행이라고 해도 조선의 중앙이나 지역 재정 운영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한 달 가량의 조선 체류 일정 가운데 평안도에서 절반 정도를 머물렀다. 이 때 평안도의 각 읍은 인마(人馬)동원과 숙소 정비, 연회나 예단 제공의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18세기 한차례의 칙수(勅需)규모는 의주를 제외하고도 5만 냥을 넘어섰다. 이러한 막대한 칙수 부담을 가능하게 한 객관적 조건은 전후(戰後)의 재정 수입 확대와 군사적 지출 요인의 감소에 있었다. 따라서 군량으로 비축된 관향(管餉)이나 군포(軍布)수입은 칙수 지원에 적극 활용되었다. 칙수는 원칙적으로 관향에서 증감(會減)되었지만 칙행이 잇달으면서 관향곡이나 군포의 사전 분급, 혹은 추가 분급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중앙이나 사행로 상에 있는 타 도의 칙수 보조에도 평안도 재정이 투입되고 있었다. 한편 18세기 초 평안도의 각 읍에서는 원활한 칙수 확보를 위해 칙수청(勅需廳)이나 대동고(大同庫)등의 민고(民庫)를 설치하고 “민(民)을 동원하는 방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원래 청사 접대와 관련된 부역이 적지 않은데다가 각 읍의 재정 부족이 심화되자 민고의 형식을 통해 그 일부를 보충하려 한 것이다. 운영 기구나 형식은 다양했지만 칙수나 혹은 연행(燕行)경비를 확보하기 위해 민간으로부터 이식(利殖)을 취하는 방식은 일찍부터 통용되었으며 갈수록 확대되었다. 칙행과는 달리 연행에서의 경비 부담은 무역 자금 지원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연행 빈도는 칙행과 마찬가지로 호란 직후 가장 높았으며 연평균 3회 내외에서 움직인 18세기 전반까지는 그 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연행에는 보통 수백의 인마와 5개월 남짓한 기간이 필요했고 방물과 예단의 양도 적지 않아 중앙이나 지방 재정에 역시 부담을 주었다. 18세기 초까지는 단련사제(團練使制)가 유지되는 가운데 심양(瀋陽)으로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운반하였고 그 수량도 많아 뒤 시기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의 인마가 압록강을 건넜다. 사행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쇄마구인(刷馬驅人)이나 마(馬)‘ 명색(名色)은 대개 평안도에서 동원하였으며 마필(馬匹)도 관(管)·운향(運餉) 등에 크게 의존하였다. 인마의 규모와는 달리 연행 일정은 갈수록 증가하였는데, 그것은 잠상(潛商)의 규제와 관련하여 의주에서의 체류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평안도에서의 연행 접대비용은 칙행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연 75∼90일 이상 연행 접대에 시달렸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연행에는 직접적인 접대 외에 중국에서의 경비는 물론 무역 비용까지 지원되었다. 그러한 경비 중 일부는 역관(譯官)들이 부담한 공용은(公用銀)에서 나왔으며, 역관들은 이를 명분으로 막대한 은화를 끌어들여 무역에 참여하였다. 이 은화는 주로 관은(官銀)대출을 통해 확보하였는데 여기에는 평안감영(平安監營)과 병영은(兵營銀), 관(管)·운향은(運餉銀)등이 포함되었다. 즉 평안도 재정이 역관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연행 경비와 무역에 투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관들의 상환 능력 감소로 관은 대출을 통한 공용은 확보가 치폐를 거듭하는 가운데 평안도의 대출량은 전체의 40% 선에 이르고 있었다. 역관 무역의 침체와 왜은 단절, 공용은 지출증가로 인한 관은의 상환 지체는 계속되었지만 연행과 무역 경비의 평안도 의존은 줄어들지 않았다. 평안도 재정은 역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중강(中江)에서의 개시(開市)와 책문(柵門), 심양(瀋陽)에서의 무역에도 개입하였다. 평안도 물화가 전체의 절반이 넘었던 중강 개시의 경우 청의 요청에 따른 의례적인 참여였지만 중강 후시(後市)나 책문, 심양에서의 무역은 재정 확보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역상(譯商)간의 대립, 재정 보용과 잠상 억제 사이의 모순, 은화 부족과 공용은 문제 등이 겹치면서 책문 무역은 치폐를 반복하였고 심양팔포(瀋陽八包)무역은 결국 혁파되었다. 대청(對淸)무역이 다양한 형식을 거쳐 변모하는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가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행 경비 확보를 위한 공용은(公用銀)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용은은 평안도의 관은(官銀)에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 했다. 의주부를 비롯해 평안감영과 병영이 여러 경로를 통해 대청 무역에 참여하여 재정 손실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깊었다. 결국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평안도 재정은 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과 관련한 외교·무역 비용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투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평안도 주민들은 과도한 세금으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사신들의 접대는 물론이요, 의주, 회령, 경원에서 열리는 중국과의 호시무역 비용을 평안도와 함경도에 전가했다. 평안도 주민들은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온갖 부대비용을 평안도에 떠넘기는 중앙정부가 못마땅했고,이러한 불만이 쌓이다가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4년 3월
24일. 맑음.
식사 후에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대동강(大同江)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기백(箕伯) 유극화(柳克和, 1429〜1481) 훈(塤)과 도사 심원하(沈源河, 1540〜?) 등이 배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배 안에 빙 둘러 앉아 서로 술에 취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지도 알지 못하였다. 서윤 윤안성(尹安性, 1542〜1615), 찰방 홍세공(洪世恭, 1541〜1598), 판관 정응소(鄭應韶) 등도 참석하였다.
이전에 술을 경계하던 것을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었다. 나는 여색 두려워하기를 호랑이 같이 하고 술을 약같이 보는 것으로 평소 처신하였다. 게다가 지금은 멀리 떠나와 있고 바람마저 차가운 이곳에서 어떻게 몸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처음 술을 접하게 되고 다소 술에 취하게 되면 어느 누가 여색 밝히는 마음을 벗어버릴 수 있겠는가? 다만 오늘은 나라의 제사가 있는 날이므로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대동관(大同館)에서 유숙하였다.
25일. 맑음.
기백(箕伯) 등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패강(浿江)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浮碧樓)를 걸어 다녔다. 밤에 배를 타고 내려오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횃불들이 성위에 빙 둘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횃불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이 떨어지는 듯 하였다.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볼거리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듯이 보였다.
26일. 맑다가 늦게 비가 내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랐는데, 이곳은 최고의 강산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27일. 흐림.
정오에 쾌재정(快哉亭)에 올랐다. 그곳에는 어제 함께 거닐었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다만 서윤(庶尹)은 집안의 제사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28일 정사. 맑음.
아침 식사 후에 풍월루(風月樓)에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 기백(箕伯)에게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기백이 벌써 길가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수레를 타고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하여 전별연을 받았다.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부산원(斧山阮)에서 쉬었다가 안정관(安定館)에서 유숙하였다. 고을 수령 유격(柳格, 1545〜1584)과 가찰방(假察訪) 황윤검(黃允儉) 등과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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