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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3) 사행접대의 관행과 민초의 고달픔

신춘호

세 번째 이야기는 개성을 지나 의주까지의 북한지역, 즉 관서지역 의주대로 노정에서 펼쳐지는 사행단의 주요활동과 사행 접대문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조 약 1,000회를 웃도는 사행이 중국으로 향하였고, 중국사신의 조선행도 수백여회를 상회합니다. 사행단의 활동은 국가외교사절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중앙의 조정은 물론 지방관아에 이르기까지 사행에 필요한 방물의 준비와 포장, 호송, 사신접대와 같은 각각의 역할을 분담하여 시행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특히 사행경로에 해당되는 지역의 각 지방관은 사행에 필요한 업무를 보좌하는 차사원(差使員 : 일을 돕기 위해 임시로 파견되는 관리)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해당 고을 관아에서는 지방의 특산품을 사행 방물로 납부하였고, 사행과정에서 필요한 쌀과 찬물을 제공하였습니다.
사행이 묵거나 쉬어가는 곳의 지방관은 사행단을 접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사행단의 문서를 사대(査對)할 때는 삼사와 지방관, 인근 고을의 수령들까지 함께 모여 사대를 하였습니다. 사대임무가 끝나면 지방관은 사신들을 위해 위로연을 베풀었고, 연도의 주요도시에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전별연이 펼쳐지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황주, 평양, 안주, 선천, 의주 등이었습니다. 사행은 공적 접대 외에도 지방관과 학연, 지연 등 교분이 있는 경우 좀 더 친밀한 접대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사행스토리’에 소개되고 있는 이해응의 <계산기정>과 여타 연행록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관서지역 의주대로 연도의 주요 공간에서 펼쳐진 유람과 접대 문화의 일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정호가 편찬한『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당시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41개의 역참이 운영되었으며, 사신들을 위한 휴식처와 숙박소로 모두 25개의 관(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북한지역, 즉 관서지역의 의주대로 주요노정과 경유지를 지도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성(開城)-청석동발소(靑石洞撥所)-대현(이하황해도)-금천(金川)-의현(衣峴)-평산(平山)-차령(車嶺)-보산역(寶山驛)-석우발소(石隅撥所)-안성발소(安城撥所)-상차령(上車嶺)-서흥(瑞興)-토교-산수원(山水院)-봉산(鳳山)-동선령(洞仙嶺)-황주(黃州)-구현(驅峴)-중화(中和,이하평안도)-대동강(大同江)-평양(平壤)-순안(順安)-냉정발소(冷井撥所)-숙천(肅川)-운암발소(雲岩撥所)-안주(安州)-광통원(廣通院)-대정강-가산(嘉山)-효성령(曉星嶺)-정주(定州)-당아령(當莪嶺)-곽산(郭山)-선천(宣川)-철산(鐵山)-서림산성(西林山城)-용천(龍川)-관진강-전문령(箭門嶺)-의주(義州)

관서지역 의주대로 (중국여도, 중화민국, 1920년대) 관서지역 의주대로 (중국여도, 중화민국, 1920년대)

사행의 접대, 지방관아에서 책임지다.

사행이 출발하는 한양에서부터 의주에 도착하기까지 제반 숙식문제는 대부분 연도(沿道)의 지방관아 객사(客舍)에서 해결하였습니다. 사행이 묵는 객관과 쉼터가 정해져 있지만 대부분 관아의 부속건물이거나 국영숙박시설이었습니다. 조선사신이나 중국칙사에 대한 공궤(供饋: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해당 관아에서는 규정보다 과한 접대를 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국칙사를 접대하는 원접사와 접반사가 중앙에서 파견된 이들이고 보니 지방관아에서 신경 쓰지 않을 도리가 없고,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의 경우 역시 종실이거나 중앙의 주요관리들이었기로, 이들을 홀대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학연, 지연, 인척관계로 엮인 양반사회의 특성상 연도의 지방관뿐만 아니라 인근 고을의 수령까지 삼사를 인사차 객관을 방문하는 일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정해진 관사는 물론 지역의 특별한 명소에서 접대를 받거나 편의를 제공받기도 하였습니다. 연행록마다 이러한 인견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858년 사행의 서장관으로 참여한 김직연(金直淵,1811~1884)의 경우를 잠깐 소개합니다.

“ 밤에 백천 수령(이승겸)이 와서 보았다. 40년간 사귄 친구로 어린시절에는 형제처럼 지낸 사이인데, 이에 추위를 무릅쓰고 백리 밖에서 달려온 것이다. 여관 등불아래 마주앉아 회포를 풀고 이별하려니 한편으로 위안이 되면서 한편으론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 (중략) “50리를 가서 저녁에 서흥(瑞興)에 이르니 본읍 수령(민치서)이 마중 나와서 저녁밥을 대접했다. 밤에 수안 군수(정류)가 와서 보았는데, 예전부터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전별하느라 멀리 백리 길을 달려온 것이다. 객관에서 회포를 나누었으니, 그 기쁨은 알 만 했다“ <김직연, 연사일록(燕槎日錄), 1858년 10월29일~11월1일>

개성을 지나는 의주대로(사행노정) 개성을 지나는 의주대로(사행노정)

사행이 의주까지 도착하는데 약 보름에서 한 달가량의 일정이 소요되다보니 일정에 쫒기는 상태가 아니라 다소 여유로운 느낌으로 관서지역을 여행하게 됩니다. 한양을 출발해서부터 이동경로마다 친인척, 지인들의 배웅과 이별, 동행이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중국지역에서 느끼는 고달픔이나 향수가 아닌 여행자의 감흥으로 여정을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서지역 전체 여정의 여행에 대한 감흥을 모두 소개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1803년 사행으로 개성을 지나던 이해응의 계산기정(薊山記程)의 여행 감흥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1803년 10월 24일, 여행 일정이 매우 바빠서 나(이해응)와 일행은 선죽교(善竹橋)와 숭양서원(崧陽書院)은 모두 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1803년 10월 23일, 송경 땅에 들어서니 볼만한 곳이 많다. 취적(吹笛)과 탁타(槖駞) 또한 이름난 다리다. 길가에 1주의 석등(石燈)과 7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의 고적들이다. 성의 남쪽 문으로 해서 들어가면 시가지가 번화하고 아름다워 서울을 방불케 한다. 저녁에 경박(景博) 이광문(李光文)과 함께 만월대에 올라가 한바탕 마셨다. 만월대는 송악(松嶽,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옛이름)의 아래에 있는데 주춧돌이 무너지고 터가 헐렸는지라 개연히 천고 흥망의 감회를 갖게 하였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년.>

  • 개성 선죽교

    개성 선죽교
  • 개성 성균관

    개성 성균관
  • 개성 숭양서원과 개성유수선정비군

    개성 숭양서원과 개성유수선정비군
  • 개성 만월대(스토리테마파크 참고)

    개성 만월대(스토리테마파크 참고)

몇 년 전 개성관광을 통해 북한과의 민간교류가 진행되었을 때 필자는 관광대열에 합류하여 개성의 주요 역사유적과 명소를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관광지로 개발하여 공개하는 곳입니다. 한정적이긴 하지만 과거 사행들도 반드시 들렀던 숭양서원, 선죽교, 박연폭포, 성균관을 직접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매우 컸습니다. 과거 사행들도 개성에 이르면, 고려조의 수도였음을 상기하듯, 송악산과 만월대, 정몽주의 흔적을 대하면서 망국의 아픔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남북교류가 지속되지 못하고 답보상태입니다만, 북녘의 역사문화유적들을 마주 대할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 개성 박연폭포

    개성 박연폭포
  • 숭양서원 유적 북측안내원

    숭양서원 유적 북측안내원

개성에서는 2011년 조선중앙TV를 통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인 황진이의 묘와 열하일기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의 묘소를 말끔히 단장하여 개방했다는 보도를 낸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송도삼절은 개성의 옛 지명인 송도의 3대 명물로 황진이,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를 말합니다. 조선중앙TV는 황진이의 무덤이 개성시 선정리에 있으며, 박지원의 묘는 개성시 전재리 황토고개 옆에 단장되어있다고 전하였습니다. 연암이 한때 은거했던 연암골이 개성 동북쪽 가까이에 있으니 이 역시 향후 개성지역에서 확인해야 할 명소라고 생각합니다.
사행의 명소유람은 개성을 지나 서흥의 총수참과 평양 대동강과 강변의 누대, 안주 청천강변의 명승과 의주 압록강으로 이어지는데요, 많은 연행록과 연행가사에서 관서지방의 명승을 유람한 내용이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여행가사중에 기록이 풍부한 홍순학의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1866)나 유인목의 <북행가(北行歌)>(1866)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관서지역 의주대로의 주요도시로 개성, 황주, 평양, 안주, 정주, 선천, 의주가 꼽히는데, 이들 도시에서는 명승유람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사행에 대한 접대와 향연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주요 도시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라는 특성과 오랜 역사성과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행출발 후 의주에 도착하기까지 약 3~4회의 사대(査對)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황주, 평양, 안주, 의주에서 주로 이루어집니다. 사대는 의정부대신과 삼사, 유관조정관리들이 모여 행하던 한양에서의 경우와 달리, 연도의 고을에서는 삼사와 본 읍의 수령, 그리고 인근 고을의 수령과 역참의 우두머리인 찰방(察訪)까지 참여하여 외교문서를 점검하였습니다. 사신들의 사행목적이자 가장 중요한 업무가 외교문서의 전달과 답신을 받아오는 일이기에 의주압록강 도강 전까지 수시로 점검하고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1803년 10월 25일 흐림. 낮에 눈이 뿌렸다. 나(이해응)와 일행은 평산(平山) 30리를 가서 동양관(東陽館)에 묵었다. 금릉관(金陵館) 남쪽에는 깎아지른 석벽이 개울가에 치솟아 있다. 이것은 박연(朴淵)폭포의 하류이다. (중략)
정사(正使) 상서(尙書) 민태혁(閔台爀)이 평산 땅에서 성묘하기 때문에 일행이 평산의 객관[平山客館]에 와서 머물게 된 것이다. 숙청각(肅淸閣)에 들었다. 서로(西路)의 기생이 이 고을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년.>

  • 평양 연광정(上)과 을밀대(下)

    평양 연광정(上)과 을밀대(下)
  • 평양 부벽루(1900년대초)

    평양 부벽루(1900년대초)

기녀가 처음 나오는 고장이 평산이라고는 하나, 본격적인 관변공연이 펼쳐지는 지역은 황주(黃州)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행접대의 백미가 펼쳐지는 곳은 뭐니뭐니 해도 평양(平壤)이 아닐까 합니다. 평양은 고조선의 도읍지이자 관서지역 제일의 도시로 평안도 관찰사가 집무하는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요, 대동강, 을밀대, 연광정 등 명소가 즐비 곳이니 말입니다. 물산이 풍부한 도시답게 사행접대의 규모나 수준이 여타의 도시와 비할 바 아닙니다.
평양에서도 외교문서에 대한 사대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삼사와 지방관이 함께 모여 사대를 마치고 나면, 지방관은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게 마렵입니다. 이때 최고의 명성을 지닌 평양기생들이 함께하게 되며, 연회는 대부분 연광정에서의 기악공연이나 대동강 뱃놀이 유람을 통한 연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았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662년 8월 4일, 나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사신(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나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후략) <정태화,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 1662년>

동강 연회장면 대동강 연회장면 <전 김홍도, <월야선유도>≪평양감사연향도≫,국립중앙박물관>

사행을 맞는 평안감사의 환대는 극진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권세와 지체가 높은 삼사(三使)라면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위 글은 지방관으로서 중앙 권력의 환심을 사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환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상중인 처지와 자중하려는 정태화의 몸가짐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행접대는 자못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던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평양의 사행접대는 관서 사행노정에서 가장 화려했던 연회로 유명한데요, 평양에서의 사흘 동안 여색과 풍류, 음식을 밤낮가리지 않고 마음껏 즐겼던 사행이지만, 연일 지속되는 향응이 오히려 고역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평양에서 사흘을 묵는 동안 성색(聲色)과 음식을 밤낮 계속하다 보니 도리어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년.>

한양이북의 관서지역을 유람하는 일은 사대부 남성들의 바램이었습니다. 관동팔경을 비롯한 금강산기행도 그렇지만 개성-평양-의주로 향하는 관서팔경 역시 좋은 유람처였습니다. 관서지역 유람에서 빠질 수 없는 자연경관이나 역사문화유적 등 명승이 많겠지만, ‘평양기생’으로 대표되는 풍류유람은 관광욕구를 자극하는 주요한 요소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녀들은 관아에 소속된 관비로서, 비록 신분이 비천하긴 하나 이들은 빼어난 미모로 춤과 노래를 익혔고,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여 시인묵객이나 사대부들의 수작대상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평양은 역사도시이자 재주 넘치고 아름다운 명기(名技)가 넘치는 문화예술의 고장이다 보니 남성 사대부들은 고도(古都)의 명승지를 유람한다는 명분으로 평양으로 향하게 되고, 그 마음속은 은근히 재기 넘치고 아리따운 ‘평양기생’과의 만남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행의 경우 공적인 연회의 참석과 기생들의 가무공연 외에도 방기(房技)로 하여금 사신들의 수청을 들게 하는 ‘별부(別付)’제도가 있어, 서로(西路)에서는 곡산에서부터 시작되어 의주에 까지 이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지방의 명기들과 인연을 맺을 기회는 늘 존재했습니다. 대부분의 연행록이 이러한 사정까지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김경선은 연행기록인 <연원직지.>에서 “기생들이 하룻밤에도 서너명을 상대하여 ‘미친 듯이 분주하게’ 설친다.”라며 당시 일행들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연도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접대문화는 사회적 병폐로 인식하는 경향도 많았습니다. 담헌 홍대용은 중국학자들과의 필담에서 이를 ‘조선의 폐해중의 하나’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홍대용은 사행 떠나기에 앞서 그의 부친으로부터 7편의 편지를 받은바 있는데, 그중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방탕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경계하여 평생에 걸쳐 이겨낸 공부의 결과가 이번 사행에서 흠으로 남지 않도록 자중하라는 당부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행접대에서 기녀의 수청을 거절한 사례는 노가재 김창업의 <가재연행일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사는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는데요, ‘기악은 나그네의 몸으로 하나의 큰 성사였다.“ 라고 했지만 ”기생들은 모두 이야기하다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는 것은 관행을 거스르는 일로 치부되어 오히려 비웃음을 받던 시대였으니, 김창업의 ‘절제‘가 돋보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연행록에는 연도의 기생들과 수작하고 정분을 나누는 사연들도 많이 보이는데요, 사행과의 인연을 중하게 여겨 수절을 한 기생의 경우, 환로에 한양으로 따라가게 된다거나, 중국사행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시점에 다시 해후하는 사연들이 연행록(燕行錄)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기녀(妓女)들은 지방 풍류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방공연은 주로 지역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누대(樓臺)나 관아의 건축 공간(숙박처)이 활용되었습니다. 강(江)과 하천이 유명한 지역에서는 선상(船上)공간, 영송(迎送)의 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에서 공연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행노정에서 대표적인 곳으로는 평양의 대동강과 연광정, 부벽루,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안주의 청천강과 백상루, 항장무(項莊舞)로 유명한 선천의 의검정, 의주의 통군정과 검무(劍舞), 배따라기 노랫소리 구슬픈 구련정 나루를 들 수 있습니다.

항장무 공연단(사진엽서,1900년대초) 항장무 공연단(사진엽서,1900년대초)

평양 대동강 선유놀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꽃으로도 표현되는데, 선상공연에 사용된 배의 종류가 15가지나 된다고 하니 선상공연문화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양에서의 사행단 접대는 유숙하는 며칠간 거의 매일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1584년 3월 24일, 우리(배삼익, 유훈, 심원하 등)는 식사 후에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 대동강 부근의 정자)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대동강(大同江)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기백(箕伯) 유훈(柳塤)과 도사 심원하(沈源河)등이 배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배 안에 빙 둘러 앉아 서로 술에 취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지도 알지 못하였다. (중략) 다음날 25일에는 기백(箕伯) 등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패강(浿江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浮碧樓)를 걸어 다녔다. 밤에 배를 타고 내려오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횃불들이 성위에 빙 둘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횃불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볼거리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듯이 보였다. 26일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랐는데, 이곳은 최고의 강산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27일에는 정오에 쾌재정(快哉亭)에 올랐다. 그곳에는 어제 함께 거닐었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28일 아침 식사 후에 풍월루(風月樓)에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 기백(箕伯)에게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기백이 벌써 길가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수레를 타고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하여 전별연을 받았다. <배삼익, 조천록(朝天錄), 1584년 03월 24~28일>

사행단 접대 비용, 백성들의 고초로 이어져

매일매일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요, 선경(仙境)이 따로 없을 만큼의 연향이라면 풍류남아로서 누군들 마다하겠습니까마는, 사행접대에 소요되는 비용의 문제며 이를 조달하는 체계나 제도를 생각하면 그건 관행(慣行)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극심한 폐혜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사행접대는 국내사행은 물론, 중국사신들의 접대까지 치러야하는 상시적인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행접대는 폐지할 수 없는 국가의전의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보니 지방재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는 중국과 경계를 맞닿는 지형적 위치 때문에 늘 물자를 비축해 둬야하는 도시였습니다. 고려 이후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군사시설의 확충과 군비비축은 평안도의 상시적인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물자가 나오는 양은 정해져 있으니, 그 부족분을 보충하기위한 방법은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군수물자의 확충은 전시를 감안하여 추진되는 일이겠지만, 일반적으로 평안도의 물자 지출은 이 지역을 오가는 ‘사행접대’에 충당되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조선사신과 중국사신의 영송은 국가외교활동의 일환이다 보니 이들이 경유하는 평안도의 재정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병자호란이후 소현세자의 심양볼모 생활 중 세자관의 운영과 전쟁물자 충당은 평안도에서 많은 부담을 져야 했고, 대청외교와 무역비용을 지원해야하는 요구에도 부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평안도의 관내 각 고을에서는 사행에 필요한 인마(人馬)동원, 양국 사행 연회접대, 각종 예물제공, 방물 진상 등의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병란이후, 청의 사절이 조선을 오간 횟수가 급격하게 늘었고, 조선에 체류 했다가 귀국하는 과정에서 공출 해 가는 은이나 물자는 조선정부나 지방관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이었기 때문에 사행접대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였습니다. 18세기에 이르면 중국사신들에게 제공되는 물량 규모가 의주를 제외하고도 5만 냥을 넘어섰다고 하니 막대한 재정 부담을 졌던 평안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칙사들이 수탈에 가까운 예물을 챙겨 국가의 골칫거리로 인식되었지만, 반대의 사례도 있었습니다. 1844년(헌종9) 효현왕후 김씨의 상을 조문하러 조선을 방문한 유제사(諭祭使) 백준(柏葰)의 경우는 독특했습니다. 청 조정의 戶部右侍郞인 백준이 정사로 참여하여 조선의 원접사를 비롯한 관원들과 많은 시문창화(詩文唱和)를 하였는데, 그의 시문이 <봉사조선역정일기奉使朝鮮驛程日記>에 담겨 있습니다. 백준은 조선에 머물 때 사신에게 제공되던 예단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고, 사신단에게 베푸는 공억(供億:사신에게 제공되던 각 지방의 갖가지 물품)마저도 간소하게 요구하여 조선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백준의 검약한 모습은 조청 양국에서 미담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허봉은 <조천록>에서 “국가는 평안도에 호송재지군(護送載持軍) 1,119명을 두어 오로지 사신의 행차를 맞이하고 보내게 한다. 일 년 중에 만약 사행이 번다하면 하루도 휴식할 수가 없었으니 그 고생은 변경을 지키는 것보다 심하다.” 라고 했고, 허봉과 함께 사행한 조헌은 <동환봉사>에서 “황해충청강원양남지방의 역에는 크고 작은 사신의 행렬과 왜야인 등의 왕래로 인해 열 집에 아홉은 비었다.”라며 사행이 끼치는 민폐를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사행한 명대의 사정은 조선후기에 와서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청사신의 왕래와는 달리 조선사신의 연행에서 경비부담은 주로 사행무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5~5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중국 연행 길에 제공되는 방물과 예단이 만만치 않았고, 이를 운반하는데 필요한 사람과 우마를 공출하는 것 역시 평안도 관내의 몫이었습니다. 사행에 참여한 마두, 상인 등이 수백 인이고, 수백 필에 이르는 말이 운반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평안도 관내에서 충당합니다. 여기에 사행무역에 필요한 공용은(公用銀)과 무역품까지 확보해야 했으니 한정된 물산이 나오는 지역에서 대안이란 세수 확충뿐이었습니다. 세수의 원천은 민간의 백성이니 그만큼 백성의 고초가 컸음은 자명합니다.
사행 접대문화는 매년 반복되는 구조로 이를 지탱하기 위해 소요되는 막대한 물적 비용은 지방관아의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고초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여기에 중국사신의 ‘노골적이고도 과도한’ 수탈에 가까운 접대까지 도맡아야했던 사정을 감안한다면 사행접대 관행으로 인한 평안도 일대의 재정적 손실과 폐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 외교사절의 관리에 관한 명목을 가졌다고는 하나 쉼 없는 접대와 지속적인 지역특산의 공출로 인한 지방재정의 고갈,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중앙조정과 관리,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사행접대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명목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던 삼정의 문란은 평안도 정주, 안주일대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같은 민중의 봉기로 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정책은 민심의 버림을 받게 마련입니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진리임을 상기하게 됩니다.

평안도에서 사행이 명승유람과 연향접대가 과도하게 이루어지던 관습이 결국 지방재정 문제로 연계되고 이는 곧 백성들의 고초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하다보니 말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사행의 여정을 좀 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평양 대동강에서의 사행접대이후 노정은 숙천-안주-정주-선천-의주로 이어집니다. 이 여정에서 안주는 평양 못지않은 명승과 연희가 펼쳐지던 곳이었습니다. 안주는 평양가 비견되던 곳입니다. 관찰사(=감사)가 있던 평양은 감영(監營)이 있었지만, 안주는 병영(兵營)이 있던 군사도시입니다. 대동강과 청천강, 연광정과 백상루가 비견되고 있고, 성시의 번성함이 기성, 즉 평양에 못지않다고 할 정도로 비교의 대상이 되던 고장입니다. 안주에서는 백상루가 대표적인 연희공간입입니다. 백상루 아래로 청천강이 횡(橫)으로 흐르고 강변에 칠불도(七佛島)가 있으며, 멀리 영변의 약산이 바라다 보이는 안주는 천하의 절경이었다고 합니다.

안주읍성(해동지도) 안주읍성(해동지도)

해동지도에서 본 안주읍성의 모습입니다. 평양성을 나선 사행이 숙천을 지나 안주로 입성하는 남문의 경우 옹성구조로 되어 있고, 북측은 백상루 뒤로 청천강을 해자로 삼아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어 군사도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천강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611년)역사를 상기하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청천’의 옛 이름이 ‘살수’라고 합니다. 칠불도는 수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는 승려를 보고 따라 건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섬입니다. 칠불도에는 수나라 병사들을 유인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스님을 기려 칠불사(七佛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 1910년대 안주 백상루

    1910년대 안주 백상루
  • 1970년대 안주 백상루

    1970년대 안주 백상루

고구려시기 축성된 안주성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인 백상루가 있습니다. 백과사전에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안주읍성 서북쪽에 있는 장대(將臺)로, 관서팔경의 하나이다.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백상루라는 이름은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웅장한 규모에 위압이라도 당할 법합니다. 현재의 백상루는 1970년대 누각을 복원하면서 본래의 위치보다 약400m가량 옮긴 위치라고 합니다. 안주의 기생들이 추는 ‘항장무’가 유명했다고 하는데, 사진 속에서 연회가 한창인 모습이 어른거리는듯합니다.

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은 의주와 가깝고, 이들 도시는 사행의 하예(下隸:부리는 아랫사람)로 업을 삼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지역의 특산품은 사행 예단이나 방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선천과 곽산 사이의 평야지대는 곡식이 많이 나고 기름져 청에 보내는 공물(供物)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해응의 <계산기정(薊山記程)>(1803년 11월 09일조)에 보면, “곽산(郭山)서부터는 산이 낮고 나무가 없으며 돌덩어리들 흩어져 있는 것이 사람 얼굴의 사마귀 같다. 선천(宣川)과 곽산 사이에는 땅이 비옥하고 곡식이 기름져 연경(燕京)에의 공물로 바치던 쌀은 반드시 이곳에서 취한다.”(후략)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곽산 선사포(조천도, 홍익한)

    곽산 선사포(조천도, 홍익한)
  • 증산 석다산(조천기부도, 정두원)

    증산 석다산(조천기부도, 정두원)

정주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한지라 연행가사에는 홍경래의 난과 관련된 기사가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곽산 선사포는 명청교체기 요동지역 육로사행이 막혔을때 등주로 향하는 해로사행의 출발지였습니다. 선사포외에도 해로사행의 출발지는 평양인근의 증산 석다산이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사행이 그렸던 조천도(朝天圖) 지도를 통해 사행이 배에 오르던 장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의주로 향하는 길목은 대부분 관방의 요충였으며, 선천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곽산과 선천사이는 땅이 비옥해서 좋은 쌀이 나는 고장이어서 사행길에 가져가는 쌀은 모두 이 고장에서 공출했던 모양입니다. 선천의 의검정(倚劍亭)도 사행접대가 이루어진 공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색향고을로 소문난 곳입니다. 이곳에서도 안주-정주와 마찬가지로 ‘항장무’가 주요 공연목록이었고, 검무, 배따라기 등이 공연되었습니다. ‘배따라기’는 사행의 의주 압록강 도강시에 자주 부르는 노래지만, 곽산, 선천 역시 해로사행의 출발지가 소재한 지역이다 보니 자주 공연 레퍼토리로 불려 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주 통군정 편액과 누각 전경 의주 통군정 편액과 누각 전경 의주 통군정 편액과 누각 전경

“크게 기악을 마련하다. 그 중 최고로 볼 만한 것은 항장무이다. 기녀들의 어여쁨이 평양에 못지않다. 누대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양, 색채의 즐비함이 안주와 백중지간이다“ <이항억, 연행일기(燕行日記), 1862년>

쌍검대무 신윤복의 <쌍검대무>(간송미술관 소장)

의주 통군정에서도 사행을 위한 전별연회나 중국사신의 입경시 각종 기악과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의주의 기녀들이 융복을 입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같은 마상재(馬上才는)는 국경도시의 면모를 드러내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관서지방의 사행접대 기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검무는 특히 선천 의검정(依劍亭)의 검무와 더불어 의주 통군정의 검무도 볼만했다고 전하는데요, 두 기녀가 군복에 전립을 쓰고 칼 두 자루를 들고 추는 춤입니다. 평양에서 의주로 향하는 지방의 공연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나 의주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적 특색이 강해서였는지 연행록마다 검무를 추는 기녀의 모습이 매우 호기롭고 기상이 드러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검무를 시연하는 장면이 등장하였는데, 검무의 동작이 매우 날렵하고 기상이 넘쳐 매우 흥미로웠던 춤사위로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국내 사행노정의 종착지, 의주(義州)에 서다

사행의 국내여정인 의주대로의 종착지는 의주(義州)입니다. 의주는 중국과 마주하는 국경의 관문(關門)이기도 합니다. 사신들은 의주에 며칠간 머물면서 중국 땅으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사대와 방물점검, 사이사이의 전별연회 참석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의주에서는 관서팔경의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에서 조망하는 북녘의 정취가 압권이었을 겁니다.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 물줄기와 끝없이 펼쳐진 만주의 벌판이 눈에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사행은 장부가 더 넓은 세상을 견문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호기’였던 것만은 분명합니다만, 오랑캐로 인식하던 청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사행 길 떠나는 이들의 심사는 매우 복잡했을 것입니다. 압록강 도강에 앞서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저 통군정 정자에서 서 있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의주 압록강 의주 압록강(좌측 강변의 석벽 위에 통군정의 지붕이 보인다.)

한양을 출발하여 약 보름간의 국내여정을 마치면, 사행은 의주에서 도강 날짜를 정한 후에 한양 조정에 도강장계(渡江狀啓)를 조정으로 보냅니다. 사행은 조선선비들에게나 사신들에게 일생의 호기로 찾아온 해외 견문의 기회입니다. 사신들은 국내여정에서의 화려한 접대를 뒤로하고 압록강 뱃전에 오르게 됩니다. 의주기생들의 구슬픈 ‘배따라기’ 연창이 들리지 않을 때쯤이면, 시야에서 이미 통군정은 멀어지고, 이내 중국 땅에 들어섰을 테니, 이제 타국에서의 첫 밤을 보내야 합니다. 숙소는 구련성 인근의 들판에 임시막사를 세웠으니, 밤새 모닥불을 피우고 호랑이를 좆는 함성소리와 한기(寒氣)에 잠을 설칠지도 모를 입입니다. 옛사람들의 중국여행길, 사행노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작가소개

신춘호 작가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등이 있다.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13 ~ 1617-03-25
1617년 3월 13일, 김응희가 문단(文壇)으로 가서 그 편에 충의위 이절과 좌수 황열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김택룡에게 답장이 왔다.
김응희의 전세[田稅, 논밭의 세금 즉 토지세]를 결정할 때 경작한 수량을 지나치게 많게 하였는데, 이것은 서원[書員, 세금담당 아전] 김국(金國)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황열과 김개일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5일 뒤 3월 18일,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금담당 아전 김국이 시경[時耕, 진전이 아니라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수량을 지나치게 많이 책정한 것에 대해 그 사정을 물어봐달라고 했다.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
까지 이어지다”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지다 박종 <백두산유록>, 1764-05-16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자,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져 마치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닮았다. 포사곡(褒斜谷)을 따라 나오며 물었더니, 모두 무산의 백성들이었다. 풀밭에서 자고 모래 밥을 지어 먹으며 밤낮으로 걸었기 때문에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부러진 수레바퀴의 축을 고치면서 박종에게 말하기를, "자식 하나는 병으로 죽고, 사위 하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데, 관아의 위엄으로 성화같이 독촉하여 늙은이가 떠날 수밖에 없다. 몇 고랑의 밭을 일구었는데, 아직 한 번도 김을 매지 못했다. 지금 살아서 돌아간들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영해부사 류작이 능력을 인정받아 더 힘든 자리로 승진하여 가다”

영해부사 류작이 능력을 인정받아 더 힘든 자리로 승진하여 가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2-22
목민관으로서 힘써 일한 결과 류작(柳綽)은 정3품에 해당하는 길주목사(吉州牧師)로 제수된다. 지금까지 영해부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기근이 심한 북녘 고을에 승진 임명함으로써 진휼하는 정치를 하게 위함이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살기 어려운 곳이니, 목민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올바른 정치의 길은 어렵고도 힘든 것이다. 조재호 경상감사는 류작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재임을 청하는 장계를 간곡히 올린다.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김령 <계암일록>, 1616-07-13
1616년 7월, 안동부사(安東府使) 박동선(朴東善)이 판관 임희지(任羲之)의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관고(官庫)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박동선은 장자의 기량이 있긴 했지만, 한스럽게도 재주도 없고, 염치도 모자랐다.
반면 예안현 수령 이계지(李繼祉)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성정이 곧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였다. 관내의 창고에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아돌았다. 옛날에는 관아에서 사용하는 벌꿀이 매번 부족해서, 다음해의 공납을 미리 거두었으며, 소금과 장은 중들에게서 지나치게 취하였고, 관아의 창고에 곡식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면 또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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