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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기녀가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다 -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벌인 잔치
사신단 일행은 일찍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에 도착하여 차를 마신 뒤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렀다. 감사
김인손(金麟孫)
이 정자선(亭子船)을 내어 맞이하고 풍악을 울리며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또 배 2척에 기생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악기를 실어서 가운데 배의 음악이 그치면 다른 두 배에서 음악이 연주되어 번갈아가며 음악을 울렸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례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부벽루(浮碧樓)
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윤(庶尹)
과
판윤(判尹)
도 술을 돌렸다. 밤이 다 가도록 술을 마시고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감사ㆍ주청사ㆍ동지사 등 모두 가마를 탔다. 기녀가 말을 타고서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악공들은 걸어가며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이다.
길에서 다시 술잔을 돌렸다.
대동관(大同館)
에서 잤다.
부사(副使)
가 황주의 기녀를 싣고 왔다.
10일 맑음.
아침에 걸어서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 명나라 사신의 시를 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또 배를 탔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저녁에 거피문(車避門)에 도착하였다. 영귀루(詠歸樓)에 올라가서 또 술자리를 베풀어 초저녁에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왔다. 풍악을 울리며 길을 인도하기를 어제처럼 하였다.
재상 어사(災傷御使)
이조 정랑
임호신(任虎臣)
이 중화에서 와서 함께 배를 타고 동행하였다.
11일, 맑음.
감사는 제삿날
재계(齋戒)
하느라 나오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연광정(練光亭)
에서 재상 어사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작별하였는데, 찰방 및 서윤 김정신(金鼎臣)과 판관 황승헌(黃承憲)이 동참하였다. 대교(待敎)
이홍남(李洪男)
이 와서 들렀으나 상(喪) 중이기 때문에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자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술을 마신 뒤
대동문(大同門)
풍월루(風月樓)
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2일, 맑음.
오후에 감사가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동지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술자리를 나갔다.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13일 맑음.
아침을 먹고 나자 감사가 나와서 대청에 술을 내와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고, 배웅하러 대동문(大同門) 안까지 뒤따라 나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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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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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조천록(朝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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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벌(權橃)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539-08-09 ~ 1539-08-13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권벌, 김인손, 임호신, 김정신, 황승헌, 이홍남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54호
웹진 담談 14호
웹진 담談 15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지방관의 사신단 접대
연행 사신이 한양에서 출발하여 의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숙식은 길가에 있던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서 해결하였다. 한양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정사, 부사, 서장관(삼사) 이하 역관에 이르기까지 사행단의 상층부 중심인물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숙식에 따르는 문제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국가의 공적 임무를 띠고 사는 사신이므로 각 관청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예전(禮典)」의 빈객조(賓客條)에 중국의 칙사나 우리의 사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공궤(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관(官)이나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요란하게 접대하였던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삼사는 고위 관료 혹은 종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행 여정의 중도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들이 홀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또 학연이나 인척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정해진 객관이나 기타 특별한 장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연도의 수령은 물론, 근처의 다른 수령까지 와서 문안을 하고 여러 가지편의를 제공하였다. 의주까지의 도착은 대체로 한 달이 소요되었으므로 일정도 그렇게 촉박하지 않아서 연행 사신으로서 고달픔을 느끼기보다는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홍제원(弘濟院)에서 공식적 송별연을 가진 이후에 본격적인 사행이 시작되지만, 한양과 의주 사이에 있던 객관은 객관끼리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 피로나 긴장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행기록 중에서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 이 부분은 여행하는 사람의 가벼운 심경이 느껴질 정도로 그 호흡이 가볍다. 잘 차린 음식, 기생 및 장교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의주부윤의 송별연을 뒤로 하고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행의 길이 시작된다. 이들에 대한 수령들의 접대에는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사신단 호위무관 박생의 기록은 이 같은 실정을 잘 반영한다. 중국 사행 후 귀국 여정에서 평안도관찰사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 박생은 지독히 여색을 밝혀 일행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 의주까지 갈 때에는 각 고을에서 적절한 대접을 받았지만 중국 땅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식자재를 받아서 취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식재료들이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부실하기 짝이 없어 우리의 식품들을 가지고 가야 했고,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의 관문인 책문(柵門)까지 120여 리 땅은 두 나라의 접경지역으로 민가도, 아무 시설도 없어서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통이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에게 오는 사신 접대는 “칙사(勅使)대접하듯”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융숭한 대접을 했건만 그 쪽에서는 지방관들이 마지못해 중앙의 지시에 따르는 체 하지만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사행단(使行團)의 숙소가 겨울에도 난방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찢어진 창호도 바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우리 선발대가 미리 가서 문도 바르고 청소도 해야 했다고 하니 그 굴욕을 어찌 다 견디었을까? 연경에 도착하면 호부(戶部)에서 식량을 제공하고 공부(工部)에서 시탄(柴炭), 마초(馬草), 그릇을 제공하며 광록시(光祿寺)에서 각종 찬거리와 음료, 과일 등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는 품질이나 양이 좀 나아서 사행단(使行團)으로서의 대접을 받은 듯하다. ○ 지방관의 사행단 접대비용(평안도를 중심으로) 평안도의 관향(管餉)은 전후(戰後)청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심관(瀋館)의 수요를 충당하는 데 상당 부분 활용되었다. 수취 명분이 사라진 서량(西糧)역시 청과의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 비용을 지원하다 인조 말 혁파되었다. 동시에 양호(兩湖)에 이정된 양서(兩西)의 공물은 본 도로 환속되었는데, 평안도에서는 5∼6두를 거두어 군량으로 비축하였다. 평안도의 공물수미(貢物收米)는 타 도의 대동법(大同法)과 같은 형식을 띠었지만 낮은 수취량과 본 도 비축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호란을 거치며 공물 부담은 평안도의 재정 운영 과정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평안도 재정은 대청 외교와 무역 비용 지원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우선 양국간 공식 외교 통로의 하나인 칙행(勅行)을 보면 그 빈도는 병자호란 직후 가장 높았으며 18세기 초까지는 대체로 연평균 1회를 상회하였다. 한 차례의 사행이라고 해도 조선의 중앙이나 지역 재정 운영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한 달 가량의 조선 체류 일정 가운데 평안도에서 절반 정도를 머물렀다. 이 때 평안도의 각 읍은 인마(人馬)동원과 숙소 정비, 연회나 예단 제공의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18세기 한차례의 칙수(勅需)규모는 의주를 제외하고도 5만 냥을 넘어섰다. 이러한 막대한 칙수 부담을 가능하게 한 객관적 조건은 전후(戰後)의 재정 수입 확대와 군사적 지출 요인의 감소에 있었다. 따라서 군량으로 비축된 관향(管餉)이나 군포(軍布)수입은 칙수 지원에 적극 활용되었다. 칙수는 원칙적으로 관향에서 증감(會減)되었지만 칙행이 잇달으면서 관향곡이나 군포의 사전 분급, 혹은 추가 분급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중앙이나 사행로 상에 있는 타 도의 칙수 보조에도 평안도 재정이 투입되고 있었다. 한편 18세기 초 평안도의 각 읍에서는 원활한 칙수 확보를 위해 칙수청(勅需廳)이나 대동고(大同庫)등의 민고(民庫)를 설치하고 “민(民)을 동원하는 방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원래 청사 접대와 관련된 부역이 적지 않은데다가 각 읍의 재정 부족이 심화되자 민고의 형식을 통해 그 일부를 보충하려 한 것이다. 운영 기구나 형식은 다양했지만 칙수나 혹은 연행(燕行)경비를 확보하기위해 민간으로부터 이식(利殖)을 취하는 방식은 일찍부터 통용되었으며 갈수록 확대되었다. 칙행과는 달리 연행에서의 경비 부담은 무역 자금 지원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연행 빈도는 칙행과 마찬가지로 호란 직후 가장 높았으며 연평균 3회 내외에서 움직인 18세기 전반까지는 그 후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연행에는 보통 수백의 인마와 5개월 남짓한 기간이 필요했고 방물과 예단의 양도 적지 않아 중앙이나 지방 재정에 역시 부담을 주었다. 18세기 초까지는 단련사제(團練使制)가 유지되는 가운데 심양(瀋陽)으로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운반하였고 그 수량도 많아 뒤 시기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의 인마가 압록강을 건넜다. 사행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쇄마구인(刷馬驅人)이나 마(馬)‘ 명색(名色)은 대개 평안도에서 동원하였으며 마필(馬匹)도 관(管)·운향(運餉) 등에 크게 의존하였다. 인마의 규모와는 달리 연행 일정은 갈수록 증가하였는데, 그것은 잠상(潛商)의 규제와 관련하여 의주에서의 체류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평안도에서의 연행 접대 비용은 칙행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연 75∼90일 이상 연행 접대에 시달렸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연행에는 직접적인 접대 외에 중국에서의 경비는 물론 무역 비용까지 지원되었다. 그러한 경비 중 일부는 역관(譯官)들이 부담한 공용은(公用銀)에서 나왔으며, 역관들은 이를 명분으로 막대한 은화를 끌어들여 무역에 참여하였다. 이 은화는 주로 관은(官銀)대출을 통해 확보하였는데 여기에는 평안감영(平安監營)과 병영은(兵營銀), 관(管)·운향은(運餉銀)등이 포함되었다. 즉 평안도 재정이 역관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연행 경비와 무역에 투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관들의 상환 능력 감소로 관은 대출을 통한 공용은 확보가 치폐를 거듭하는 가운데 평안도의 대출량은 전체의 40% 선에 이르고 있었다. 역관 무역의 침체와 왜은 단절, 공용은 지출증가로 인한 관은의 상환 지체는 계속되었지만 연행과 무역 경비의 평안도 의존은 줄어들지 않았다. 평안도 재정은 역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중강(中江)에서의 개시(開市)와 책문(柵門), 심양(瀋陽)에 서의 무역에도 개입하였다. 평안도 물화가 전체의 절반이 넘었던 중강 개시의 경우 청의 요청에 따른 의례적인 참여였지만 중강 후시(後市)나 책문, 심양에서의 무역은 재정 확보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역상(譯商)간의 대립, 재정 보용과 잠상 억제 사이의 모순, 은화 부족과 공용은 문제 등 이 겹치면서 책문 무역은 치폐를 반복하였고 심양팔포(瀋陽八包)무역은 결국 혁파되었다. 대청(對淸)무역이 다양한 형식을 거쳐 변모하는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가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행 경비 확보를 위한 공용은(公用銀)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용은은 평안도의 관은(官銀)에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 했다. 의주부를 비롯해 평안감영과 병영이 여러 경로를 통해 대청 무역에 참여하여 재정 손실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깊었다. 결국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평안도 재정은 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과 관련한 외교·무역 비용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투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39년 8월 9일 맑음.일찍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에 도착하여 차를 마신 뒤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렀다. 감사 김인손(金麟孫, 1479〜1552)이 정자선(亭子船)을 내어 맞이하고 풍악을 울리며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또 배 2척에 기생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악기를 실어서 가운데 배의 음악이 그치면 다른 2배에서 음악이 연주되어 번갈아가며 음악을 울렸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례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윤(庶尹)과 판윤(判尹)도 술을 돌렸다. 밤이 다 가도록 술을 마시고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감사ㆍ주청사ㆍ동지사 등 모두 가마를 탔다. 기녀가 말을 타고서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악공들은 걸어가며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이다. 길에서 다시 술잔을 돌렸다. 대동관(大同館)에서 잤다. 부사(副使)가 황주의 기녀를 싣고 왔다. 8월 10일 맑음. 아침에 걸어서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 명나라 사신의 시를 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또 배를 탔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저녁에 거피문(車避門)에 도착하였다. 영귀루(詠歸樓)에 올라가서 또 술자리를 베풀어 초저녁에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왔다. 풍악을 울리며 길을 인도하기를 어제처럼 하였다. 재상 어사(災傷御使) 이조 정랑 임호신(任虎臣, 1506〜1556)이 중화에서 와서 함께 배를 타고 동행하였다. 8월 11일 맑음. 감사는 제삿날 재계(齋戒)하느라 나오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연광정(練光亭)에서 재상 어사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작별하였는데, 찰방 및 서윤 김정신(金鼎臣)과 판관 황승헌(黃承憲)이 동참하였다. 대교(待敎) 이홍남(李洪男, 1515〜?)이 와서 들렀으나 상(喪) 중이기 때문에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자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술을 마신 뒤 대동문(大同門) 풍월루(風月樓)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8월 12일 맑음. 오후에 감사가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동지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술자리를 나갔다.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8월 13일 맑음. 아침을 먹고 나자 감사가 나와서 대청에 술을 내와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고, 배웅하러 대동문(大同門) 안까지 뒤따라 나왔다. 도차미원(道此味院)에서 다담(茶啖)을 먹었다. 신시(申時: 오후3〜5시)에 안정관(安定館)에 도착하였다. 순안 현령(順安縣令) 성위(成偉)와 영유 현령(永柔縣令) 구희경(具希慶)이 공손히 문안하였다.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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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정』
연광정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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