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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2) 오래된 기억 속의 옛길, 義州大路

신춘호

짧았던 며칠사이 백목련 화려하게 정원을 수놓더니, 이제는 선홍빛 진달래가 계절을 느끼게 하는 오후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낙산방향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면 산자락 곳곳에 손에 잡힐 듯 노란 개나리꽃도 만발입니다. ‘생동하는 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봄 날, 잠시 하던 일 멈추고 일상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테지요. 옛사람들의 해외유람길, 두 번째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14호부터는 본격적인 사행노정 공간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공식 외교 행위로서 사행제도가 폐지된 지 1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행노정 공간에는 옛 흔적을 살필 만한 요소들이 더러 남아 있습니다. 사행의 국내 구간인 한양-의주 구간에서 사행단의 체취가 묻어나는 지점들을 사진 영상 자료로 소개하면서 그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노정의 전체를 소개할 수는 없는 관계로 사행 기록에 언급되는 주요 경유 도시의 요처와 흔적이 확연히 남아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미처 언급하지 못한 유적과 현장은 영상 슬라이드를 제작하여 제시하였으므로 참고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호에서 다루게 될 사행노정 공간은 한양-고양-파주-임진나루-장단-판문점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 남한지역의 사행공간이 중심입니다. 개성-평양-의주로 이어지는 북한지역 의주대로는 실답(實踏)이 어려운 한계가 있으므로, 이와 관련해서는 스토리테마파크-테마스토리에서 개발된 몇 가지 이야기 소재를 리스트로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별고를 기약합니다.

의주대로 의주대로

스토리테마파크 테마스토리 ‘사행, 타국을 걷는 길’에서 ‘사행의 여정’을 잘 묘사한 기록은 동화(東華)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의 <계산기정(薊山記程)>입니다. 특히 사행노정의 국내 구간에 대한 경관 묘사가 실감이 있고 작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 옛사람들의 여행과 세계관의 일면을 파악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도 <계산기정>의 기록을 참고하여 사신들의 행적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의주대로변에 남아 있는 사신들의 행적과 옛길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조선시대 교통로는 후기로 들어서면서 9대로 체제를 근간으로 하였으며, 중국으로 향하는 교통로는 서북로, 즉 의주로(義州大路)입니다. 한양(漢陽/서울)에서 의주(義州)를 연결하는 총 연장 약 1,080리의 교통․통신로입니다. 이 길은 중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했던 외교정책 때문에 도로의 정비가 잘되어 있었고, 양국 사신들의 왕래와 접대를 위해 모두 25개의 관(館)을 설치하여 편의를 도모하였습니다. 홍제원(弘濟院)도 그러한 휴식공간의 한곳입니다.

1803년 10월 21일, 나는 아침에 여행의 물건을 준비하고 복장을 하여 돈의문(敦義門)으로 해서 영은문(迎恩門)의 모화관(慕華館)에 당도하였는데, 세 사신은 표문(表文, 중국의 임금에게 보내던 외교 문서)을 받으러 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곧장 홍제원(弘濟院)의 점사(店舍)로 향했다. 넷째 형과 생질(누나의 아들) 남군(南君)은 이미 작별하고 먼저 돌아갔으며, 장인 역시 반형(班荊)의 정을 나눴다. 잠시 후에 사신 일행이 일제히 당도하여 차례에 따라 길을 떠났다. 이군(李君)이 나를 전송하러 여기까지 왔으나 역시 끝내 한번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몇몇 친구들과 위로하며 헤어지는데 서글프다느니 몸조심하라느니 하는 말로 만 가지 정서를 자아내게 하였다. 홍제원부터는 모두 처음 가는 곳들인데 모여 있는 산과 굽은 시냇물이 갖가지로 아름다워 호연(浩然)하게 만 리의 뜻이 생겨난다. 날이 어두울 무렵 달려서 고양에 당도했는데, 고양은 한 작은 읍이었다. 취민당(聚民堂)에 들었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년)

이해응의 기록에서 보듯 사행단은 삼사(三使: 정사/부사/서장관)의 결정과 사절단의 명칭 제정, 중국에 가지고 갈 세폐(歲幣: 조공물품)와 방물(토산물)의 포장, 임금에게 하직 인사, 그리고 표문(表文: 태상황과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과 자문(咨文: 청나라 예부에 올리는 문서)을 받습니다. 이후에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표문과 자문에 잘못된 곳이 없는지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합니다. 사행단은 궁궐을 출발하여 남대문(숭례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통례였지만, 삼사가 아닌 자제군관이나 비장 등 수행원들은 서대문(돈의문), 소의문, 창의문을 통해 모화관이나 홍제원으로 집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홍제원아파트

    홍제원아파트(홍제원 옛터 추정)
  • 경복궁 근정전

    홍제원아파트 공원에 조성된 표석

모화관과 무악재 너머 홍제원 일대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을 위한 전별연이 펼쳐집니다. 동료 관원들과 가족, 친지, 벗들이 마련한 연회에서 사행단이 되어 떠나는 이들과 소회를 나누고 그들의 격려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홍제원에서는 관리들이, 홍제교와 시장거리에서는 하급 사행단의 전별 모임들이 여기저기서 있었을 겁니다.

홍제원과 홍제천 홍제교 홍제원과 홍제천 홍제교

지금은 홍제원아파트가 들어서고 주택이 난립하여 옛 터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의 홍제원은 인왕산과 무악재아래 대로변에 위치하여 한양 서북지역을 오가는 공용여행자들의 숙박시설이자 휴식 터의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행단이 중국으로 향하거나 돌아올 때면 이곳은 환송하고 맞이하는 가족, 친지, 동료들로 북적거리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열리곤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먼 여행길에 나서는 이에게 여비를 보태주거나 하는 미덕이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노자(돈)보다 특히 ‘홍제원인절미’를 여행자들에게 보냈던 모양입니다. 간편하게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절미만한 것도 없었을 테니까요. 하급 관리나 사행단 말몰이꾼 등 먼 길 떠나는 이들에게 조선의 인절미는 음식으로서뿐만 아니라 고향을 그리는 매개의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홍제원과 홍제교 사이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떡집이 많다보니 이지역의 지명 또한 자연스럽게 ‘병전(餠廛)거리’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홍제원아파트

    홍제동 도로 확장 공사(1968년)
  • 경복궁 근정전

    병전거리였던 홍제시장의 떡집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그 흔한 떡집 하나 찾기 어려운 도심공간으로 바뀌어버렸으니 이제 병전거리의 생동하던 풍경들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과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홍제원이 ‘홍제목장(弘濟牧場)’으로 표기되어 있고, 홍제원의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국가 공공시설 자리에 목장(牧場)을 설치한 것은 아마도 홍제원이 가지는 공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민족정신 말살의 의도를 갖고 목장을 설치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필자는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를 통하여 매년 수차례 의주대로 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답사 일정이 정해지면 가장 먼저 떡집에 전화해서 ‘인절미’부터 주문하곤 합니다. 답사 당일 홍제원 인근을 지날 때 답사 참가자들에게 인절미를 나누어 주며 조선 사행단의 전별 장면과 인절미 일화를 들려줍니다.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새벽부터 나선 답사라 마침 출출하기도 하려니와, 역사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매개를 직접 대하니 기분이 묘하다는 이부터 그 감동이 제법 크다는 이까지 반응도 다양합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거창한 구호보다는 일상에서 소소하게나마 기억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신들은 홍제원 일대에서 가족, 친지, 동료들이 마련한 전별자리에서 연거푸 받아든 술잔을 뒤로 하고 해가 뉘엿거릴 무렵에서야 거나하게 취기어린 얼굴로 가마에 오르고 말에 올라타 고양군 관아의 숙소로 향하였습니다.

  • 관기현(관터고개)

    관기현(관터고개)
  • 양천리 표석

    양천리 표석

사행의 첫 숙박지인 고양은 한양에서 약 30리 거리입니다. 사행단의 여정은 사행 기록에는 없지만, <대동지지(大東地志)>와 <도로고(道路考)>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고양까지의 노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높고 험한 무악재를 넘어 홍제교를 건너고, 녹번현, 관기현, 박석고개를 연달아 넘어야 고양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박석고개는 지금의 은평구 갈현동과 불광동을 끼고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무악재보다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지만 고개가 길고 풍수 지맥상 인근 서오릉(西五陵)의 결인(結咽印: 목구멍)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지맥이 깎이지 않도록 박석(薄石: 얇고 편편한 돌)을 깔았던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박석고개 정상부의 산자락에 3칸 규모의 서낭당이 있었고 또한 무당이나 부녀자들이 치성을 드리던 신목과 돌무더기가 있었다는데, 1973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한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서낭당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박석고개 서낭당은 ‘사신성황당’이라고도 전하는데, 사신은 사신(四神)과 사신(使臣)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신(四神)은 칠성님,석가부처님,男선왕님,女선왕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동안 ‘사신성황당굿’의 맥이 끊겼다가 학계와 무속인들의 노력으로 2012년에 새롭게 복원, 재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사신(使臣)은 ‘중국 사신’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다음은 사신서낭당 구전 설화의 요지입니다.

“조선조 어느 때, 중국 사신인 ‘칙사(勅使)’가 조선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고개 마루에 이르렀는데, 말이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채찍을 때려 보고 앞에서 끌어도 움직이지 않자 사신이 매우 화가 났다. 갖은 애를 써도 말이 움직이지 않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데, 이는 박석고개 성황신에게 인사도 없이 오가는 것이 괘씸하여 신령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사신은 정성스럽게 제물을 준비하여 서낭당에 제를 지내고 사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렸더니, 말이 움직이고 일행이 무사히 박석고개를 넘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구전설화 정리, 필자)

구전에 의한 이야기여서 관련 문헌을 찾기는 어렵지만, 2012년 12월 8일 ‘사신성황당굿’이 복원, 재현되는 현장에서 무속인들로부터 들었던 얘기와 일맥상통한 부분입니다. 박석고개는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동 경로의 하나였으니, 이 지역의 삶과 문화 속에 사신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전승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덕궁 인정전과 희정당(우측)

    사신성황당 복원
  • 경복궁 근정전

    박석고개 당산목과 서낭당 터

사신서낭당과 중국 사신 이야기는 그 중의 하나였을 테지요. 사행노정 공간에서 확인하는 스토리텔링의 한 사례인 셈이고, 사행문화 스토리 소재의 하나로 참고할 만합니다.
박석고개 아래 구파발은 옛 파발참인 검암참(黔庵站)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로 군사 문서의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는 파발제(擺撥制)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봉수제의 보완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파발제에서 서로(西路)로 불렸던 의주로의 파발은 기발(騎撥)이었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했으므로 신속한 정보 전달과 빈번한 사행 왕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역참을 설치하였습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파발 참(站)은 약 1,050여 리로, 대략 25리마다 하나씩 모두 45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은평구 파발제 축제의 재현 행사 은평구 파발제 축제의 재현 행사

현재 구파발 옛 도로는 은평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대폭 정비되어 신작로가 개설되어 통일로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구파발(검암참)은 예나 지금이나 고양, 파주, 양주, 적성, 벽제로 길이 나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사신단의 발길은 고양 파주 방향으로 향하는데, 구파발 인근의 덕수천(창릉천), 여석현(숫돌고개), 덕명천, 망객현을 넘어 고양군 관아의 객관인 벽제관에 들릴 수 있었습니다.
여행자에게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이 내포하는 의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공적 여행이든 사적 여행이든 모두 포함되는 말이며, 공간에 대한 의미 부여는 여행자가 처한 현실과 심리적 요인에 의해 의미 부여의 결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 창릉천(昌陵川) 일대도 그러한 공간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조선 정부는 정축화약(丁丑和約)의 조항에 따라 왕세자(빈)와 왕자, 재신, 그리고 백성들이 중국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소현세자 일행이 인조와 작별하던 공간이 바로 창릉(昌陵) 모퉁이 창릉천 일대입니다. 전쟁의 상처와 치욕, 이별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입니다. 창릉천은 덕수천(德水川)이라고도 합니다. 창릉천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멀리 삼각산 연봉과 마루금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창릉천(덕수천)에서 바라본 삼각산 창릉천(덕수천)에서 바라본 삼각산

옛사람들은 이곳을 지나 삼송리 고개를 넘으면 한양과 삼각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그리워 하거나 고향을 생각하는 소회를 남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떠오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주창했던 선생이었기에 청나라가 그를 위험 인물로 지목했고, 결국 심양에서 4년간 투옥되기도 하였는데, 그가 심양으로 가던 길에 남긴 우국충정어린 시조가 전합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김상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고양 삼송리 고개는 여석현(숫돌고개)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군 장수 이여송이 숫돌 성분을 지닌 이 고개의 바위에 칼을 갈았다고 하여 ‘숫돌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당시 이곳은 이여송이 왜군과 접전하다 패퇴했던 벽제관 전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고개 너머는 백두산정계비(1712년)를 획정할 때 조선 측 통역으로 참가한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1718)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외교 문헌인 <통문관지(通文館志)> 편찬에도 참여한 명문 역관 가문의 면모를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 여현, 숫돌고개라고 불리는 삼송리 고개

    여현, 숫돌고개인 삼송리 고개
  • 역관 김지남 묘역(우봉김씨 묘역)

    역관 김지남 묘역(우봉김씨 묘역)

한양을 떠난 사행단이 첫 숙박을 하게 되는 고을이 고양(高揚)입니다. 객관으로 사용된 곳은 관아의 부속건물인 벽제관(碧蹄館)입니다.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의주로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 곳 있었습니다. 역관은 역과 원, 주막 등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의 편의를 최대한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행단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임금이 능(陵)을 방문할 때에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벽제관은 한성(서울)에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사신(勅使)들이 한양에 들어오기 전에 이 벽제역 객사(客舍)에서 숙박한 후 다음 날 관복으로 갈아입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정해진 관례였습니다.

고양 벽제관지(우측 하단 사진은 소실되기 전의 벽제관 모습) 고양 벽제관지(우측 하단 사진은 소실되기 전의 벽제관 모습)

이처럼 벽제관은 서북로 연로에 설치한 첫 번째 역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중국 사신이 반드시 한양 입경 하루 전에 이곳에 머물도록 한 객사 자리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벽제관의 기능은 경의선 철도가 놓이면서 상실하게 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부속 건물 50여 칸이 헐렸으며, 한국전쟁 때 불타 버려 폐허가 된 채 객관의 문만 1960년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사진하단) 벽제관 자리는 옛날 역관이 있던 건물터로 현재 고양초등학교 북쪽에 인접해 있으며, 옛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현재는 건물의 기단 주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혜음령(惠陰嶺)은 고양군의 북쪽에 위치하여 파주군 광탄면과 접경하고 있습니다. 혜음령은 해발 164m밖에 안 되는 낮은 고개지만, 고개 아래의 양쪽이 모두 낮은 평지여서 고갯마루가 의외로 높아 보이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고개 위에 그늘이 져서 쉬기에 적합하므로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 하여 혜음(惠陰)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데, 과거에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가다가 산 아래 고양 벽제관에 이르기 전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 가는 고개라 해서 ‘쉬엄령 고개’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 이여송의 군대가 혜음령 일대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큰 전투를 벌였던 사실만 봐도 이 혜음령은 예로부터 전략적인 요충지로 인식되어 오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고양과 파주의 경계인 혜음령

    고양과 파주의 경계인 혜음령
  • 혜음령

    혜음령

혜음령을 넘어 파주로 향하는 우측 산자락에는 옛 고려 행궁터로 추정되는 혜음사 혜음원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혜음원은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던 국영 숙박시설입니다. 고려시대에 왕의 남행 시 행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파주시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24개 동의 건물터와 유물, 유구들이 출토되어 대단한 규모의 행궁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 혜음원지 발굴 현장(국가 사적)

    혜음원지 발굴 현장(국가 사적)
  • 세류동과 의주로

    세류동과 의주로

혜음령 너머 용미3리는 세류동(細柳洞)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잔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인데, 조선시대의 역참인 세류점(細柳店)입니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 때 호병(胡兵: 청나라 병사)들이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하여 ‘호주골’이라고도 불렀고, 호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죽골'이라는 별칭도 있었다고 구전되어 오는 것을 보면, 혜음령 일대는 이래저래 중국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라 생각됩니다.

용미리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쌍불)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의 파주지도 편에 혜음령(惠蔭嶺)-세류점(細柳店)-석방(石坊)-미륵현(彌勒峴)-분수원(汾水院)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 상에 미륵현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보물 제93호)이 소재한 곳입니다.
용미리석불입상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자락에 위치한 용암사(龍岩寺) 경내 좌측 산자락에 있습니다. 혜음령을 넘어 세류참에 도착하면 멀리 장지산 중턱에 하얗게 쌍불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길을 지나는 과객들은 이 쌍불 입상을 이정표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용미리석불입상은 미륵불(彌勒佛)입니다.
고려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은 천연 바위벽을 이용해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놓은 2구의 거대한 불상입니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압감은 있어 보이나 신체 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이라고 합니다. 용미리쌍불입상 조성 경위와 관련해서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기도와 불사로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기자전설(祈子傳說)이 전해지고 있어서인지, 지금도 이곳에는 자식 점지를 기원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쌍불 입상은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는데요, 이해응의 <계산기정>에도 혜음석불을 묘사한 시문이 전합니다.

혜음석불(惠陰石佛) / 이해응
혜음재에는 돌미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데 그 키가 수십 척이나 된다.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하나는 네모지고 하나는 둥글다.
曇雲如浪護山頭 물결 같은 흐린 구름 산머리를 지키는데
石佛分身幷兩肩 돌부처 분신하여 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萬劫風磨猶卓立 만겁을 바람에 갈리면서도 그대로 우뚝 서서
懸應太始上干天 멀리 태초와 호응하여 위로 하늘을 지르고 있다.

사신이 파주목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또 다른 명소는 윤관 장군 묘입니다. 이해응은 ‘광탄교(廣灘橋)’라는 시에서 “지나는 곳에 윤시중교자총비(尹侍中驕子塚碑)가 있다. 예부터 이곳이 윤씨/심씨가 다투어 송사하던 곳이라고 일컬어 왔다.”라고 하여, 고려 말 명장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 장군의 묘역을 지나면서 당시 파평 윤문과 청송 심문의 산송분쟁 사연을 상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몇 해 전 두 문중이 과거의 산송문제를 해결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파주 신산3리는 옛 지명이 신탄막, 새숯막, 새술막입니다. 주막거리가 형성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갈 만큼의 번잡스러움이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일 뿐입니다. 마을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던 중 이 지역을 지날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할 수 없이 어가를 멈추고 비를 피했다. 이 때 장작이 젖어 잘 타지 않자 이 마을에서 아껴 쓰던 숯을 지펴 수행하던 관원들의 옷을 말렸다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선조가 “이 숯은 처음 보는(新) 숯(炭)이군.”이라 하였다 하여 ‘신탄(新炭)’이라 했으며, 그 후 주막(酒幕)과 신탄이 합해져 ‘신탄막(新炭幕)’ 또는 ’새술막‘이라 하였다 전해진다. (이윤희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의 <파주기행> 중에서 발췌)

  • 윤시중교자총/전마총비

    윤시중교자총/전마총비
  • 신탄막/새술막(파주 신산3리)

    신탄막/새술막(파주 신산3리)

사신들은 저녁 무렵 파주목의 파평관에 도착하면 봉서당(鳳棲堂)에서 묵었습니다. 짐을 푼 아랫사람들과 말몰이꾼은 인근 역참인 마산참(馬山站)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쉬거나 말을 교체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마산리에는 연암 박지원의 1780년 중국 연행의 정사였던 박명원과 화평옹주합장묘역과 신도비가 군부대내에 조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파주시청 소재지가 지금은 금촌으로 옮겨진 탓에 옛 파주목 관아가 있던 주내는 한적한 시골 소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조선시대에 파주읍은 인근의 4개 군현을 관할하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파주목 관아지는 현재 파주초등학교와 인근의 군부대에 걸쳐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정에 파주목 관아 문루 주초석과 파주목사들의 선정불망비군이 있고, 100주년 역사관에는 파주목 관아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사진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의 일부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관아 문루 주초석

    관아 문루 주초석
  • 경복궁 근정전

    파주목 관아 건물(심상소학교 교사로 쓰임)

파평관에서 하룻밤을 머문 사행단은 아침 일찍 성황당치와 배내(梨川)를 지나 임진나루에 당도하여, 배를 타고 동파나루를 거쳐 장단 임단관에 이르러 머물거나, 내친김에 송도(개성)의 태평관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임진나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까요?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임진강은 한강과 합류되어 서해 바다로 이어지는 약 700리(274km)에 달하는 긴 강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교통 수로로서 화물선과 인마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경기 북부와 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임진나루(원 안) 「동국여도-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규장각 소장) 임진나루(원 안) 「동국여도-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규장각 소장)

1803년 10월 23일, 나(이해응)와 일행은 임진강에 당도했다. 임진은 파주(坡州)의 교통 요충지이다. 산이 트여 강에 다가서서 양쪽이 급히 치솟아 있다. 산을 따라 성이 있는데 성문을 진서문(鎭西門)이라고 한다. 성문 안에는 별장(別將)의 관아가 있다. 강 동쪽엔 석벽이 물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을 적벽(赤壁)이라고 한다. 적벽 동쪽에는 또 내소정(來蘇亭)이 있다. 임진을 지나니 동파역(東坡驛)이 있고, 또 10리를 가서 장단의 임단관(臨湍館)에 당도했는데 임단관 남쪽에는 월륙시(月六市)가 열렸다. 향사당(鄕射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송도(松都) 40리를 가서 태평관(太平舘)에서 묵었다. 인편이 있어 가서(家書)를 올렸다. (이해응 <계산기정>, 1803년)

이해응이 <계산기정>에서 언급했던 임진강 진서문과 별장 관아 터는 군부대 통문과 막사로 바뀌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적벽 언덕 위의 내소정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 임진나루 소초(옛 진서문 터)

    임진나루 소초(옛 진서문 터)
  • 임진나루 고깃배. 강 너머가 동파나루

    임진나루 고깃배. 강 너머가 동파나루

임진강 물길은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 도도히 흐를 뿐입니다. 사행단은 임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맞은편의 동파나루에서 내려 장단부 임단관에서 점심을 먹고 개성으로 향하였습니다. 동파나루는 장단면 동파리에 속하는 지역이며, 현재 나루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길이 없고, 군부대의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어렵습니다. 동파나루 인근에 있었던 동자원(東子院) 옛 터 역시 군부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파, 장단을 지나 개성으로 향하는 의주대로를 육로로 잇는 길은 임진나루 북쪽의 전진교를 통하는 방법이 있지만, 민간인통제구역 지역이기 때문에 군부대를 통한 사전 방문협조를 구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주대로의 남한 지역은 장단면 판문점 입구 삼거리(JSA 경비대대 입구)까지 현장 답사가 가능합니다. 남북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초입에서 의주대로의 연행 노정은 멈추게 됩니다.

  • 장단 인삼밭

    장단 인삼밭
  • 판문점 초입(JSA 경비대대 정문)

    판문점 초입(JSA 경비대대 정문)

판문점 경비대대인 JSA 부대로부터 북측 군사분계선을 지나 개성에 이르는 공간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동토(凍土)의 공간입니다만, 불과 백 몇 십여 년 전 이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던 연행 사신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행적을 문헌 기록으로나마 상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또한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임진강 화석정에서 바라본 개성 송악산 원경 임진강 화석정에서 바라본 개성 송악산 원경

길(路)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활짝 열렸을 때 의미가 있게 마련입니다. 길을 걷는 이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 또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방법의 하나일 테니까요.

* 답사의 한계로 북한지역 의주대로에 대한 소개는 별도의 기회를 기약합니다. 아래 스토리테마파크 참고 스토리의 항목들은 이해응 <계산기정>에 보이는 북한 지역의 사행노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음 호부터는 중국 지역 연행노정 공간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연행의 삼절구간(초절/중절/종절)과 북경 지역에서의 주요 활동 공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압록강~심양까지 ‘동팔참’ 구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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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북한지역 의주대로 관련 스토리

작가소개

신춘호 작가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등이 있다.
“목화밭에 씨뿌리자 장대비가 내리다- 손쓸 계책 없는 백성들의 삶”

손쓸 계책 없는 백성들의 삶 김령 <계암일록>, 1625-04-06
1625년 4월 6일, 일찍 시작된 장마에,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지루한 장마는 보리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목화에 더욱 해가 되었다. 4월 4일에서 5일, 이틀에 걸쳐 농가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심었는데, 목화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심자마자 비가 오는 것이다. 1623년과 1624년에도 목화가 금처럼 귀했는데, 이처럼 올해 또 심자마자 비가 내리니 김령은 백성들의 삶이 걱정되었다.

“기물을 팔아도 감당이 안되는 세금,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다”

자문 자문[尺文] : 조세·부과금·수수료 등을
받고 교부하는 조선시대 영수증서
김령 <계암일록>, 1624-07-22
1624년 7월 22일, 세곡을 독촉하는 관청의 명령이 매우 급박하였다. 세곡선(稅穀船)에 싣고 받은 자문[尺文]을 이달 26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형문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어찌된 일인가. 김령은 얼마 후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이신승(李愼承)이라는 자가 한탄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은어(銀魚)를 진상하라”

은어 권문해 <초간일기>, 1587-08-01 ~
1588-06-13
1587년 8월 1일, 대구부사 권문해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공납(貢納)해야 할 진상품을 챙기느라 바쁘다. 1584년 대구부사로 부임한 이후 올해로 4년째 매년 해오는 일이지만 공납일이 다가오면 늘 걱정과 근심이 생긴다. 특히 공납품 중에 하나인 ‘은어(銀魚)’를 챙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은어가 한 마리도 없고 민간에서도 거두지 못하여 진상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상주에서 올라온 은어(銀魚)와 식염(食鹽) 그리고 목면과 필을 겨우 챙겨 진상할 수 있었다.
1588년 6월 9일, 올해도 역시 은어가 문제였다.

“진상을 위해 청어를 잡으러 가다가광풍에 배가 뒤집혀 4명이 죽다”

은어 조재호 <영영일기>, 1751-10-19 ~
1751-11-04
1751년 11월 4일, 삭선진상품(朔膳進上品)인 생청어를 잡기 위해 10월 초부터 각 읍의 어선을 거느리고 해구(海口)의 여러 곳에서 밤낮으로 그물질하였지만 날씨가 푹한 까닭에 전혀 자취가 없었다. 더욱 독촉하여 기일에 맞춰 봉진하라고 하였으나, 진해에서도 물고기의 자취가 계속 묘연하다고 하였고 마침내 끝내 잡지 못하여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게 된다.
이 와중에 10월 19일, 고성현 남촌면에서 생청어를 잡으러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광풍에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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