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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선죽교와 숭양서원 - 사신단, 갈 길이 멀어 명소에 들를 시간이 없다
1803년 10월 24일, 여행 일정이 매우 바빠서 나(이해응)와 일행은
선죽교(善竹橋)
와 숭양서원(崧陽書院)은 모두 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송악(松嶽)부터 서쪽은 산세가 서로 이어닿고 험악하다. 한 길이 산을 끼고 뚫려 있는데, 10여 리를 빙빙 돌아 점차로 양장(羊腸, 양의 창자) 같이 꼬불꼬불해진다.
멀리 생각나기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에 우두커니 요해처(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를 잃은 일이니, 염옹(念翁)의 시 가운데에 ‘여진이 대낮에 지났으니, 동방엔 남자가 없다.[女眞經白晝 男子東方無]’고 한 것은, 당시의 장사들로 하여금 몸 둘 곳이 없게 하였다.
금천(金川)
의 읍도(邑都)를 옛터에 옮겨다 시설하니 서울에서 70리다.
역참(驛站)
이 너무 멀어, 사람이 피곤해지고 말이 지침을 느꼈으므로 눌문당(訥文堂)에 들어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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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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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3-10-2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황해도 개성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5호
웹진 담談 14호
조선왕조실록
◆ 병자호란 당시 방비의 허술함에 대한 지식인의 개탄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청나라 군대가 의주를 통과한지 불과 5일 만에 개성을 통과하면서 서울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이해응은 이처럼 개성이 수도 방어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방비상태로 당한 것에 대해 탄식한 것이다. 조선군은 청과의 전쟁(병자호란, 1636)에서 왜 힘없이 무너졌을까. 인조반정이후 조선은 중앙군이 강화되고 지방군이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이 등극한 왕과 반정세력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북(평안도) 지역은 이괄의 난에 많은 정예병이 동원되었다가 몰살당하고 서북지역 전체를 불과 1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조선의 친명(親明)정책을 불편하게 여긴 후금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조선은 서북면 방어를 급하게 보강하였다. 1626년 8월에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조선 조정은 공격축선상의 각 거점을 강화함은 물론 정예인 훈련도감(訓鍊都監)군 250명과 하삼도(下三道)에서 징집한 5,000명의 서북지역에 배치하였다. 이어 11월에는 함경도 남부지역에서 병력 2,000명을 차출하여 평안도 방면으로 재배치하였다. 조선이 후금의 침공에 맞서 행한 노력은 상당했지만 방어전에서는 적의 야전군을 격파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임을 간과한 듯하다. 조선군과 후금군이 전투를 벌인 의주, 창성진, 용골산성, 안주의 전투는 모두 성을 둘러싸고 부딪친 공성전(攻城戰)이었다. 야전에 부대를 편성하여 후금군을 기습한다던가, 아니면 후금의 주력부대를 야전으로 섬멸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성을 지키는 병사들도 전투의지가 결여된 모습을 벌였다. 의주전투에서는 일부 병사들이 탈영했고 용골산성 전투를 앞두고는 후금군에 아예 항복하려는 무리들까지 나왔다. 성벽이라는 장애물 뒤에서 조차 탈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군사들이 적의 군사와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야전에서 전투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군이 야전을 포기한 탓에 각 거점을 공격하는 후금군은 외부의 위협 없이 성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불과 한 세대 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외부 호응부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공성전에 관한 전술적 경험이 정묘호란에서는 반영이 되지 않은 듯싶다. 외부의 지원이 없었던 서북의 거점들은 용골산성만 제외하고는 힘없이 무너졌다. 그나마 정묘호란 중 유일하게 있었던 야전 시도는 황주에서 황해병사 정호서가 이끄는 황해도 병력 5,000명이 후금군을 기다린 것이다. 평양에서 지원오기로 되어있었으나 평양의 군민이 후금군 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심지어는 평안감사도 도주하는 바람에 정호서는 자신의 병력만으로 후금군이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봉산으로 후퇴하였다. 정호서가 야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후금군은 조선의 수도인근까지 무인지경으로 달리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서북에서 후퇴해온 병사들과 함경/강원도에서 병사를 차출하여 임진강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한강에는 총융청(摠戎聽)군과 하삼도에서 모은 군사들로 방어선을 만들었다. 만약 후금군이 도하를 시작하였다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나 청과 조선이 화의를 체결하는 바람에 전쟁은 끝났다. 후금군은 불과 35,000의 병력으로 조선 서북의 여러 거점을 무너뜨리고 전투를 치르면서 한양과 지척에 있는 개성까지 300km 거리를 불과 15일만에 진출하였다. 이는 기동방어를 애초에 포기하고 수성(守城)에만 의지한 전술적 실책과 의주나 평양등지의 군민(軍民)이 보여준 전투의지 결여에 기인한 바가 크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면 정묘호란에서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거의 동일한 형태의 공격이 이루어질 것임에도 기본적인 작전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만약 후금(이때는 청)군이 침공을 개시하면 수비군은 서북지역의 각 요새로 들어가 농성전으로 청군을 지연시키고 수도권 방어에 가능한 시간을 번다는 것이 조선군 작전의 골자였다. 이 작전의 실행을 위하여 조선은 각 지역의 산성에 3천에서 5천의 병력을 분산 주둔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각 요새는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야 하고 상호구원이 어렵게 된다. 이를 보면 조선군은 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동안 인구가 많은 삼남(三南)에서 병력을 모아 반격하는 先수비, 後 반격의 전술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청군의 본부대를 공격하여 무찌른다는 개념은 없다. 이렇게 피 침략국이 야전전투를 위한 기동예비대를 두지 않고 단지 고립된 요새에서 농성에만 의존할 경우 적군은 요새들을 우회하여 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수비작전을 무력화시켜 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실제로 이런 형태로 전개가 된다. 물론 적군이 후방의 거점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비병력을 잔류시킬 경우 전력이 약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청의 태종(太宗)홍타이치는 이미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잔류병력으로 활용할 3만의 몽고군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에 16,000명으로 구성된 치중대(보급부대)를 구성하여 현지보급이 아닌 후방을 통한 보급체계를 세웠다. 청태종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1636년 12월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용천-곽산-선천등을 거치는 전통적 축선을 따라 진군하였다. 소수의 병력을 각지에 잔류시키는 한 편, 공략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는 안주성등의 요새는 우회하였다. 본군과는 별도로 마푸다(馬夫大)의 선봉부대는 청태종보다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예친왕 도도가 이끈 청의 좌익군 역시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 백마산성을 공격해 보았으나, 성이 견고하고 군민의 항전태세가 강해 보여 그대로 지나친다. 청군은 선봉대가 12월14일에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철옹산성 전투와 홍제원(弘濟院)에서 조선의 결사 기병대 80명과 접전한 것 이외에는 거의 전투가 없었다. 이는 거점을 가급적이면 점령하기보다 우회하면 된다는 청군의 기본 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군을 어느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조선군 야전전력의 부재(不在)가 보다 큰 요인이라 하겠다. 전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청군은 전력의 소모가 거의 없이 12월 14일에 한양 인근에 도착하였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인조는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양을 지키고 있던 심기원의 6천 조선군은 청의 좌군(左軍)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결전을 기하기보다는 삼각산(三角山)에 올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보다 느리게 오고 있던 청의 우군(右軍)은 12월 23일 평양인근의 중화(中和)를 출발하여12월 25일 토산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김자점의 5,000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나마 야전 부대와 함께 나와 있던 김자점은 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청군의 야간기습을 허용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조속히 야전에서 청군을 격파하지 못한 조선군은 남한산성의 포위를 허용하고 말았고 인조는 혹시라도 자신의 격문을 보고 지방에서 얼어날 근왕군(勤王軍)의 구원을 기다려야 했다. 강원도와 평안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근왕군이 조직되어 남한산성의 구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규 병력과 민간인이 혼합된 혼성부대인 근왕군들의 전투력은 기대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난 7,000근왕군은 12월 26일에 검단산 근처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초반의 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청군의 화력에 밀려 패하고 말았다. 토산에서 패퇴한 김자점은 자신의 패잔병 2,000에다 강원감사군 6,000, 함경감사군 7,000, 그리고 삼각산에서 청군에게 패한 심기원의 패잔병 2,000을 합쳐 17,000을 확보하였으나 남한산성 전투에 적극 개입하지 못하고 관망만 하다가 인조의 항복을 맞았다. 전라도 근왕군은 수원 인근의 광교산(光敎山)에 진출하여 청태종의 매부인 바이앙고라를 사살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으나 단독으로는 남한산성을 구원할 길이 없어 결국 수원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경상도 근왕군 2,000명 역시 1월 3일 여주근처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고 조령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근왕군의 병력수를 보면 약 3만 3천으로 적은 병력은 아니다. 문제는 근왕군의 규모가 아니라 근왕군이 다른 부대와 연결하거나 서로 소통(疏通)하여 조직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근왕군 부대들은 전력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언제나 단독으로 청군을 공격하였고 각개격파당하거나 설사 승리를 하더라도 청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남한산성 진격을 포기하였다. 이미 청군이 남한산성으로 행하는 모든 길목을 막고 공고한 포위망을 형성한 상황에서 근왕군들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청나라의 목표는 조선왕을 잡아 빨리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군사학에서는 ‘참수(斬首)공격’, 또는Decapitation strike라고 한다. 적의 기타 부대를 무시하고 수뇌부를 격파하여 적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왕을 잡으려고 선봉부대를 빠르게 진격시킨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보다 일찍 전술적인 준비를 마치고 수만의 휘하병력 중 일부를 야전기동대로 두었다면 6,000의 선봉부대 정도는 충분히 감당이 되었을 수 있다. 아울러 청군이 진격하는 동안 괴롭혀 진군을 늦추고 전력을 소모시키면 임금이 몽진할 충분한 시간은 물론 하삼도의 병력이 집결될 시간을 확보하였을 수도 있다.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자 19세기 초기의 군사사상가 앙트완 앙리-죠미니 (Antoine Henri de Jomini)는 방어전쟁의 요체(要諦)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비전쟁의 목적이 적군에 의하여 위협받는 나라를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라면, 모든 작전은 적군의 진격을 늦추도록 고안되어야 할 것이며, (그 진격로에) 애로사항과 장애물을 최대한 늘려 목표를 이루지 못하도록 적군을 괴롭혀야 한다. 다만 이는 아군의 힘을 보존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조선군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양(兩) 호란 당시 조선군 최대의 실패원인은 기동전력의 미비와 야전 전투의 조기 포기이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개탄하며 그 때의 일을 기록한 글은 풍성하고 다양하다. 그들이 겪은 일을 사실대로 옮기기도 하고 비통한 심정을 여러 문학작품에 표출하기도 하였다.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남한산성의 수난에 대해 있었던 일을 충실하게 발문에서 밝혔다. 석지형은 『남한해위록』에서 남한산성에서 포위를 당했다가 풀려난 전말을, 실제로 목격한 대로 실기에다 기록한다면서, 조정 안팎의 움직임을 견주어서 서술하는 데 유의했다. 최명길의 『병자봉사』는 그 당시 자기 주장을 임금에게 올린 것이고, 김상헌의 『남한기략』은 난의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한 일기이다. 『산성일기』로 통칭되는 『산셩일긔 병』는 표현을 생동하게 해서 국문에 익숙한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한 데 의의가 있다. 작자는 산성 안의 갈등을 추적하면서 척화파를 옹호하고 이에 알맞은 사건을 자세히 묘사했다. 『심양일기』는 소현세자를 따른 관원 가운데 누군가가 기록한 것인데, 비통한 사연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어 청나라가 은혜를 베푼 것처럼 전제하고서 분통터질 일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남이웅의 아내 남평조씨가 국문으로 지은 『병자일기』는 작자와 창작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여성 실기문학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민간의 체험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김상헌은 청나라로 잡혀가 글을 남길 수 있었는데, 한시에서는 행로마다 느끼는 처절한 심정을 노래하고 옥중에서 번민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며 고국에서 간 사람을 만나 주고받은 사연이 또한 심각했다. 작품으로는 『격중견월』이 있다. 병자호란의 충격은 포로들의 시조를 통해서도 선명히 나타났는데, 효종은 시조에서 굽힐지 모르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정환은 시조 『비가』를 지었다. 채득기는 병자호란과 관련된 가사인 『봉산곡』을 지었으나 전란을 적극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이처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양반 지배층의 무능과 허식이 무참히 폭로되고, 평민들의 자아의식이 싹트면서, 평민 대중의 계층이 사회의 표면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사상적으로는 전통적인 주자학이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낡은 이념이라고 비판을 받게 되고,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 생활 위주의 근대적 사상인 실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면에서도 평민 대중의 문화 왕성하게 일어나고, 한글이 더욱 널리 보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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