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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선죽교와 숭양서원 - 사신단, 갈 길이 멀어 명소에 들를 시간이 없다
1803년 10월 24일, 여행 일정이 매우 바빠서 나(이해응)와 일행은 선죽교(善竹橋)와 숭양서원(崧陽書院)은 모두 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송악(松嶽)부터 서쪽은 산세가 서로 이어닿고 험악하다. 한 길이 산을 끼고 뚫려 있는데, 10여 리를 빙빙 돌아 점차로 양장(羊腸, 양의 창자) 같이 꼬불꼬불해진다.
멀리 생각나기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우두커니 요해처(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를 잃은 일이니, 염옹(念翁)의 시 가운데에 ‘여진이 대낮에 지났으니, 동방엔 남자가 없다.[女眞經白晝 男子東方無]’고 한 것은, 당시의 장사들로 하여금 몸 둘 곳이 없게 하였다. 금천(金川)의 읍도(邑都)를 옛터에 옮겨다 시설하니 서울에서 70리다. 역참(驛站)이 너무 멀어, 사람이 피곤해지고 말이 지침을 느꼈으므로 눌문당(訥文堂)에 들어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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