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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의 사흘 - 여색과 풍류, 음식을 밤낮으로 마음껏 즐기다
부벽루(浮碧樓)
는
장경문(長慶門)
밖,
전금문(轉錦門)
안,
영명사(永明寺)
의 동쪽 켠에 있는데, 훌쩍 날듯이 뛰어나 있고 강물이 담벼락을 때리며 암벽에 둘러싸여 치솟아 있다. 뒤에는
모란봉(牧丹峯)
이 있고, 앞에는
능라도(綾羅島)
가 마주 보고 있다.
부벽루의 앞 기둥에는 ‘고요한 그림자는 벽옥을 가라앉힌 것이요, 부동하는 광채는 금이 날뛰는 거라.[靜影沉璧 浮光躍金]’라는
대련(對聯)
이 있다. 아름답고 깨끗한 점으로는 동방의 누대 중에서 으뜸간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조천석(朝天石)
이 멀리 하늘과 같이 푸르고, 서쪽에는
을밀대(乙密臺)
가
소남문(小南門)
밖에 있는데
성가퀴
가 둘러 있다.
그 가운데에 둥그런 봉분 형상이 있어 어떤 사람은
을밀(乙密)
의 묘(墓)라고도 하는데, 읍 사람들이 그 의견에 따라서 산에 제사하는 곳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하여
득월루(得月樓)
를 거쳐서 돌아왔다. 부벽루로 가는 길에 석벽이 있어 깎아지른 듯한데, 석벽 면에 ‘
청류벽(淸流壁)
’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밤에는 벼랑을 도는 초롱불이 여기저기서 비친다. 평양에서 사흘을 묵는 동안
성색(聲色)
과 음식을 밤낮 계속하다 보니 도리어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3-11-0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5호
웹진 담談 14호
조선왕조실록
◆ 평양의 문화적 공간과 평양기생
평양은 기자의 고도이다. 산천이 아름답고 풍기가 함축되어 왕자가 옮겨 사는 곳이 되었는데, 본조에 이르러서 군현으로 삼고 평양부라 하였다. 정사를 펴는 곳을 설치하여 관찰사로 부윤을 겸하게 하였으며, 대동강 가에 영채를 열었으니 팔도의 목이요 두 나라 사이의 문지방이다.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한 견고한 성으로 변경(汴京)의 형승과 비슷한 점이 있다. 배와 수레가 모이고 물산이 풍부하여 거의 임치(臨淄)의 부유함에 버금간다.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팔도에서 으뜸으로 울연히 웅대한 울타리와 큰 도회지가 된다. 게다가 전당(錢塘)의 아름다움을 겸하고 있어 승경을 택하여 누정을 만들고 날마다 노닌다. 이러한 일은 개이거나 비 오거나 꽃피는 달이거나 간에 사시의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국에 사신 가거나 나그네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과 시인과 문인으로 이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강남으로 일컫지 않는 이가 없다. 관암 홍경모(1774-1851)가 바라본 평양에 대한 풍경이다. 이는 곧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평양을 ‘기자의 고도’라는 점에 별다른 이의 없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에 대한 고증학적인 학문입장은 차치하더라도 평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15세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명승지로 계승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평양은 고조선, 고구려와 같은 역대왕조의 수도, 기자와 단군의 고장, 명승지, 조선 후기 상업의 중심지, 풍류의 도시 등 다양한 특성을 지닌 도시로 인식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각종 야담, 무용담 등의 문학작품에 단골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당대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반영하듯 부유하고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도시로 그려졌다. 이와 함께 평양을 그린 그림을 통해 평양의 전체적 모습과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대중의 수요 또한 증가하여 조선 후기에는 목판본으로 제작된 「평양성도 병풍」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평양성도」는 한양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와 함께 조선시대 가장 빈번하게 회화식 지도로 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많은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서지방이라 함은 평안도와 자강도 지역을 말하여, 중심도시는 역시 평양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은 단군의 도읍지로 출발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고장이다. 오랜 역사만큼 평양을 부르는 명칭 또한 다양하다. 성종 때 3경 제도에서 출발한 ‘서경’ 기자의 도성의 뜻을 지닌 ‘기성’ 기자와 관련된 ‘유경’등으로도 불린다. 즉 역사 도시로서 평양의 위상은 기자와 단군의 고장, 특히 기자가 우리 문명을 일으킨 곳이라는 데에 핵심이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태조는 평양에서 단군과 기자를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당시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라고 규정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평양은 몽고군의 침입이후 사회 경제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으로 인한 중국과의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대로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평안도는 정부의 통제력이나 향촌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에, 지리적으로 볼 때 중국과의 가까워 상업이 발달하게 됨과 동시에 경제적 변화가 급격한 지역이었다. 개성상인, 의주상인, 평양상인들은 이러한 대중무역으로 인해 신흥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19세기에는 서북의 지식인들 중 지배체제 밖에서 성장하거나 체제로부터 배척당하는 저항지식인의 존재가 점차 늘어나면서 하나의 사회적 범주를 이룰 정도가 되기도 하였다. 평양의 아름다움은 ‘연광정’과 ‘부벽루’로 표상된다. 특히 연광정에 대한 풍취는 명나라 사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후세에서도 꾸준히 회자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명승지는 번화하고 화려한 유흥의 도시로 손색이 없음은, 근대전환기에 나온 구활자본 애정소설 「약산동대」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충청도에 살고 있는 남주인공 송경필은 서북지방을 유람하고자 평양을 거쳐 영변에 도착하여 기생 빙옥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공간 배경이 평양을 빗겨갔지만, 평양의 명승지를 빼 놓지 않고 소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뿐 아니라 서북지방은 사대부 남성들에게 유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조선시대 모든 기생은 관기다. 『경국대전』에는 기생의 인원수와 충원 방식이 규정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기생 150명과 연화대 10명, 의녀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의 관비(官婢)중 나이 어린자로 선상(選上)하게 되어 있다. 그 후 연산군의 광적인 향락에 한 때 기생이 없어졌다가 다시 부활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생의 선상제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임란(壬亂)과 병란(丙亂) 두 전란일 것이다. 그 후 기생을 선상하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내의원, 혜민서에는 의녀가 있다. 또 공조와 상의원에는 침선비가 있다. 모두 관동 지방과 삼남(三南)지방에서 뽑아 올린 기생들이다. 잔치가 있을 때는 이들을 불러다가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내의원 의녀는 검은 비단의 가리마를 머리에 쓰고 기타는 검은 베의 가리마를 썼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들이 대거 축출된 후부터 관(官)에 소속된 연회 보조자로서의 기생의 위치는 대폭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외면상 자유로워진 기생들은 이번에는 각 조합으로 묶였고, 1914년부터는 조합이 권번으로 개편되어 서울에 한성, 대정, 한남, 경화의 네 권번이, 평양의 기성, 대동과 부산의 동래 등 지방 도시에도 대개 한두 개의 권번이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 후기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서지방의 공연을 통해 공연자의 연령대, 공연단의 구성과 규모, 공연단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읍지(邑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공연 문화사에서 가무를 전문적으로 익힌 외방여기가 궁중과 지방 관아에서 동시에 활동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외방여기가 관아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여 지방의 관변(官邊)문화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쌍방의 공연문화를 유통시키는 매개체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교방문화의 전통은 일제 강점기의 권번문화(券番文化)로 이어져서 오늘날 연행되는 정재(呈才), 가곡(歌曲), 가사(歌詞), 잡가(雜歌) 등의 전통 가무 종목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공연의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의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격식을 갖춘 공연이 이루어진 점, 대동강 등에서 선유놀음에 사용된 배의 종류가 15가지로 기술될 만큼 선상공연문화가 보편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몇 년 전에 번역된 한재락이 지은 녹파잡기(綠波雜記)는 뛰어난 기예를 자랑하는 평양 기생 66명의 진솔한 실제 이야기를 담았다. 내가 전에 평양에 갔더니 성인의 젊은이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현옥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현옥이 성도(成都)에 가는 바람에 한 번도 보지 못해 애석하게 여겼다. 5년 후 나는 다시 이곳에 놀러 왔는데, 대동강 배 안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다. 그때 선창에 있던 여러 기녀들이 곱게 단장하고 애교스러운 눈빛을 하며 아름다움을 다투었는데, 현옥만이 대충 연하게 눈썹만 그린 채 단정하게 물러나 앉아 있었다. 나는 대번에 그녀가 현옥임을 알 수 있었다..... 희임은 호가 반향당(伴香堂)이다. 눈썹은 그린 듯하고 눈동자는 선명하며, 머릿결은 검고 윤이 나며 뺨은 발그래하다. 성품이 얌전하고 온화하며 유순한 말씨가 부드럽다. 평계선생(平溪先生)이 사랑해서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선생은 서울로 돌아갔다. (중략) 그녀가 선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만했다. 희임은 가곡에 능하였으나 겸손하게 사양하여, 노래 잘 한다고 나선 적이 없다. 춤 솜씨도 평양에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높은 누대에서 춤을 다 출 때까지 지켜보았는데, 홀로 우뚝 서서 가볍게 몸을 놀리는 것이 놀란 기러기가 막 날아가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양은 눈치가 빠르고 훌륭한 노래와 뛰어난 춤이 쌍벽을 이루는 이름난 기녀이다. 전에 서울과 개성 사이에서 노닐 때 그 명성이 매우 자자했다. 내가 평양에 와서 세 차례나 찾아갔으나 세 번 다 외출하고 없어 낙담하고 나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청류벽(淸流壁) 아래에서 마주쳐 손짓하며 몇 마디 말을 나누었는데, 달 밝은 밤 연광정과 부벽루 사이에서 함께 놀자고 약속하고 총총히 헤어졌다. 저자는 위의 소개된 ‘현옥’ ‘희임’ ‘단양’이라는 실제 평양 기생과 대동강, 연광정, 부벽루 등의 평양의 모습을 소박하게 묘사하였다. 이 글에 소개된 인물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기생이 아닌 품위와 담백함이 묻어나는 기생들이다. 어쩌면 저자는 이러한 기생들을 선호하고 관심 있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피리와 가야금 연주를 잘 하는 현옥, 지기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희임, 노래와 춤을 잘 추는 단양에 대해 격식 없이 소소한 단상(斷想)들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 후기 실존했던 평양의 명기들일 텐데, 마치 기생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고전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을 연상케 한다. 특히 평양이라는 공간과 구체적인 명승지는 당대 남성들을 더욱 설레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즉 실제와 허구를 넘나들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고상하고 우아한 기생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한재락이 그린 평양 기생들의 모습은 대부분 수채화 빛깔이다. 명승지를 산책하다 만났을 때의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대동강 위에서 신나게 얼음을 지치는 ‘난혜’蘭蕙)의 모습을 통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던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생 진홍의 방을 묘사한 글의 분위기는 평양의 기방풍경이 변모하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복잡하기보다는 간소하며, 실내를 고담하게 차리고 문방도구와 서보(書譜), 화보(畵譜)와 몇몇 서책을 놓고, 향을 사르는 광경은 당시 경화세족(京華世族)이 누리던 최고급 문화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생활은 조선 후기 소품가들의 산문에서 지향하는 한 세계이며, 명대 산인(山人) 소품가의 글에서 흔히 보이는 세계이다. 그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기생들이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와 같이 평양이라는 공간은 모든 예술적 장르에서 소재적 원천을 제공하는 지형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강점기인 근대전환기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서사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평양기생 학교에서 배출되는 기생들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평양의 예술적 분위기에 유흥의 핵심인물인 평양기생 또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평양기생은 용모와 노래, 춤 등의 기예뿐만 아니라 시(詩,) 서(書), 화(畵)에도 능하여 많은 유명 문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평양 기생들이 여흥을 돋우기 위해 부른 노래, 춘 춤,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싸고 장단을 맞춰 행해진 악공들의 악기연주는 평양의 유흥적 이미지와 함께 예술적 흥취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를 거쳐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면서 평양은 역사, 단군왕검의 유적보다 예술과 유흥의 공간으로 대중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평양은 가장 재주 많고 아름다운 명기들이 삶의 터전을 잡고 있는 곳이기에 남성들에게는 지형 자체가 유혹적이며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고도(古都)의 명승지를 유람한다는 1차적 명분으로 평양을 향하게 되고, 그 의중에는 유희의 중심에 있는 기생과의 만남을 기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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