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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행길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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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길 반년 만에 압록강을 건너 우리 땅으로 돌아오다
사신단 일행은 수레의 짐이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일제히 도달했으므로 아침에 드디어
책문(柵門)
을 나오는데,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과 세관(稅官)ㆍ책문 어사(柵門御史) 등의 관원이 아문(衙門 : 관청)에 나앉아, 책문에 들어갈 때처럼 연경에서 가지고 오는 짐들을 풀어 대략 검열했다.
세 사신 일행이 차례로 나왔는데,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여 마치 새가 조롱에서 나온 것 같았다. 다만 서장관은 다음
호시(互市)
를 검찰하기 위하여 책문 밖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책문 화물(貨物)이 나온 후에 비로소 가게 되므로, 책문 밖 산기슭 밑에 구덩이를 파고 천막 치기를
구련성(九連城)
과 총수산(蔥秀山)에서와 같이 해야 한다.
정사(正使)
와 부사가 저녁때가 되어 먼저 출발하였는데, 만 리 길을 갔다 오다가 누구는 가고 누구는 처지는가 하는 감회가 없지 않았다. 나는
경박(景博)
과
비포관(比包官)
및 세
역관(譯官)
과 따로 큰 천막을 서로 바라보이는 땅에 치고 있었는데 천막 밖엔 뭇 봉우리가 나열해 있고, 긴 내가 띠와 같이 둘려 있다. 드디어 뒤 등성이에 올라가 한참 바라보니 또한 한 차례의 기분풀이가 될 만하였다.
의주 상인 및
세마 구인(貰馬驅人)
의 무리가 떠들어 대며 책문 밖에다 모두 천막을 쳐 서로 연달아 솥을 걸고 불을 피우니 마치 행군(行軍)의
보루(堡壘)
와 같았다. 밤중에
창군(槍軍)
이 곧 호각을 불어 범을 쫓아 주었다.
다음날 흐리다가 부슬비가 내렸다. 책문 밖에서 노숙하였다. 내가 있는 큰 천막이 산과 접했는데, 이는 상룡산(上龍山)에서 뻗은 등성이다. 내가 시험삼아 올라가 조망(眺望)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만류하기를, ‘만약 이 산에 올라가면 비바람이 크게 일게 되니 이렇게 노숙할 때를 당해서는 진실로 바람을 불러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나, 세속의 꺼림에 못이겨 드디어 중지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만부(灣府, 의주)의 군교와 나졸들이 앞 내에서 그물질하여 큰 물고기가 광주리에 그득하기로 주방 종을 시켜 끊어서 회치게 하여 한 차례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부슬비가 내렸다. 책문 밖에서 떠나 온정리(溫井里)까지 52리를 가서 노숙했다. 만부(灣府, 의주) 상인들이 서로 물건을 사 가지고 이제야 실어 내므로, 아침 때에 드디어 떠났다. 책문 밖부터는 길이 본래 질척거리는 데다가 거듭 밤에 비가 와 진흙물이 넘치므로 가끔가끔 건너가기가 험악함이
영안교(永安橋)
와 난니보(爛泥堡)를 지날 때와 같았다.
온정평(溫井坪)까지 왔으나 해가 아직
포시(晡時)
도 안 되었기로 드디어 냇가까지 걸어가 보니, 들 지형이 펀펀하여 먼 데다가 여러 산의 경치가 어리비치었다. 온정은 길 근방에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물 가닥이 여러 갈래인데 물줄기에서 게눈 같은 거품이 솟아나 더운 기운이 후끈후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목욕하기에 나도 또한 우물로 가 발을 씻었다.
냇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이 맑은 데다가 얕아서 낚시 밥을 무는 고기가 하나도 없었다.
11일 구련성(九連城)을 지나오니 만부(의주)의
성가퀴
는 벌써 눈에 들어오는데
통군정(統軍亭)
이 아득하게 높이 솟아 보인다. 또한 동북쪽의 여러 산을 보니 그 일대가 아물아물 아득한데, 문득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
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이르러 조선 땅의 산이 구름 속에 출몰하는 것을 바라보며 군사들과 맹서하여 용기를 고무시키되 말이 매우 강개(慷慨)하였던 것을 회상하니 사람의 비장한 의기를 더하게 하였다.
애하(愛河) 이후부터는 가끔가끔 두견꽃과 나물꽃을 볼 수 있어 붉은색과 푸른빛이 서로 엇갈렸다. 해가 포시(晡時)나 되어 세 번 물을 건너 압록강에 이르니, 물이 얕고 바람이 많으므로 사공들 10여 명이 모두 물로 들어가 배를 끌어당겨 지나왔는데, 만윤(灣尹 의주 부윤)이 벌써 나와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 남문으로해서 들어가
향사당(鄕社堂)
에 처소를 정하였다. 반년 동안의 지난 일을 회상해 보니, 아득히 꿈 한 번 꾼 것 같았다. 서울이 아직도 천 리나 떨어져 있으나 한번 만강(灣江 압록강)을 건너고 나니 바로 우리나라 땅이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4-03-08 ~ 1804-03-1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5호
웹진 담談 14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국경 호시
책문후시는 조선 후기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책문(柵門)에서 조선과 청나라사이에 행해졌던 사무역이다. 중강후시(中江後市)가 혁파될 무렵인 1660년(현종 1)부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이 내왕하는 기회를 이용, 요동의 차호(車戶)와 의주·개성의 상인들 사이에 통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상인(私商人)이 역관의 노자·마부로, 또는 지방 관아의 무역별장(貿易別將) 등으로 대청무역에 참여하는 기회를 포착하기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그 수 또한 얼마되지 않아, 대다수의 사상인이 참여할 수 있었던 방법은 여마제(餘馬制)나 연복제(延卜制)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개성 상인을 비롯, 황해도와 평안도의 많은 사상인들이 대청무역에 침투할 수 있었던 기회는 사행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 여마나 연복에 끼어드는 방법이었다. 여마는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이르는 도중, 세폐·방물을 실은 마필이 패상(敗傷)할 경우를 고려해 의주부에서 따라 들려 보내는 10여 필(匹)의 공마(空馬)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여마는 사고가 없는 한 책문에서 회환(回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여마제는 날이 갈수록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점차 그 수가 증가되고, 사상인의 책문무역에 하나의 좋은 기회로 변모해 갔다. 때문에 그 폐해도 점차 늘어나 사상인의 여마제 편승은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여마제가 사상인의 책문무역으로 이용되고 있을 무렵, 연복제 또한 사상인의 참여에 좋은 기회가 되고 있었다. 연복제는 연경에서 귀환길에 오른 사행이 책문에 당도하면 의주부가 공마를 입송시켜 양외의 복물(卜物)을 운반하게 한 것으로 단련사(團練使)의 귀환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상인은 이 연복마(延卜馬)의 입책(入柵)에 편승, 책문무역에 참여했는데 이 또한 폐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폐단은 사신이 먼저 출책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오히려 만상(灣商 : 우주상인) 및 송상(松商 : 개성상인) 등 사상인과 청나라 난두배(欄頭輩)와의 결탁 및 조정에 의해서였다. 난두배는 1690년(숙종 16)에 출현한 요봉차호(遼鳳車戶) 12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만상·송상 등 사상인들은 이들과 결탁, 사행의 귀환 중에 복태(卜駄)의 운송을 고의로 지연시키면서까지 사신을 먼저 출책하게 하여 탄압을 없게 한 다음, 마음껏 매매하고 돌아오는, 곧 연복제에 편승한 책문무역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책문무역은 부연사행(赴燕使行)의 왕환(往還) 과정에서 역관과 결탁한 일부 상인, 그리고 지방 관아의 무역별장들 및 여마제·연복제에 편승한 대다수의 사상인들이 감행해왔던 것이다. 적어도 연간 4, 5차는 열렸으며, 1차의 유출은량(流出銀量)만도 10만 여 냥에 달하였다. 그러나 책문무역은 양국 간에 공인된 정기적인 상행위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측의 경우에도 팔포(八包) 정액에 의한 무역보다는 사상인의 비합법적인 잠무역(潛貿易)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통칭 후시(後市)라 하였다. 또한 그것이 책문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책문후시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707년 책문후시가 사상인에게 개방된 뒤 청나라의 상품이 이들에 의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이것이 국내 상조직(商組織)을 통해 도회지뿐만 아니라 농촌의 향시(鄕市)를 통해 심산궁곡(深山窮谷)까지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관의 국내 판매는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에 이르게 되자 역관들은 사상인의 무역로를 봉쇄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실현 방법으로서 사신을 통한 사상무역 봉쇄의 정당성을 조정에 반영시킴으로써 1725년(영조 1) 연복제에 편승한 사상인의 책문무역은 중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지방 관부의 무역별장에 의한 심양팔포 무역과 단련사 제도를 1728년에 혁파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책문무역, 곧 사상인의 대청무역은 완전히 봉쇄되고 다시 원점으로 환원되어 대청무역은 부연역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역관에 의해 사상인의 대청무역이 완전히 봉쇄되자 손해를 입게 된 각 관아와 상인들의 반발이 끝없이 나왔지만, 이에 대한 조정의 대처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의 국내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과 사상인의 성장은 대청무역을 쉽게 중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수출입 상품의 마태(馬駄)가 드나들던 책문후시가 막히자, 이제 사상인들은 법금(法禁)을 무릅쓰고 국경 지대나 해안선에 접근해 밀무역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유명한 밀무역 장소는 압록강변의 의주·강계(江界)·초산(楚山)·창성(昌城)·삭주(朔州)·위원(渭原)·벽동(碧潼) 등 강변 칠읍(江邊七邑)과 이산진(理山鎭)·고산진(高山鎭)·만포진(滿浦鎭)을 비롯한 서해안과 회령 등지였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수출품은 금·인삼·종이·우피(牛皮)·명주·저포(苧布)·모물(毛物)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당목(唐木)·약재·보석류·문방구·신발류 등이었다. 사상인들의 대청무역이 비합법적인 잠상 행위로 전환되자, 조정은 범월(犯越) 사건이 우려될 뿐 아니라 재정적인 손실도 컸다. 때문에 1754년에는 ‘만부(灣府:義州府)의 탕채(蕩債)와 변민(邊民)의 요활(聊活)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연복에 의한 책문무역을 비로소 공인하였다. 이 책문무역은 사상 중에서도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만상후시라 불렸다. 그리고 역관에게 허여한 팔포정액과 구분해 만상에게 허여한 사무역의 한계인 무역 정액을 만포(灣包)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상인에 의한 만상후시가 성행하자 또 다시 상리(商利)를 잃게 된 것은 역관이었으므로 역관들의 반발이 컸다. 이리하여 1787년(정조 11) “역관을 없애지 않으려면 후시를 마땅히 없애야 한다.”고 결의, 드디어 이해에 만상후시를 혁파하게 하였다.
원문정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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