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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물을 팔아도 감당이 안 되는 세금,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다
1624년 7월 22일, 세곡을 독촉하는 관청의 명령이 매우 급박하였다. 세곡선(稅穀船)에 싣고 받은 자문[尺文]을 이달 26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형문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어찌 된 일인가. 김령은 얼마 후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이신승(李愼承)이라는 자가 한탄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세미(稅米)를 마련할 방법은 없고, 햇벼는 아직 익지 않아 일초가 급하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제기(祭器)를 팔아 마련하려고 했는데, 선뜻 사주는 사람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함께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다. 큰 기근이 든 해에 보릿단지도 텅 비었고, 벼는 수확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세곡을 내라고 재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거꾸로 매달린 듯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방납(防納)하듯, 어떤 자는 면포를, 어떤 자는 옷가지를, 또 어떤 자는 쓸만한 기물을 가져왔고, 심지어 어망, 밀[蜂蠟], 기타 자질구레한 물건 등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덕여는 은어 몇 마리가 면포 몇 필 값이 나가는 것으로, 베 몇 자가 쌀 몇 말 값이 나가는 것으로 그 수량을 계산해서 부쳤다. 서촌의 윤동빙은 면포 10여 필에 해당하는 값의 대두(大豆)를 팔 곳이 없어 겨우 3필만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어떤 자는 청동으로 만든 큰 화로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60~70필 정도의 값어치인데도 겨우 몇 필만 주려고 하기도 하였다. 부인의 비단옷을 기생에게 팔려고 하였지만 팔 수 없는 자도 있었다. 하늘에서 굽어본다면 분명 애달플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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