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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눈물

우인수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금동이에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도다.

1625년 4월 6일 경상도 예안의 어느 목화밭. 목화씨를 뿌린지 하루 만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목화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곧 다가올 요역과 부세에 망연자실한 백성관련 스토리 보기

춘향전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다. 변사또가 이웃 고을 수령들을 초청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신분을 감춘 이몽룡이 나타나 술 한 잔 얻어먹으면서 넌지시 던진 것이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참석자였다면 심상찮은 분위기를 예감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을 터였다. 이런 수준 있는 시를 즉석에서 읊은 것을 보면 이몽룡은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런 그를 단박에 알아보고 사귄 춘향이도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 읽다 보면 마냥 시의 절묘한 대구(對句)에 감탄만을 할 수는 없게 된다. 이보다 세금의 본질과 수탈의 절박성을 간결하게 잘 표현한 글이 있을까싶다. 세금은 백성의 피요 기름이고, 과도하거나 부당한 수탈은 백성을 눈물짓게 하며, 그 눈물이 잦아지다 보면 원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원성이 커져 한계치에 다다르면 폭발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각종 항쟁이나 민란이 이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춘향전은 당시의 분위기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지닐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그런데 옛 사람이 남긴 각종 일기에는 세금의 고통과 관련된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다. 경상도 예안 고을의 지식인으로 『계암일록』이라는 일기를 남긴 김령은 세금으로 고통 받던 고을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계암일록』에는 세금을 독촉하는 관청의 성화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익지 않은 햇벼 대신에 집에 있는 각종 기물이라도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나온다. 급하게 팔려하니 제 값까지 받지 못하는 탓에 이중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었다. 이와 함께 제사에 사용하는 놋그릇 제기를 들고 나왔으나 그나마 살 사람을 구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 보통 때 같으면 면포 10여 필은 받을 콩을 단 3필을 받고 팔 수 밖에 없는 사람, 베 60~70필 정도의 값어치가 나가는 청동으로 만든 큰 화로를 겨우 몇 필에 흥정하는 사람, 부인의 비단옷을 기생에게 팔려고 가지고 나왔으나 팔지 못한 사람 등 가지각색의 안타까운 사연을 적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듣고 지켜보던 김령은 백성들이 모두 거꾸로 매달린 듯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면서 “백성의 곤핍함이 어찌 이 같이 심할 수 있는가. 하늘이 필시 굽어본다면 애달파할 것이다.”라면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 어찌 예안 한 고을에만 국한된 현상이었겠는가?
어떤 때는 경상도관찰사가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세금의 납부 기한을 가을 곡식이 익은 후로 물려주기를 허락하였으나, 그 아래의 도사(都事)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독촉하고, 현감은 오직 상부의 명령만을 두려워하여 기한을 정해 독촉하는 상황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비록 위에서는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보였지만, 아래에서 그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을 때도 빈번했던 것이다.

조선의 국가 재정은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달되었다. 수취제도의 기본을 이룬 것은 농사짓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조(田租),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는 군역(軍役), 군현 단위로 특산물을 거두어들이는 공납(貢納) 등이었다. 한번 정해진 수취제도는 세월이 흘러 상황이 바뀜에 따라 운영상에 갖가지 폐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당당한 문명국가인 조선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공평한 과세를 위해 어찌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시행된 영정법(永定法)이니, 균역법(均役法)이니, 대동법(大同法)이니 하는 것들이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처들을 취한다고 해서 수취와 관련된 각종 문제점을 일거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전조는 조선 초에 1결에 30두(斗)를 거두게 하여 수확의 1/10에 해당되었다. 그 후 세종대를 지나면서 더 경감되었고, 영정법에 의해서는 1결당 4두까지로 경감되었다. 그러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각종 부가세와 수수료가 첨가되어 1결당 많게는 100두를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역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 60세 미만의 양인 장정이 병농일치의 원칙에 입각하여 지는 역이었다. 조금 지나서는 군역의 대가로 1년에 군포(軍布)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영조대에는 이를 1필 내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상당히 경감시켜 주었다. 하지만 군포 징수를 둘러싸고 자행되던 각종 폐습까지 없애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혜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는 경우에는 도망간 사람의 몫을 친척이나 이웃에게 부담시키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 어린아이를 장정으로 편입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심지어 죽은 자에 대하여도 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이 대표적인 악습이었다.

자문 - 세금을 받고 교부하는 조선시대 영수증서관련 스토리 보기

조선 후기 최고 학자로 칭송받는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군포 징수와 관련하여 어떤 부녀자로부터 들은 비참한 이야기를 시로 써서 전하고 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한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미 사망한 시아버지와 갓 태어난 아이가 부당하게 군포 징수의 대상이 되어 그 대가로 소를 빼앗긴 데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 시 <애절양(哀絶陽)>은 너무도 참혹하여 차마 전문을 다 전하지는 못하고 일부만 옮기기로 한다.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할아버지·아들·손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
급하게 (고을 원님에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이정(里正)은 으르렁대며 (군포 대신) 마구간 소 몰아가네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세납으로, 각 고을을 단위로 하여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을 그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고 거두어서 바쳤다. 공납은 현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저장과 운반에 어려움이 많았고, 이를 계기로 이른바 방납(防納)이라는 부정이 행해져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공납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광해군 때부터 시행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현물 대신에 쌀로 거두게 하고, 세금 부과 단위를 토지 단위로 바꾼 것이 핵심 내용이다. 지주의 반대가 심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는 약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일반 농민에게는 도움이 된 제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대동법의 실시로 현물을 내는 것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진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진상은 각 도(道) 단위로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등이 임금에게 조달하는 것이었다. 진상은 형식상으로는 각 도가 그 단위였으나, 실상은 각 주현(州縣)에서 모든 물품을 분담하였으므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외관(外官)이 임금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세금의 한 가지였던 공물(貢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현존하는 일기에는 특히 진상과 관련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이 실려 있어 주목된다. 아마 일반적인 세금과 관련된 문제들은 이미 일상화되어 있던 탓에 일기에 특별히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진상물 중에서도 은어나 청어와 같이 신선도가 요구되는 생선류는 제 때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애를 먹는 물품이었다. 그럴 경우에는 다른 지방의 것을 비싼 값으로 사서 보내야 하였다. 악천후 속에서 무리하게 조업을 강행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선조대에 대구부사를 지낸 권문해도 진상품 중에서 특히 은어로 인해 매년 초조해 하였다. 작년에는 대구 인근에서 은어를 잡지 못해 결국 상주에서 잡아온 것으로 대체하였고, 올해도 밀양과 청도에서 어렵게 구하여 기한에 맞추어 보낼 수 있었다. 그 걱정과 근심을 자신의 일기인 <초간일기>에서 특기하고 있다.

영조대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조재호는 10월 초부터 진상할 청어를 잡기 위해 여러 고을에 명을 내려 대대적인 청어잡이에 나섰다. 그물을 쳤으나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이 와중에 고성현에서는 4명의 어부가 무리하게 청어잡이에 나섰다가 광풍을 만나 배가 뒤집혀서 모두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가 났다. 결국 조재호는 기한에 맞추어 청어를 진상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죄하는 장계를 여러 차례 올려야 하였다. <영영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앞에 나온 예안 고을의 김령은 경상도에 할당된 고사리 진상으로 인한 예안현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관찰사는 안동에는 고사리 40단을 할당한 데 비해 예안에는 20단을 할당하였다. 고을의 규모로 보면 예안은 안동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안동의 절반에 해당하는 과도한 부담을 지운 것이다. 이 형평성을 잃은 관찰사의 행정 처사에 대해 김령이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관찰사인 류영순을 겨냥하여서 “분별없고 도리에 어긋나며 우매하게 백성을 해치니, 그가 하는 짓이 모두 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오래 재임하고 있어 폐단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라고 퍼부었다.

수취 문제는 일단 제도가 좋아야 하고, 다음은 그 제도를 시행할 관리가 청렴해야 한다. 제도가 좋지 않다면 관리가 아무리 청렴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며, 제도가 비록 좋더라도 관리가 청렴하지 않으면 그 실효를 기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두 가지 모두에 문제가 있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된다. 여기에 조선시대 행정의 구조적인 문제가 첨가되어 있었다. 백성과 직접 접촉하면서 공무를 담당하는 향리에게는 복무의 대가로 지급하는 국가 차원의 녹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마냥 수탈 금지만을 강조하기 어려운 측면이 애초부터 배태되어 있었다.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하면서 견디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부는 마을을 떠나 화전민이 되어 산 속을 전전하였고, 일부는 도적떼로 화하였기도 하였다. 드디어 1862년(철종 13) 임술년 한 해 동안 전국의 70여 개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전정·군정·환곡 즉 삼정(三政)의 문란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세금으로 인한 백성의 눈물이 분노로 바뀌어 마침내 민란으로 폭발한 것이다. 조선은 급격히 쇠락해갔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중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 수탈에 저항하는 장면.
1862년 2월 19일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임술 민란)를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로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13년, 힘 없는 백성의 편이 되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적 무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작가소개

우인수
우인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후기 정치사를 전공하여 산림과 영남 남인에 대해 주로 연구하였으며, 아울러 생활사와 지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산림세력연구>, <조선시대 울산지역사연구>, <(국역)부북일기>,
<문무의 길, 영덕 박의장 종가>, <조선 서원을 움직인 사람들>(공저) 등이 있다.
“목화밭에 씨뿌리자 장대비가 내리다- 손쓸 계책 없는 백성들의 삶”

손쓸 계책 없는 백성들의 삶 김령 <계암일록>, 1625-04-06
1625년 4월 6일, 일찍 시작된 장마에,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지루한 장마는 보리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목화에 더욱 해가 되었다. 4월 4일에서 5일, 이틀에 걸쳐 농가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심었는데, 목화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심자마자 비가 오는 것이다. 1623년과 1624년에도 목화가 금처럼 귀했는데, 이처럼 올해 또 심자마자 비가 내리니 김령은 백성들의 삶이 걱정되었다.

“기물을 팔아도 감당이 안되는 세금,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다”

자문 자문[尺文] : 조세·부과금·수수료 등을
받고 교부하는 조선시대 영수증서
김령 <계암일록>, 1624-07-22
1624년 7월 22일, 세곡을 독촉하는 관청의 명령이 매우 급박하였다. 세곡선(稅穀船)에 싣고 받은 자문[尺文]을 이달 26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형문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어찌된 일인가. 김령은 얼마 후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이신승(李愼承)이라는 자가 한탄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은어(銀魚)를 진상하라”

은어 권문해 <초간일기>, 1587-08-01 ~
1588-06-13
1587년 8월 1일, 대구부사 권문해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공납(貢納)해야 할 진상품을 챙기느라 바쁘다. 1584년 대구부사로 부임한 이후 올해로 4년째 매년 해오는 일이지만 공납일이 다가오면 늘 걱정과 근심이 생긴다. 특히 공납품 중에 하나인 ‘은어(銀魚)’를 챙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은어가 한 마리도 없고 민간에서도 거두지 못하여 진상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상주에서 올라온 은어(銀魚)와 식염(食鹽) 그리고 목면과 필을 겨우 챙겨 진상할 수 있었다.
1588년 6월 9일, 올해도 역시 은어가 문제였다.

“진상을 위해 청어를 잡으러 가다가광풍에 배가 뒤집혀 4명이 죽다”

은어 조재호 <영영일기>, 1751-10-19 ~
1751-11-04
1751년 11월 4일, 삭선진상품(朔膳進上品)인 생청어를 잡기 위해 10월 초부터 각 읍의 어선을 거느리고 해구(海口)의 여러 곳에서 밤낮으로 그물질하였지만 날씨가 푹한 까닭에 전혀 자취가 없었다. 더욱 독촉하여 기일에 맞춰 봉진하라고 하였으나, 진해에서도 물고기의 자취가 계속 묘연하다고 하였고 마침내 끝내 잡지 못하여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게 된다.
이 와중에 10월 19일, 고성현 남촌면에서 생청어를 잡으러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광풍에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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