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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말 탄 기녀가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다

-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벌인 잔치 -

삽화 정용연


1539년 8월 9일, 맑음.


사신단 일행은 일찍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에 도착하여 차를 마신 뒤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렀다. 감사 김인손(金麟孫)이 정자선(亭子船)을 내어 맞이하고 풍악을 울리며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또 배 2척에 기생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악기를 실어서 가운데 배의 음악이 그치면 다른 두 배에서 음악이 연주되어 번갈아 가며 음악을 울렸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례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윤(庶尹)과 판윤(判尹)도 술을 돌렸다. 밤이 다 가도록 술을 마시고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감사ㆍ주청사ㆍ동지사 등 모두 가마를 탔다. 기녀가 말을 타고서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악공들은 걸어가며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이다.

길에서 다시 술잔을 돌렸다.
대동관(大同館)에서 잤다.
부사(副使)가 황주의 기녀를 싣고 왔다.



1539년 8월 10일, 맑음.


아침에 걸어서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 명나라 사신의 시를 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또 배를 탔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저녁에 거피문(車避門)에 도착하였다. 영귀루(詠歸樓)에 올라가서 또 술자리를 베풀어 초저녁에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왔다. 풍악을 울리며 길을 인도하기를 어제처럼 하였다. 재상 어사(災傷御使) 이조 정랑 임호신(任虎臣)이 중화에서 와서 함께 배를 타고 동행하였다.


1539년 8월 11일, 맑음.


감사는 제삿날 재계(齋戒)하느라 나오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연광정(練光亭)에서 재상 어사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작별하였는데, 찰방 및 서윤 김정신(金鼎臣)과 판관 황승헌(黃承憲)이 동참하였다. 대교(待敎) 이홍남(李洪男)이 와서 들렀으나 상(喪) 중이기 때문에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자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술을 마신 뒤 대동문(大同門) 풍월루(風月樓)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539년 8월 12일, 맑음.


오후에 감사가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동지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술자리를 나갔다.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1539년 8월 13일, 맑음.


아침을 먹고 나자 감사가 나와서 대청에 술을 내와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고, 배웅하러 대동문(大同門) 안까지 뒤따라 나왔다.




말 탄 기녀가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다 -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벌인 잔치
  • 출전 : 조천록(朝天錄)
    조천록은 권벌(權橃)이 1539년 7월 17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연경(燕京)에 다녀 온 기록
  • 저자 : 권벌(權橃, 1478~1548)
    본관은 안동, 호는 충재(冲齋). 성균생원 사빈(士彬)의 둘째 아들이다. 1468년(연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예조참판겸동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 시기 : 1539-08-09 ~ 1539-08-13
  •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조선 시대 지방관의 사신단 접대


연행 사신이 한양에서 출발하여 의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숙식은 길가에 있던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서 해결하였다. 한양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정사, 부사, 서장관(삼사) 이하 역관에 이르기까지 사행단의 상층부 중심인물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숙식에 따르는 문제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국가의 공적 임무를 띠고 사는 사신이므로 각 관청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예전(禮典)」의 빈객조(賓客條)에 중국의 칙사나 우리의 사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공궤(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관(官)이나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요란하게 접대하였던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삼사는 고위 관료 혹은 종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행 여정의 중도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들이 홀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또 학연이나 인척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정해진 객관이나 기타 특별한 장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연도의 수령은 물론, 근처의 다른 수령까지 와서 문안을 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의주까지의 도착은 대체로 한 달이 소요되었으므로 일정도 그렇게 촉박하지 않아서 연행 사신으로서 고달픔을 느끼기보다는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홍제원(弘濟院)에서 공식적 송별연을 가진 이후에 본격적인 사행이 시작되지만, 한양과 의주 사이에 있던 객관은 객관끼리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 피로나 긴장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행기록 중에서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 이 부분은 여행하는 사람의 가벼운 심경이 느껴질 정도로 그 호흡이 가볍다. 잘 차린 음식, 기생 및 장교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의주부윤의 송별연을 뒤로하고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행의 길이 시작된다. 이들에 대한 수령들의 접대에는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사신단 호위 무관 박생의 기록은 이 같은 실정을 잘 반영한다. 중국 사행 후 귀국 여정에서 평안도 관찰사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 박생은 지독히 여색을 밝혀 일행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 의주까지 갈 때는 각 고을에서 적절한 대접을 받았지만 중국 땅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식자재를 받아서 취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식자재들이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부실하기 짝이 없어 우리의 식품들을 가지고 가야 했고,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의 관문인 책문(柵門)까지 120여 리 땅은 두 나라의 접경지역으로 민가도, 아무 시설도 없어서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통이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에게 오는 사신 접대는 “칙사(勅使)대접하듯”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융숭한 대접을 했건만 그쪽에서는 지방관들이 마지못해 중앙의 지시에 따르는 체하지만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사행단(使行團)의 숙소가 겨울에도 난방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찢어진 창호도 바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우리 선발대가 미리 가서 문도 바르고 청소도 해야 했다고 하니 그 굴욕을 어찌 다 견디었을까? 연경에 도착하면 호부(戶部)에서 식량을 제공하고 공부(工部)에서 시탄(柴炭), 마초(馬草), 그릇을 제공하며 광록시(光祿寺)에서 각종 찬거리와 음료, 과일 등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는 품질이나 양이 좀 나아서 사행단(使行團)으로서의 대접을 받은 듯하다.





작가 소개

삽화 : 정용연
정용연
작가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이 있고 현재는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출간 준비중
“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이 일찍이 연(燕)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어서각(御書閣)’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봉림대군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충무사(忠武祠)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8-04 ~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평양성에 승전보가 울려퍼지다! 비밀리에 묻은 선왕의 신주를 찾아라”

『평안도변성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탁, 피난행록,
1593-01-07 ~ 1593-01-10

1593년 1월 7일, 왕세자 광해는 아픈 몸을 이끌며 정사(政事)를 돌보았다. 내의원 의관들은 매일이다시피 왕세자와 세자빈의 몸 상태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분조(分朝)에 들렸다. 다음 날인 1월 9일에는 조·명연합군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매우 큰 승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평양성과 평양성 부근에 토굴을 쌓거나 뚫어 은거한 적들까지도 평양을 탈출하여 도망갔다는 기별이 들렸다. 정말이지 조선은 이 전쟁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왕세자가 이끈 분조에서도 소식을 듣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전 왜적들의 공격으로 평양성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에 있는 선왕들의 신주와 영정들을 너무나도 급하여 비밀리에 평양에 묻게 한 것이다. 이를 묻은 사람은 송언신(宋言愼)이었다. 따라서 송언신만 신주와 영정을 묻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빨리 송언신을 데려와 선왕의 신주와 영정들을 발굴해야만 하였다. 분조에서는 대조(大朝)에 이를 고하여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함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 평양 주위의 왜적들은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적들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군사의 일부분을 차출하여 함경도의 적들을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역시 왕세자에게 왕세자를 호위하던 정예병 300명을 뽑아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자는 장계를 올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았다.

“꿈속의 그곳, 흠모하던 도산서원을 찾아 평양에서 내려온 유생들”

김령, 계암일록, 1625-04-20 ~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갰다. 평양(平壤) 유생 아무개가 그의 동료 두 사람을 데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흠모하여 걸어서 서원까지 왔으니, 정성이 독실할 만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해보려 했으니, 또한 먼 지방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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