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단 일행은 일찍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에 도착하여 차를 마신 뒤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렀다. 감사 김인손(金麟孫)이 정자선(亭子船)을 내어 맞이하고 풍악을 울리며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또 배 2척에 기생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악기를 실어서 가운데 배의 음악이 그치면 다른 두 배에서 음악이 연주되어 번갈아 가며 음악을 울렸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례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윤(庶尹)과 판윤(判尹)도 술을 돌렸다. 밤이 다 가도록 술을 마시고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감사ㆍ주청사ㆍ동지사 등 모두 가마를 탔다. 기녀가 말을 타고서 횃불을 잡고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악공들은 걸어가며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이다.
길에서 다시 술잔을 돌렸다.
대동관(大同館)에서 잤다.
부사(副使)가 황주의 기녀를 싣고 왔다.
아침에 걸어서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 명나라 사신의 시를 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또 배를 탔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저녁에 거피문(車避門)에 도착하였다. 영귀루(詠歸樓)에 올라가서 또 술자리를 베풀어 초저녁에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왔다. 풍악을 울리며 길을 인도하기를 어제처럼 하였다. 재상 어사(災傷御使) 이조 정랑 임호신(任虎臣)이 중화에서 와서 함께 배를 타고 동행하였다.
감사는 제삿날 재계(齋戒)하느라 나오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연광정(練光亭)에서 재상 어사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작별하였는데, 찰방 및 서윤 김정신(金鼎臣)과 판관 황승헌(黃承憲)이 동참하였다. 대교(待敎) 이홍남(李洪男)이 와서 들렀으나 상(喪) 중이기 때문에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자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술을 마신 뒤 대동문(大同門) 풍월루(風月樓)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에 감사가 쾌재정(快哉亭)에 올라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동지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술자리를 나갔다.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아침을 먹고 나자 감사가 나와서 대청에 술을 내와 잔치를 베풀어 작별하고, 배웅하러 대동문(大同門) 안까지 뒤따라 나왔다.
연행 사신이 한양에서 출발하여 의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숙식은 길가에 있던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서 해결하였다. 한양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정사, 부사, 서장관(삼사) 이하 역관에 이르기까지 사행단의 상층부 중심인물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숙식에 따르는 문제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국가의 공적 임무를 띠고 사는 사신이므로 각 관청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예전(禮典)」의 빈객조(賓客條)에 중국의 칙사나 우리의 사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공궤(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관(官)이나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요란하게 접대하였던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삼사는 고위 관료 혹은 종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행 여정의 중도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들이 홀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또 학연이나 인척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정해진 객관이나 기타 특별한 장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연도의 수령은 물론, 근처의 다른 수령까지 와서 문안을 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의주까지의 도착은 대체로 한 달이 소요되었으므로 일정도 그렇게 촉박하지 않아서 연행 사신으로서 고달픔을 느끼기보다는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홍제원(弘濟院)에서 공식적 송별연을 가진 이후에 본격적인 사행이 시작되지만, 한양과 의주 사이에 있던 객관은 객관끼리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 피로나 긴장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행기록 중에서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 이 부분은 여행하는 사람의 가벼운 심경이 느껴질 정도로 그 호흡이 가볍다. 잘 차린 음식, 기생 및 장교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의주부윤의 송별연을 뒤로하고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행의 길이 시작된다. 이들에 대한 수령들의 접대에는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사신단 호위 무관 박생의 기록은 이 같은 실정을 잘 반영한다. 중국 사행 후 귀국 여정에서 평안도 관찰사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 박생은 지독히 여색을 밝혀 일행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 의주까지 갈 때는 각 고을에서 적절한 대접을 받았지만 중국 땅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식자재를 받아서 취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식자재들이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부실하기 짝이 없어 우리의 식품들을 가지고 가야 했고,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의 관문인 책문(柵門)까지 120여 리 땅은 두 나라의 접경지역으로 민가도, 아무 시설도 없어서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통이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에게 오는 사신 접대는 “칙사(勅使)대접하듯”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융숭한 대접을 했건만 그쪽에서는 지방관들이 마지못해 중앙의 지시에 따르는 체하지만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사행단(使行團)의 숙소가 겨울에도 난방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찢어진 창호도 바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우리 선발대가 미리 가서 문도 바르고 청소도 해야 했다고 하니 그 굴욕을 어찌 다 견디었을까? 연경에 도착하면 호부(戶部)에서 식량을 제공하고 공부(工部)에서 시탄(柴炭), 마초(馬草), 그릇을 제공하며 광록시(光祿寺)에서 각종 찬거리와 음료, 과일 등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는 품질이나 양이 좀 나아서 사행단(使行團)으로서의 대접을 받은 듯하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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