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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넌 사신단, 중국인들이 차지한 위화도 땅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품다
1599년 9월 12일, 날씨는 추웠지만 바람은 조금 그쳤다. 조익(趙翊)을 비롯한 사행단의 일원들과 어제 사행단을 전별하려던 사람들은 다시 압록강가에 모여 배에 올랐다. 선상에서 다시 사행단의 전송 연회가 열렸다. 배는 서서히 서쪽 중국쪽 강가로 향해 움직여 나아갔고,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측 강가에 도착했다. 전송 연회를 베풀어 주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강안(江岸)에 도착하여 3~4리 쯤 가니 작은 협곡의 강이 있었다. 그곳에는 중국 상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었으며 배 역시 꼬리를 물고 있어 사행단은 시간이 지체된 뒤에나 되어서야 건널 수 있었다. 작은 협곡의 강을 건너 또 5~6리를 가니 큰 협곡의 강이 나타났다. 사행단 일행들은 얕은 곳을 찾아 말을 타고 건널 수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삼강(三江)인데 압록강의 지류이다.
중강(中江)의 바깥은 위화도(威化島)인데, 위화도는 땅이 평탄하게 펼쳐져 있어 지금은 모두 농토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과 명나라에서 모두 경작을 금지하였지만 임란 이후에는 단속이 약화되자 중국인들이 몰려와 마을을 만들었고 이제 자기들끼리 왕래하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은 태조(太祖 이성계)가 큰 뜻을 세운 곳인데,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조익의 마음은 안타까웠다. 게다가 위화도 기슭에 중국측에서 포(鋪)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상인들을 감독하고 세금을 받으며 사람들을 통행하게 하였다. 조선의 사행단조차 사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포의 관리들이 말하였다.
이곳을 지나 다시 10리를 가니 구련성(九連城)이 있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보(堡)로 병력과 장비를 옮겨 놓고 이를 연강성(鍊江城)이라 하였으며, 유격(遊擊) 장군 한 사람을 파견하여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의 성이 동(佟)씨였다. 이렇게 보(堡)나 성(城)을 전진 배치하는 것은 조선에서 전쟁이 난 이후부터 부쩍 많아졌다.
오후가 되어서는 금석산(金石山) 촌가에서 잠시 쉬고 송골산(松鶻山)을 지났다. 그리고 저녁에는 세천촌(細川村)의 색(索)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이곳은 의주에서 거의 70리가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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