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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단, 여정의 가운데에서 여진족을 마주칠 것을 걱정하다
1599년 9월 13일, 조익(趙翊)은 사행단과 새벽 일찍 길을 떠났다. 점심에 이르러서는 건하촌(乾河村)의 민가에서 쉬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이 집안의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주인은 조익 등에게 생일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비록 나물 반찬에 묽은 탁주 정도만을 차려 음식은 소박하였지만, 집주인이 행하는 예의는 절도에 딱 들어맞았다. 조익은 이를 보고 흡족해 하였다.
휴식과 식사를 하고 이 집을 떠난 사행단 일행은 유가둔(劉家屯)을 지니고, 대쌍령(大雙嶺)과 소쌍령(小雙嶺)넘어 진동보(鎭東堡)를 거쳐 장령(長嶺)에 올랐다. 이곳은 특히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었는데, 시냇물이 산굽이를 휘감아 돌아나가고 있었다. 이 지역을 속칭 옹북하(瓮北河)라 이른다. 옹북하는 여덟 강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다. 이날 조익 등의 일행은 옹북하의 민가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집주인이 “중국 북쪽 변경에 20만 여진족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어찌 서둘러만 가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이때만 해도 그다지 사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날인 9월 14일, 사행단 일행은 사초하(蛇稍河), 진이보(鎭夷堡) 등을 거쳐 분수령(分水領)을 넘어 선마장(騸馬場)이라는 마을에 유숙을 하였다. 그런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서 “여진족 기병들이 병거와 무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요동(遼東)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조익은 이제 사행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9월 15일 사행단 일행은 가자대(架子臺), 연산참(連山站), 고암(庫巖), 첨수참(甛水站), 청석령(靑石嶺) 등을 거쳐 청석령 아래 마을에 도착하여 왕(王)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왕씨 역시 “개원(開元) 등에 60만 여진족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요양도사(遼陽都司)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러자 도사는 표문(票文)을 발급하여 성 바깥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조익은 자칫하면 전쟁에 휩쓸릴 수 있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9월 16일은 늦게 출발을 하였는데 마침 낭자산(狼子山)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다. 조익은 불현듯 정탁(鄭琢)이 생각에 떠올랐다. 정탁이 1590년 바로 이곳에 이르렀을 때 여진 병사들을 만나 허겁지겁 산으로 올라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사행에도 이러한 소식들이 계속 들리니 조식은 물론 사행단 일행은 모두 경계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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