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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천주교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 - 유학자의 시선
1845년 2월 3일, 서찬규는 은적암에서 과거 공부 중이었다.
1845년 2월 3일 저녁, 경담이라는 승려가 와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유교와 불교가 뒤섞여 있어서 역시 듣고 지나쳐버릴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 1846년 7월 16일, 서찬규가 사적인 일로 용연사에 통지했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왔다. 타고 가다 종각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올랐다.
얼마 후 다담(茶啖)이라는 것을 내어 왔는데 젓가락을 댈 만한 것이 없었다. 또 잠시 후에 저녁 공양이라고 내왔는데 수제비 몇 그릇뿐이었다. 마음으로는 가소로웠으나 야단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대 아래서 하인들이 중들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들이 지나치게 험악해서 부득이 그 중을 잡아 와서 하인에게 매로 때리게 했다. 그러나 매가 너무 사나워, 얼른 다른 중에게 중을 때리게 하고 정리했다.
그 이후 모든 중들의 예의범절이 처음에 비해 너무 좋아졌다. 무슨 중의 모습이 이 모양일까. 그들의 예의 없는 버르장머리는 웃음거리가 되기에 족했다.

이해 11월 24일에 서찬규는 부석암에 올랐다가 기이한 모습을 보았다.
한 떼의 떠돌이 중들이 절문 밖에 와서 바라를 울리며 악기를 두드리고 불고 뛰면서 춤을 추었다. 조금 있다가 한 사람이 들어와 석사(碩士)라고 칭하며 나그네로서의 예를 갖추고 옷깃을 단정히 하고 앉았다. 돌아보니 머리엔 두건을 쓰고 손에는 비단부채를 들었는데, 그 형상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다 머리와 수염을 깎은 모습은 더욱 우스꽝스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갔다가 다시 훌쩍 들어와서는 손을 깍지 끼고 죄를 청하는 모습이 우습고도 우스운 광경이었다.
암자에서 공부하던 서찬규는 1847년 6월 3일, 암자의 중을 불러 술을 사 오도록 했다. 그리고 서너의 친구와 예닐곱의 중들이 함께 뱃놀이를 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1862년 4월 8일, 서찬규는 은진의 관촉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미륵불이 있었다. 세 구의 돌로 된 몸체는 길이가 55자 남짓이고 둘레는 30여 자인데, 황금과 붉은빛이 도는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고려 광종(光宗) 20년 경오년에 만들었으니, 전 왕조에서 매우 부처를 숭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1861년 4월 6일, 서찬규를 방문한 송달수 공은 불교와 천주교에 대해 말했다.
“비록 천주교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가르침도 윤리를 중히 하고 깨끗하게 하며, 또 불법을 배척한다고 한다. 틀림없이 우리 유도에서 임시로 빌려간 말로, 쉽게 유혹하려고 하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조종(祖宗)과 부모의 영전에 예를 차리지도 않으면서 윤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데, 천주교는 틀림없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불교를 공격하는 것이다. 둘 다 우리 유도를 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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