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일기(臨齋日記)>는 19세기 대구의 선비인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그의 나이 21세인 1845년 1월 1일부터 37세인 1861년 5월 20일까지 17년간 쓴 일기이다.
대구지방의 명문 사족인 달성 서씨 집안에서 태어난 서찬규는 10세 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다. 그러나 그 뒤로는 더 이상의 과업을 버리고 학문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향촌의 선비로 조용한 삶을 살았는데,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서찬규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 말기인 순조 25년에서 고종 9년으로 대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더욱이 이 일기가 쓰인 당시는 조선 후기 외척들의 세도정치 속에 왕권 강화를 이루지 못하고 요절한 헌종과 강화도령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 철종의 시대였다.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의 물결이 조선에까지 급속하게 밀려들어 영국, 미국, 프랑스의 군함들이 출몰하여 통상 및 천주교 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고, 외세의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급속하게 밀려들었던 시기에 그는 유학자로서의 많은 물음과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에 대한 의문과 유학자로서의 학문적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보고, 경전을 탐독하였다. 책에서도 답을 구하지 못하면 당대의 소문난 유학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묻고, 답을 구하였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 세상에 나아가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지방의 사족으로서 자신의 수양과 학문의 궁구에 일생을 바치며, 유학자로서 바른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에는 이러한 그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 1881년 4월 4일부터 6일까지 충청남도 금산에 사는 원로 학자 송내희(宋來熙, 1791~1867) 선생을 찾아 3일 동안 경서(經書)와 예(禮)에 관해서 묻고 답하는데,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 조선의 유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음 알 수 있다.
서찬규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수용하기 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바랐다. 이는 그의 스승 홍직필의 학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은 ‘화이의 변’(중화와 오랑케를 차별함)에 엄격하여 이는 군신의 의리보다 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단의 폐해를 통렬하게 배척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제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홍직필과 서찬규의 만남은 비록 길지 않았지만, 서찬규는 홍직필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듣자니, 이미 소성(생원, 진사의 별칭)하였다고 하니 금년에 몇 살이며, 소성은 몇 살에 하였는가?”
“금년에 26세이며, 22세에 소성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소성하였네. 요즘은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책을 읽는가. 먼 곳에서 나를 찾아온 것은 반드시 잘못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다.”
“소생은 먼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듣고 본 것이 본디 적으며, 학업도 성글어서 걸어가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이 같지 않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민멸할 수 없는 자질이 있어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이제야 찾아뵙고 문안드리게 되어 귀의함이 늦은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1850년 4월 5일 서찬규가 평생의 스승, 매산 홍직필 선생을 만나 처음으로 나눈 대화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여섯. 이는 그의 인생에게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홍직필은 당시 대학자로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멀리서 노학자를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대구의 젊은 선비와의 만남이 무척이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홍직필 선생은 서찬규를 만나고 빙그레 웃으며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집어 주며 각별한 마음을 보였다.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시고 손수 한 병의 술과 안주를 집어서 마시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만약 마실 수 있으면, 내 나이가 다소 많다 하여 어렵게 여기지 말게” 하셨다.
(1850년 4월 5일)
그렇게 첫 만남 이후 서찬규가 서울에 머무는 닷새 동안 매일 같이 찾아가 학문에 관해 논하고 이야기 나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스승 홍직필은 아쉬움의 뜻을 표하면서 제자에게 따뜻한 당부를 남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인연이 얼마나 다행인가? 한 번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대로 헤어지니 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구나.”하시고 또 말씀하시를,
“행하고 남은 힘은 모름지기 부지런히 글을 읽어라. 글이라는 것은 이 마음을 유지시키는 까닭이니,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사색하였으나 유익함이 없었다. 학문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공자께서 또한 일찍이 말씀하였다.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도를 잘 행할 줄 알아야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 는 여덟 글자는 평생 부적으로 삼아 마땅히 진실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라” 하셨다.
(1850년 4월 10일)
이후, 서찬규는 홍직필 선생을 수차례 찾았고, 선비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리와 천인의 운명과 본성에 대한 성현의 가르침을 궁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승의 가르침을 오래 들을 수 없었다. 사제의 연을 맺은 지 2년도 되지 않아 스승은 세상을 떠난다. 당대 유학자들의 큰 스승이며 성균관 좨주 및 대사헌에 두 차례나 특배 되었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기도 했던 홍직필은 향년 77세 때였다.
서찬규는 스승의 세상을 떠난 지 보름이 넘어서야 부음을 받는다. 그리고 스승이 계신 서울 향해 절하고 곡을 한다. 그리고 서울을 향해 길을 걷는다. 바쁜 걸음으로 서울에 도착했지만 이미 발인은 끝나 있었다. 스승을 보지 못하고 떠난 보낸 제자의 원통함에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홍직필은 그런 서찬규를 위로 하듯 그에게 참먹 한 개와 말린 귤을 유품을 남겨두었다.
스승을 찾아 먼 길을 달려 온 젊은 선비를 기특하고 어여삐 여기고, 그런 스승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가르침을 주려는 스승. 서찬규는 그런 스승을 만났기에 평생 학문에만 몰두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찬규는 스승 홍직필이 늘 그를 독려하면 하던 ‘상제임여무이이심’(상제가 너에게 임하시니 너는 마음을 둘로 하지말라)‘라는 말에서 따와 호를 임재(臨齋)라고 하였다. 스승이 떠난 후에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기울인다.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서찬규는 38세가 되던 1862년에 동강의 언덕에 수동재를 짓고, 이곳을 수양과 강학의 자리로 삼았다. 그로부터 배우려는 사람들과 빈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학문에는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 충과 신으로 행동하여 치우침이 없었다. 또한 그는 성선설을 추종하여 ‘사람의 성품은 본래 착한 것인데 세상에 나아가면 그 혼탁함으로 흐려지게 되니, 반드시 수양을 통하여 다시 착한 성품을 되찾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렇게 평생토록 학덕을 쌓다가 1905년 1월 22일 대구 남산리 수동재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가까워서도 정신이 맑아 자손과 문인들에게 “선비는 가난함을 근심하지 말고 수신과 행실을 돈독히 하여 바른 길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당대에 영향력 있는 정치가도, 역사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급변하는 시대에서도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했던 조선의 유학자이자 선비였다. 임재일기에는 스승을 만나 학문을 논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던 젊은 선비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임재일기
19세기, 36.7×21.7cm, 필사본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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