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통과 기록
유교문화관
조선의 교육
조선의 가례
옛문서 생활사 박물관
사행록 역사여행
안동 하회마을
조선의 전통건축
스토리 테마파크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공모전
콘퍼런스
테마스토리
가정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개인의 일생과 통과의례
그리운 가족
노비들의 삶
경제
가계경영과 노동
고달픈 세금과 부역
시장과 거래
자연재해와 흉년의 기록
공동체
공동 목표를 위한 조직과 협동
관리와 공조 및 대립
사람 사이 갈등과 범죄
이웃과 어울리는 삶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구국에 나선 의인들
나라를 위한 무장투쟁
신문물의 물결과 변화하는 조선
이역만리에서의 독립운동
혼란한 정국
나라의 정치
관직생활
국가의 경조사
국왕의 명령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
조정의 갈등과 대립
조정의 사건과 사고
외교와 사행
사행길의 사건사고들
사행길의 여정
외교정책의 수행
외국 사람들과의 만남
외국의 자연과 문물의 경험
전쟁, 혼란의 기록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전쟁의 진행과 양상
피난과 궁핍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유람과 감상
유람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유흥의 기록
자연과 고적에 얽힌 이야기
하층민의 놀이와 즐거움
학문과 과거
과거 급제의 영예
과거의 부정부패
끝없는 학문의 세계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
인물스토리
관리
가족, 동료와 교류하는 관리
나라의 변란을 맞이한 관리
무인의 길을 걷는 관리
바른말을 하는 관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
선정을 베푸는 청렴한 관리
외교를 수행하는 관리
인사발령을 받은 관리
정치적 갈등에 직면한 관리
죄를 지은 관리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
양반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양반
고을일에 참여하는 양반
과거시험을 치르는 양반
나랏일을 걱정하는 양반
난리를 만난 양반
대립과 갈등에 놓인 양반
사람들과 교유하는 양반
일상을 고찰하는 양반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양반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풍문과 소식을 듣는 양반
학문하는 양반
여성
기생
양반가의 여성
왕실의 여인들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하층민 여성
왕실
국난을 만난 국왕
국정을 돌보는 국왕
왕실의 사람들
왕을 보필하는 세자
한 집안의 가장인 국왕
외국인
군대를 이끌고 온 외국장수
외국의 외교관
조선인을 만난 외국인
중인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관)
향리
하층민
고된 삶을 사는 노비
기술자의 삶, 장인
무속인
부역과 노동에 지친 백성
장사로 삶을 영위하는 상인
천대받는 승려
배경이야기
경제
군제와 군역
농업과 가계경영
산업과 시장
세금과 부역
환경과 재해
교육과 과거
과거
교육기관
학문과 출판
인물
문화
고사, 고적
관습, 풍속
군제와 군역
놀이
예술
의례
의식주
종교
질병과 의료
사회
가족과 일상의례
신분
지역공동체
질병과 의료
전쟁과 외교
국제정세
민간인 교류
외교
전쟁
정치와 행정
사건
사법
왕실
정쟁
정치행정제도
지방제도
일기정보
서명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저자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멀티미디어
내용유형
공간자료
사건자료
소품자료
인물자료
절차자료
참고자료
미디어유형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이미지
공지사항
활용사례
로그인
소개
웹진담담신청하기
활용가이드
용어사전
전통과기록
페이스북
블로그
▲ top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일기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전체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이야기
검색어
시기
-
검색
다시입력
테마스토리
가정
경제
공동체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나라의 정치
관직생활
국가의 경조사
국왕의 명령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
조정의 갈등과 대립
조정의 사건과 사고
외교와 사행
전쟁, 혼란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학문과 과거
Home
>
테마스토리
>
나라의 정치
> 조정의 갈등과 대립
페이스북
스크랩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통제사 이운룡이 바다로 쌀 3백 섬을 영경에게 보냈다. 표류하다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다시 전과 같이 운송했는데, 서강 나루에 있는 나라의 창고로 잘못 전달되었다. 창고
도감
이 살펴보니 관에서 계산한 것이 아니었다. 또 갑이라는 무인이 새로 만호 벼슬을 제수받았는데 같은 이름의 을도 부임하여 서로 진위를 가리기 위해 다투게 되었다.
갑이, “내가 새로 임명되었다. 나는 영상에게 말 2필을 주고 이 벼슬을 얻었다.”라고 하자, 을이, “나는 은 몇 냥을 바쳤는데, 말 2필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내가 결정된 것이다.”라고 했다. 윤안성이 시를 지어 그것을 비웃었다.
지난 겨울에 주상이 체후가 아주 위급하여 여러 번 전위를 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중전도 언문으로 잇달아 두세 번
교서
를 내렸다. 영경이 빈청에서 손을 저으면서 이원익 등의 여러 대신들을 물리치며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여러 대신들이 쫓겨 나왔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분해했다. 비록 영경의 무리일지라도 그를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영경이 홀로 그의 무리인 좌상 허욱과 우상 한응인 등과 함께 방계를 올리기를, “오늘 전교를 받들어 보니 실로 뭇 신료들의 생각 밖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흉악하고 은밀한 정상에 온 나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인홍이 비로소 류영경(柳永慶)을 공격하니 도성 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영경의 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병오년(1606)
증광시
도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파방하지 않았고, 또 그의 자질(子姪)들 및 친족 무리들이 모두 그의 사사로운 정분 행사로 과거에 합격되었다. 또 병오년 겨울에 대마도에서 왜인 한 명이 잡혀 왔는데, 영경이 능을 파헤친 도적이라고 주장하며, 공을 세우기 위해 주상을 속이고,
종묘
에 고한다면서 제관(祭官)들이 모두 재계에 들어갔다가 파하기에 이르렀다. 기타의 죄상은 머리카락을 뽑아 헤아려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2월 7일, 이달 초하룻날 신시(申時 : 오후3시에서 5시까지)에 주상이 승하하신 것을 알았다. 신하와 백성들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대개 별시는 류영경(柳永慶)이 탄핵받는 일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뒤숭숭하고 어지러워 여러 번 연기되는 바람에, 과거 보러 올라온 여러 유생들이 서울에 머무른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초이튿날에 시험날짜를 정하고, 초하룻날 오전에
시관(試官)
을 패초(牌招 : 임금이 대궐로 불러들임) 했는데, 뜻밖에 갑자기 주상의 환후가 위독해져 결국 승하 하시고 동궁이 들어가 임석했다고 한다.
2월 10일, 영경의 손자는 옹주에게 장가갔는데, 이가 곧 전창위 옹주이다. 영경의 손자가 천만 마디의 글을 써서 인홍이 그의 조부를 무함하여 장차 집안을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소하여 주상의 노기를 더욱 돋우게 하였다.
주상이 인홍의 소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특별히 옳고 그름을 나타내지 않고 소를 보류시켜 놓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크게 화를 내면서 여러 번 영경이 무함을 입었다고 하교하고, 또
비망기
를 내려 동궁에게 전위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전교에, “인홍이 세자가 빨리 보위를 전해 받도록 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서 세자에게 있어서는 충성이 되지만 실상은 불충이 심한 것이다.
세자가 천조(명나라 조정)로부터 책봉을 허락받지 못한 채로 갑자기 보위를 물려받는다면, 장차 천조로부터 힐문당할 우환이 있을 텐데 이를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영경의 방계는 국가의 만전을 도모하는 데서 나왔으므로 개의치 말고 안심하고 직무에 나아가라.”라고 했다 한다. 영경이 이 때문에 더욱 전횡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대신이 논박당하면 곧바로 사퇴할 일이지 스스로 상소하여 변명하는 자가 없었는데, 류영경(柳永慶)은 이와 같으니 그의 전횡과 방자함이란 극도에 달했다고 할 만하다. 영경의 소는 이조 판서 최천건이 지었다고 한다.
저녁에 대행대왕(선조)이 금상(광해군)에게 내린 유교(遺敎)를 보았는데, “동기(同氣)를 손과 발처럼 여기고 비록 참소하는 말이 있더라도 들어주지 말라.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 나의 뜻을 받들어라.”라고 했다.
2월 16일, 류영경과 그 무리가 모두, 정인홍의 상소는 이산해 부자 및 이이첨 등에게서 비롯되어 몰래 시킨 것이라고 의심하여, 주상에게 계를 올려 죄주기를 청했다. 이에 이경전은 갑산으로 귀양 가고 이이첨은 삼수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산해가 경전과 이별할 때 부자가 서로 통곡했다.
영경의 형의 아들인 성(惺)은 산해의 딸을 전처(前妻)로 얻었다. 성의 처가 병이 들자 성이 손가락까지 잘라 간호했는데, 이에 이르러 성이 곧바로 산해의 집으로 가서 상소를 하도록 몰래 시킨 정상을 캐물으며, 언사가 패악스럽고 거만하여 어른을 대하는 예의가 조금도 없었다. 산해가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하자, 성이 끝까지 따지고 물으면서 대감이라 부르고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않았다. 성이, “만약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약사발을 받들어야 할 텐데, 그때는 후회한들 소용 있겠소?”라고 하니, 산해가 분하고 민망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경전과 이첨이 모두 귀양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국상이 나게 되었다.
2월 25일, 들으니, 이효원, 성준구, 김대래, 홍식 등이 관직을 삭탈당했다고 하는데, 모두가 영경의 심복들이다. 의관 허준도 장차 죄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2월 28일, 이달 14일과 16일 양일의
조보(朝報)
를 보게 되었는데, 합사(合司)해서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계하여
원찬(遠竄)
할 것을 청했는데, 소장이 무릇 10여 차례나 되었지만 윤허하지 않고 단지 파직하라고 하명했다고 한다. 또 성준구, 이유홍, 김대래 등은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보냈고,
송보(宋<馬+尃>)
과 홍식은 파직시켰고, 이덕온도 관직을 빼앗고 내쫓았다고 한다.
3월 8일, 삼사(三司)가 간신들을 성토하는 데 맹렬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이시언이
대사헌
이 되었으나 사피하고 나오지 않아서 백암(栢巖 : 김륵)이 두 번째로 대사헌에 추천되었고, 최유원.
류경종
, 이성 등이
간관(諫官)
이 되었다. 대북(大北)이 위주이고 서인과 남인이 섞여 진출했는데, 지금은 비록 힘을 합하여 류영경(柳永慶)을 성토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류영경(柳永慶)은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여론도 기필코 죽여야 한다고 한다.
남복규도 삭출되었다. 류영경(柳永慶)의 권세가 성할 때, 복규가 빌붙어서 아첨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정인홍과
이귀
가 상소하게 되자, 장차
정국(廷鞫)
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복규가 생기가 돌아 남보다 앞서서 더욱 심하게 설쳤다. 도성 안에서 모두 말하기를 ‘복규의 죄가 영경보다도 심하다’고 했다.
3월 15일, 들으니, 주상의 전교에, 정인홍과
정구
는 다 선조에서 예우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여, 정구는 대사헌에, 인홍은 승진하여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기자헌이 좌의정, 심희수가 우의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다 논박당하여 체직되었다고 하고, 지금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창 영경을 논계하여 안치시키려 한다고 한다.
3월 20일, 서울 소식을 들으니,
원흉
이
중도부처(中道付處)
되었다고 한다. 조정의 논의 중에, 늦추자는 쪽은 국장을 치른 뒤에 죽이려고 하고, 서두르자는 쪽은 국장 전에 죽이려고 했다.
남대문에 글이 나붙었는데, ‘이정이 아비를 죽였다’라고 했다. 정(瀞)은 대사헌 이효원의 아들이다. 그가 한림이 되어 자기의 아비를 류영경(柳永慶)에게 붙어 아첨하게 하여 정국을 힘껏 주장하게 했는데, 효원이 이러한 이유로 죄에 빠져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음에 류영경(柳永慶)이 논핵을 당하여 사퇴하려 했으나, 홍식·송보·이유홍·남복규·김대래·이효원 등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여, 기필코 말하는 자들의 입에 모조리 재갈을 물리고, 바로 자기들의 위세를 행사하기 위해 밤낮으로 왕래하며 영경의 집에서 모의하여, 그 위세의 불꽃을 더욱 돋우게 되었다.
최천건이 영경을 위하여 소를 지을 때, 송응순이 영경을 주공에 비유하여 영경이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하도록 하게 했는데, 모두 그의 패거리들이 시켜서 영경을 결국 낭패한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또한 그의 패거리들이 빚어낸 결과였다. 영경이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했으나, 대행대왕이 크게 성을 내었고 내려 온
비답(批答)
이 아주 근엄하였다. 소를 올린 정인홍·이정원·하성 및 이산해 부자, 이성 등은 모두 정국하고자 하여 장차 초하룻날에 논계하려 했으나, 뜻밖에 주상이 승하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3월 23일, 들으니, 영경을 아주 먼 변경에 안치하고, 충주 목사 이홍로는 강계로 안치되었다고 한다. 임진년(1592)에 대가가 의주에 있을 때, 홍로가 소를 올려 동궁을 참소하고, 그 뒤에 다시 주상과 동궁을 이간질하여 대행대왕이 크게 성을 내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무고임을 알게 되어 마침내 일이 중지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진실로 죽고도 남음이 있었다.
3월 29일, 서울 소식을 살펴보니, 류영경(柳永慶)은 경흥으로 찬배되고, 홍여순은 삭출되고, 서인이 소를 올려 성혼을 신원했다고 한다. 성혼은 서인의 괴수이다. 행동을 가다듬어 직급을 뛰어넘어 높은 자리에 올라 미움을 받았는데, 사축 최영경의 명망이 높아지자 정철을 사주하여 그를 죽이게 했다. 기축년(1589)에 대행대왕이 곧바로 최영경의 억울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대사헌에 증직하고,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여 먼 고을에 안치했다. 임진년(1592)에 대가가 관서지방으로 파천할 때, 혼(渾)이 길가에 살면서도 나와 문후하지도 않자 대행대왕이 화를 냈는데, 임인년(1602)에 조정의 논의로 혼의 관작을 추탈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관직, 권력
시기 : 1608-01-29 ~ 1608-03-2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정인홍, 이정원, 하성, 윤안성, 이귀, 이원익, 이산해, 이경전, 이이첨, 류영경, 이운룡, 허욱, 한응인, 류정량, 최천건, 류성, 이유홍, 이효원, 성준구, 김대래, 홍식, 송보, 이덕온, 남복규, 이정, 송응순, 이홍로, 김령, 평보, 선조, 중전, 광해군, 허준, 이시헌, 김륵, 최유원, 류경종, 이성, 홍여순, 정구, 기자헌, 심희수, 성혼, 정철, 최영경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47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선조 말년, 광해군 초의 당쟁
동서분당은 1575년(선조 8)에 일어난 당론(黨論)이다. 조선 당쟁(黨爭)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며, 당시 이름이 높던 젊은 선비 김효원(金孝元) 일파와 명종왕후(明宗王后)의 아우로 권세 있는 심의겸(沈義謙) 일파와의 반목·대립에 기인(起因)한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을 일으키게 한 직접 원인은 전랑(銓郞)의 직(職)을 에워싼 암투(暗鬪)에 있었으며, 처음 김효원이 장원급제(壯元及第)로 문명(文名)이 높아 전랑에 천거(薦擧)를 받았는데, 심의겸이 이에 반대한 것이 최초의 발단이었다. 그 반대 이유는 김효원이 일찍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 집에 머무른 일이 있어 젊은 선비로서 권세에 아부하는 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김효원은 마침내 전랑이 되었으나, 그가 이임(離任)할 때는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천망(薦望)에 오르게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이를 반대하였다. 반대 이유는 왕의 외척(外戚)으로 인사(人事)를 장악한 전랑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사건으로 양가의 불화는 결정적으로 되고, 마침내 사류는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어, 당시의 관리와 유생(儒生)들은 모두 양파 중 어느 하나에 붙어서 서로 반목(反目)·질시(嫉視)하기에 이르렀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편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편 정동(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동서분당 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실로 당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정치적·사회적으로 그 끼친바 영향이 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같은 국란을 당하여는 평화 시보다는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당파간의 알력은 면할 길이 없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직을 파면당한 것도 당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일단 외난(外難)이 걷히고 평화가 회복되자 당쟁은 더욱 치열해 갔다. 이리하여 당파의 분열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긴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東人)이 득세하여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門人)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세자책봉문제)을 전후하여 동인 중에는 서인에 대한 강경파(强硬派)와 온화파(穩和派)로 갈리어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겼다. 이 남북인의 분열도 학파(學派)로 보면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 간의 대립이었다. 임진왜란 후 세력이 강하여진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졌으며, 광해군 일대(一代)는 그를 추대한 대북이 정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야(野)에 있던 서인은 광해군이 생모(生母)가 아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는 죄목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무신년(1608, 선조41)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東宮)을 모위(謀危)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忠州)의 진사 이정원(李挺元)과 경상우도(慶尙右道)의 하성(河惺)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永慶)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國婚)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통제사(統制使) 이운룡(李雲龍)이 바다로 쌀 3백 섬을 영경에게 보냈다. 표류하다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다시 전과 같이 운송하였는데, 서강(西江) 나루에 있는 나라의 창고로 잘못 전달되었다. 창고 도감(都監)이 살펴보니 관에서 계산한 것이 아니었다. 또 갑(甲)이라는 무인(武人)이 새로 만호(萬戶)벼슬을 제수받았는데 같은 이름의 을(乙)도 부임하여 서로 진위를 가리기 위해 다투게 되었다. 갑이, “내가 새로 임명되었다. 나는 영상(領相)에게 말 2필을 주고 이 벼슬을 얻었다.”라고 하자, 을이, “나는 은(銀) 몇 냥을 바쳤는데, 말 2필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내가 결정된 것이다.”라고 했다. 윤안성(尹安性)이 시를 지어 그것을 비웃었다. 지난 겨울에 주상이 체후가 아주 위급하여 여러 번 전위(傳位)를 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중전도 언문으로 잇달아 두세 번 교서를 내렸다. 영경이 빈청(賓廳)에서 손을 저으면서 이원익(李元翼) 등의 여러 대신들을 물리치며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여러 대신들이 쫓겨나왔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분해했다. 비록 영경의 무리일지라도 그를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영경이 홀로 그의 무리인 좌상(左相) 허욱(許頊)과 우상(右相) 한응인(韓應寅) 등과 함께 방계(防啓)를 올리기를, “오늘 전교를 받들어 보니 실로 뭇 신료들의 생각 밖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흉악하고 은밀한 정상에 온 나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인홍이 비로소 류영경을 공격하니 도성 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영경의 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병오년(1606) 증광시(增廣試)도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파방하지 않았고, 또 그의 자질(子姪)들 및 친족 무리들이 모두 그의 사사로운 정분 행사로 과거에 합격되었다. 또 병오년 겨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왜인 한 명이 잡혀 왔는데, 영경이 능(陵)을 파헤친 도적이라고 주장하며, 공을 세우기 위해 주상을 속이고, 종묘에 고한다면서 제관(祭官)들이 모두 재계에 들어갔다가 파하기에 이르렀다. 기타의 죄상은 머리카락을 뽑아 헤아려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오후에 판사․생원 형과 같이 송석대에 가니 제천 표숙 및 여러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덕우의 처가에서 가지고 술과 안주로 모여 회취(會醉 : 모여서 먹고 노는 것)하 것은 관례였다. 저녁에 들으니, 호남(湖南)의 담양(潭陽)에서 진우(晋宇)가 월촌(越村)에 왔다고 하기에 밤에도 불구하고 보러갔다. 진우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우리 지방 근처에 흘러 들어왔는데 지금은 봉화(奉化)의 창해(昌海)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나의 선친을 복천(福川)에서 뵌 적이 있으므로 내가 특별히 대접했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 7일 새벽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슬프고 아픈 마음 그지없다. 저녁 때 영천(榮川)의 둘째 생질이 와서 전 형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이달 초하룻날 신시(申時 : 오후3시에서 5시까지)에 주상이 승하(昇遐)하신 것을 알았다. 신하와 백성들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대개 별시(別試)는 류영경이 탄핵받는 일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뒤숭숭하고 어지러워 여러 번 연기되는 바람에 과거 보러 올라온 여러 유생들이 서울에 머무른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초이튿날에 시험날짜를 정하고, 초하룻날 오전에 시관(試官)을 패초(牌招 : 임금이 대궐로 불러들임) 했는데, 뜻밖에 갑자기 주상의 환후가 위독해져 결국 승하 하시고 동궁(東宮)이 들어가 임석(臨席)했다고 한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 10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평보 형이 제천 표숙 댁에 내려왔다. 덕우와 사첨도 왔다. 성복(成服)하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오례의(五禮儀)》에 따르면 문서가 도달한 날을 부음을 처음으로 들은 날로 간주하여 그날부터 6일째 되는 날을 성복하는 날로 하는데, 지금 주상의 승하 소식은 망령되이 전해진 소문이 아니라 듣지 못한 곳이 없기 때문에 만약 문서가 도달하도록 기다린다면 늦고 빠르고를 기필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듣자하니, 영천(榮川)과 안동 등의 읍에서 모두 초열흘 지나서 성복을 한다고 했다. 우리 읍도 8일을 부음을 들은 날로 간주하여 13일에 성복하기로 정했다. 봉길이 제천 표숙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주상이 초하룻날에 약밥을 자시고 조금 있다가 승하하셨고, 세자(世子 : 광해군)가 대군(大君 :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중전(中殿)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세자가 즉위했다고 한다. ○ 정인홍이 유배 가는 도중에 국상 소식을 듣고 중간에서 머물러 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영경이 정인홍의 상소 때문에 근심하며 번민하던 중이었는데, 그의 무리들인 김대래(金大來)․남복규(南復圭)․이효원(李効元)․이유홍(李惟弘) 등이 만약 인홍과 정원(挺元) 등의 상소를 이유로 갑자기 사피(辭避)한다면 이때부터 일이 염려스러워지니, 차라리 상소를 하여 스스로 발명하거나, 또 주상의 의도를 살펴서 언관을 잡아다가 조정에서 신문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다면 한 나라를 입막음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영경의 손자는 옹주(翁主)에게 장가갔는데, 이가 곧 전창위(全昌尉) 옹주이다. 영경의 손자가 천만 마디의 글을 써서 인홍이 그의 조부를 무함하여 장차 집안을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소하여 주상의 노기를 더욱 돋우게 하였다. 주상이 인홍의 소(疏)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특별히 옳고 그름을 나타내지 않고 소를 보류시켜 놓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크게 화를 내면서 여러 번 영경이 무함을 입었다고 하교하고,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동궁에게 전위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전교에, “인홍이 세자가 빨리 보위를 전해 받도록 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서 세자에게 있어서는 충성이 되지만 실상은 불충이 심한 것이다. 세자가 천조(天朝 : 명나라 조정)로부터 책봉을 허락받지 못한 채로 갑자기 보위를 물려받는다면, 장차 천조로부터 힐문(詰問)당할 우환이 있을 텐데 이를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영경의 방계(防啓)는 국가의 만전을 도모하는 데서 나왔으므로 개의치 말고 안심하고 직무에 나아가라.”라고 했다 한다. 영경이 이 때문에 더욱 전횡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대신이 논박당하면 곧바로 사퇴할 일이지 스스로 상소하여 변명하는 자가 없었는데, 류영경은 이와 같으니 그의 전횡과 방자함이란 극도에 달했다고 할 만하다. 영경의 소는 이조 판서 최천건(崔天健)이 지었다고 한다. 저녁에 대행대왕(大行大王 : 선조)이 금상(今上 : 광해군)에게 내린 유교(遺敎)를 보았는데, “동기(同氣)를 손과 발처럼 여기고 비록 참소하는 말이 있더라도 들어주지 말라.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 나의 뜻을 받들어라.”라고 했다. ○ 들으니, 수릉관(守陵官)에는 박동량(朴東亮)이, 고애사(告哀使)에는 이호민(李好閔)과 오억령(吳億齡)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 16일 맑다가 오시쯤 흐렸다. 평보 형이 들렀다. 이보다 앞서 대행대왕이 보위에 있을 때, 류영경과 그 무리가 모두, 정인홍의 상소는 이산해(李山海) 부자 및 이이첨(李爾瞻) 등에게서 비롯되어 몰래 시킨 것이라고 의심하여, 주상에게 계(啓)를 올려 죄주기를 청했다. 이에 이경전(李慶全)은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고 이이첨은 삼수(三水)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산해가 경전을 이별할 때 부자가 서로 통곡했다. 영경의 형의 아들인 성(惺)은 산해의 딸을 전처(前妻)로 얻었다. 성의 처가 병이 들자 성이 손가락까지 잘라 간호했는데, 이에 이르러 성이 곧바로 산해의 집으로 가서 상소를 하도록 몰래 시킨 정상을 캐물으며, 언사가 패악스럽고 거만하여 어른을 대하는 예의가 조금도 없었다. 산해가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하자, 성이 끝까지 따지고 물으면서 대감이라 부르고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않았다. 성이, “만약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약사발을 받들어야 할 텐데, 그때는 후회한들 소용 있겠소?”라고 하니, 산해가 분하고 민망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경전과 이첨이 모두 귀양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국상이 나게 되었다. ○ 이날 임 참봉의 아들이 글을 배우러 왔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 25일 흐림. 들으니, 이효원(李効元)․성준구(成俊耉)․김대래(金大來)․홍식(洪湜) 등이 관직을 삭탈당했다고 하는데, 모두가 영경의 심복들이다. 의관(醫官) 허준(許浚)도 장차 죄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 28일 흐림. 판사 형이 관아에서 돌아왔다. 역시 이전의 일 때문에 고을 수령에게 사과했다. 수령이 욕보이기를 어제 평보 형을 대하던 것과 같이 했다고 한다. 또한 수령이, “그대가 딸을 시집보낼 때 내가 그대에게 부조를 했으니, 어째서 서로 저버리겠는가.”라고 했으니, 그의 말이 더욱 비루하다. 이달 14일과 16일 양일의 조보(朝報)를 보게 되었는데, 합사(合司)해서 류영경의 죄를 논계하여 원찬(遠竄)할 것을 청했는데, 소장(疏章)이 무릇 10여 차례나 되었지만 윤허하지 않고 단지 파직하라고 하명했다고 한다. 또 성준구(成俊耉)․이유홍(李惟弘)․김대래(金大來) 등은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보냈고, 송보(宋<馬+尃>)과 홍식(洪湜)은 파직시켰고, 이덕온(李德溫)도 관직을 빼앗고 내쫓았다고 한다. 지금 임해군의 역모사건에 대한 옥사를 한창 추국(推鞫)하고 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 상공(李相公)을 영상으로 복귀시키니 나라 안 사람들이 서로 치하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사직 소를 올렸다. 이 상공에 대한 주상의 권애(眷愛)가 더욱 두터워져 의약과 식물(食物)을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내려 보내고, 내관(內官)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상공의 사직소에 대한 비답에, “경을 얻어 수상으로 삼으니 온 나라가 서로 경축했는데, 어찌 꿈에 점쳐 얻은 사람보다 더 어질지 않겠소.”라고 했다. 기자헌(奇自獻)이 좌상(左相)이 되고 심희수(沈喜壽)가 우상(右相)이 되었다. 또 주상이 여러 번 하교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폐단을 없애는 데 힘을 쓰라고 하니 성심(聖心)이 간절하되 뭇 신하들 중에 받들어 시행하는 자가 없으니 또한 탄식할 일이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8일 흐림. 저녁에 전 형의 편지를 보았다. 삼사(三司)가 간신들을 성토하는 데 맹렬하지 않았다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이시언(李時彦)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사피하고 나오지 않아서 백암(栢巖 : 김륵(金玏))이 두 번째로 대사헌에 추천되었고, 최유원(崔有源)․류경종(柳慶宗)․이성(李惺) 등이 간관(諫官)이 되었다. 대북(大北)이 위주이고 서인과 남인이 섞여 진출했는데, 지금은 비록 힘을 합하여 류영경을 성토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류영경은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여론도 기필코 죽여야 한다고 한다. 남복규(南復圭)도 삭출(削黜)되었다. 류영경의 권세가 성할 때, 복규가 빌붙어서 아첨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정인홍과 이귀가 상소하게 되자, 장차 정국(廷鞫)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복규가 생기가 돌아 남보다 앞서서 더욱 심하게 설쳤다. 도성 안에서 모두 말하기를 ‘복규의 죄가 영경보다도 심하다’고 했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15일 바람이 불었으나 따뜻했다. 들으니, 주상의 전교에, 정인홍과 정구는 다 선조(先朝)에서 예우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여, 정구는 대사헌에, 인홍은 승진하여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기자헌이 좌의정, 심희수가 우의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다 논박당하여 체직되었다고 하고, 지금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창 영경을 논계(論啓)하여 안치(安置)시키려 한다고 한다. 또 들으니, 대행대왕(大行大王)의 휘호(徽號)를 소문 의무 성경 달효(昭文毅武聖敬達孝)로 하고, 묘호(廟號)를 선종(宣宗), 능호(陵號)를 목릉(穆陵)으로 정했다고 한다. 임해군(臨海君)은 처음에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는데, 전주(全州)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 교동현(喬桐縣 : 강화도 교동)에 안치시켰다고 한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20일 비가 내렸다. 구기자(枸杞子)를 심었다. 오시쯤 비가 그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산꽃이 다 떨어졌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원흉이 중도부처(中道付處)되었다고 한다. 조정의 논의 중에, 늦추자는 쪽은 국장(國葬)을 치른 뒤에 죽이려고 하고, 서두르자는 쪽은 국장 전에 죽이려고 했다. 남대문에 글이 나붙었는데, ‘이정(李瀞)이 아비를 죽였다’라고 했다. 정(瀞)은 대사헌 이효원(李効元)의 아들이다. 그가 한림(翰林)이 되어 자기의 아비를 류영경에게 붙어 아첨하게 하여 정국(廷鞫)을 힘껏 주장하게 했는데, 효원이 이러한 이유로 죄에 빠져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음에 류영경이 논핵을 당하여 사퇴하려 했으나, 홍식(洪湜)·송보(宋<馬+尃>)·이유홍(李惟弘)·남복규(南復圭)·김대래(金大來)·이효원 등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여, 기필코 말하는 자들의 입에 모조리 재갈을 물리고, 바로 자기들의 위세를 행사하기 위해 밤낮으로 왕래하며 영경의 집에서 모의하여, 그 위세의 불꽃을 더욱 돋우게 되었다. 최천건(崔天健)이 영경을 위하여 소(疏)를 지을 때, 송응순(宋應洵)이 영경을 주공(周公)에 비유하여 영경이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하도록 하게 했는데, 모두 그의 패거리들이 시켜서 영경을 결국 낭패한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또한 그의 패거리들이 빚어낸 결과였다. 영경이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했으나, 대행대왕이 크게 성을 내었고 내려 온 비답(批答)이 아주 근엄하였다. 소를 올린 정인홍·이정원(李挺元)·하성(河惺) 및 이산해(李山海) 부자, 이성(李惺) 등은 모두 정국(廷鞫)하고자 하여 장차 초하룻날에 논계하려 했으나, 뜻밖에 주상이 승하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해군의 역옥에 대한 국문(鞠問)이 바야흐로 한창일 때, 국문 여파가 무장들에게도 많이 파급되었다. 대행대왕이 막 승하했을 때, 멍석 밑에 병장기를 몰래 숨겨 놓았는데,―도끼와 철퇴 종류―주상이 이를 알고 중관(中官 : 내관)을 보내어 여러 왕자들의 자리를 두루 수색하게 하였다. 여러 왕자들이 모두 일어났지만, 임해군만이 일어나지 않자, 중관이, “어명이 지엄하오”라고 하면서 자리를 들치니, 과연 무기가 있었다. 또한 대간(臺諫)의 밀계(密啓)를 들이자, 주상이 그것을 가지고 임해군에게 보이면서 안심시키며 위로하였는데, 임해군이 갑자기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서서 주상이 붙잡을 수 없었다. 임해군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부인과 같이 행세하며 대궐 문을 빠져 나갔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모두 전해 들은 말이므로 정확한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전에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짓은 전적으로 노비들을 통해 자행되어, 폐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분한 마음이 치밀었고, 몹시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새 주상이 어느 날 편전에 있으면서, 여러 왕자들이 모시고 있을 때, 인성군(仁城君)에게, “경은 공손하고 검소하게 스스로 지키며 귀인의 풍도나 습성이 없으니 내가 아주 가상히 여긴다.”라고 하면서 면포 50필과 쌀 30섬을 하사하고, 의창군(義昌君)에게, “경도 인성군을 본받으라.”라고 하면서 인성군과 똑 같이 물건을 하사하고, 정원군(定遠君)에게, “경은 무슨 수로 그와 같이 큰 부자가 되었는가? 오늘 이후 일체 폐단을 일으키지 말라.”라고 하니, 조정의 논의가 무서운지라, 이런 이유로 여러 왕자들이 모두 근신하고 자제했다고 한다. ○ 정인홍이 소를 올려 판윤(判尹)을 사퇴하자, 주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도타이 타이르고, 보살피는 예의가 아주 지극하였다. 대사헌 한강 영공도 시사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23일 맑음.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었다. 사수(士修)가 보러 왔다. 오후에 판사·생원 두 형과 제천댁으로 갔다. 들으니, 영경을 아주 먼 변경에 안치(安置) 하고, 충주 목사(忠州牧使) 이홍로(李弘老)는 강계(江界)로 안치되었다고 한다.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홍로가 소를 올려 동궁(東宮)을 참소하고, 그 뒤에 다시 주상과 동궁을 이간질하여 대행대왕이 크게 성을 내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무고임을 알게 되어 마침내 일이 중지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진실로 죽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29일 맑음. 권인보가 들렀다. 서울 소식을 살펴보니, 류영경은 경흥(慶興)으로 찬배되고, 홍여순(洪汝諄)은 삭출되고, 서인(西人)이 소를 올려 성혼(成渾)을 신원(伸寃)했다고 한다. 성혼은 서인의 괴수이다. 행동을 가다듬어 직급을 뛰어넘어 높은 자리에 올라 미움을 받았는데, 사축(司畜) 최영경(崔永慶)의 명망이 높아지자 정철(鄭澈)을 사주하여 그를 죽이게 했다. 기축년(1589)에 대행대왕이 곧바로 최영경의 억울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대사헌에 증직하고,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여 먼 고을에 안치했다.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관서지방으로 파천(播遷)할 때, 혼(渾)이 길가에 살면서도 나와 문후하지도 않자 대행대왕이 화를 내었는데, 임인년(1602)에 조정의 논의로 혼의 관작을 추탈했다. ○ 홍여순(洪汝諄)은 대북파이고 또 ‘골북(骨北)’이라 부르기도 한다. 처음에 홍식(洪湜)과 한 통속이었으나 이윽고 원수처럼 서로 갈라섰다. 식(湜)은 여순(汝諄)의 당질(堂姪)이다. 이산해가 여순과 이합(離合)하기를 반복한 것이, 몇 번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깨끗한 언론에 천시당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홍로의 패거리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 ○ 정인홍이 애초에 사면을 받아 다시 조정으로 들어 올 때, 도성안의 진신(搢紳 : 벼슬아치)과 위포(韋布 : 벼슬 없는 선비)에서부터 서리들에 이르기까지 달려가 인사를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앞뒤와 좌우로 날개 돋친 듯이 길을 메우며 밀려들었는데, 서강(西江)에서 도성 안까지 행렬이 이어져 끊어짐이 없었다.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일지라도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였으니, 분경(奔競)의 폐단이 한결같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미지
영접도감사제청의궤(迎接都...
숭례문
숭례문 전경
숭례문 밖 전경
숭례문 정면
영주 천운정(榮州 天雲亭...
백암재사(栢巖齋舍)
백암재사(栢巖齋舍) 대문...
백암재사(栢巖齋舍) 안채
정구 초상
동의보감
동의보감
아계 이산해 영정
내암 정인홍 선생 영정
심희수 초상
기자헌 초상
평양 생사당 구장 이원익...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
관감당(觀感堂) 입구
관감당(觀感堂)
관감당(觀感堂)
탄금암(彈琴岩)과 측백나...
탄금암(彈琴岩)
오리영우(梧里影宇) 편액
오리 이원익 종택 입구
오리 이원익 종택 내부 ...
오리 이원익 종택의 생활...
오리 이원익 종택 장독대...
오리 이원익 종택 측문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충현서원지 기념물
충현관
충현관
인조묘정배향교서(仁祖廟庭...
유서(遺書)
계해사궤장연첩 (癸亥賜几...
오리집(梧里集)
녹표
정인홍 관계 고문서
정인홍 관계 고문서
정인홍 관계 문적 보관 ...
담양송강집 및 기암집 목...
담양송강집 및 기암집 목...
정철 묘지명
3D
왜인의 복식 男
왜인의 복식 女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날짜
장소
멀티미디어
1
임해군의 역모, 상반되는 공론과 이어지는 상소
1608-02-23
경상북도 안동시
2
소북파가 가고 있다
1606-07-21
경상북도 안동시
3
파직되고, 파직을 청하다 - 당파 간의 진흙탕 싸움
1614-05-23
4
17세기 서인 선비 김령의 눈에 비친 허균 - 능지처참이 ...
1618-09-02
서울특별시
5
홍여순과 이산해가 조정에서 대립하다
1600-06-26
강원도 평강군
닫기
출전정보
출전정보가 없습니다.
저자정보
저자미상
저자정보가 없습니다.
원문보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