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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
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
하게 한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교육,
시기 : 1608-08-2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박율보, 박율보의 조모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63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부녀자의 자식 가르침
조선은 문중을 중요시하는 대가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씨족단위가 하나의 가정이 되어서 독특한 가정교육을 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였으므로 원칙적으로 가정교육의 책임자는 아버지였지만, 잘못하는 자녀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친척 중 어느 누구도 그 잘못을 꾸짖거나 타일렀으므로 부모 없는 자녀에게까지도 가정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남자에 대한 가정교육은 대체로 유교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국가의 윤리와 사회의 윤리가 일치되었던 이 시대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도리와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하나로 받아들였으며, 남편과 부인 사이에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 있고,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지켜져야 할 도리와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의리 등은 당시의 전통 사회 속에서 남아의 필수적 역할교육으로 강조되었다.
따라서 가정에서도 삼강오륜의 준수는 그 어느 교육보다도 우선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대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을 효도의 기본으로 삼았고, 가장의 임무라고 가르쳤다. 또한 군자의 도를 존숭하여 아들에게 군자가 될 수 있는 갖가지 덕목을 가르쳤으며, 이를 가훈으로 남겨 후세에까지 널리 준수하도록 하였다.
가훈에 의하면, 기존질서의 준수를 위한 것, 자녀교육에 대한 것, 몸가짐과 마음가짐, 건강관리·대인관계·재산관리·관혼상제, 관직에 임하는 자세 등을 광범위하게 교육시켰음을 살필 수 있다.
아들의 정서생활과 심신단련을 위해서는 고려시대와 같이 육예를 가르쳤으며, 정서함양을 위한 명절놀이와 여러 가지 아동놀이 등이 행하여졌다. 승경도(陞卿圖)놀이는 글공부하는 남아들의 학습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해 장려되어 특히 가정에서 많이 행하여졌다.
집안에서 가르쳤던 책으로는 서당에 가기 전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천자문≫·≪동몽선습≫·≪소학≫·≪명심보감≫과 족보 및 조상의 문집 등이 연령이나 학습수준에 맞게 사용되었고, 사서오경은 서당·서원·향교의 교육이 시작됨과 동시에 가정에서도 반복 학습되었다.
그리고 집안 및 이웃의 혼인·제사·생일·회갑 등에 참여시켜 필요한 생활상식과 태도를 습득하게 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고려시대보다 더욱 엄격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즉, 자식·며느리·처·어머니로서의 4대역할을 근간으로 하여 그 실천사항으로 삼종지도(三從之道)·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이 가정교육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위에 베짜기·바느질·요리·육아·가사관리 등의 기능과 부덕, 부용, 부언, 부공의 4종이 품성교육으로 행하여졌다. 그리고 글공부도 이러한 목표에 도움이 되는 최저의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여성의 정서교육에 있어서는 고려시대 등과는 달리 사대부 집안의 딸에게는 노래와 춤이 금지되었고,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 등 한정된 범위 내에서 다리밟기·널뛰기·화전(花煎)놀이·그네뛰기 등 몇 가지 놀이만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도 여성들은 내방가사문학(內房歌辭文學)을 발전시켜 스스로의 정서를 함양시킴과 동시에 딸의 교육에도 이를 활용하였으며, 실내놀이로서는 윷놀이 등을 즐겼다. 여성들의 가정교육서는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양반가문에서는 한글과 함께 ≪명심보감≫·≪내훈≫·≪삼강행실도≫·≪계녀서 戒女書≫·≪규합총서 閨閤叢書≫·≪사소절 士小節≫·≪언문사서 諺文四書≫·≪소학언해≫·<오륜가 五倫歌> 등을 비롯하여 이야기책·서간문 등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의 단계로는 ≪사기 史記≫·≪논어≫·≪시전≫·여사서(女四書) 등까지도 가르쳤다.
그리고 출가 후에도 친가의 조상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잊지 않도록 가계보(家系譜)를 가르치는 문중도 많았다.
서구문물이 일시에 유입되었던 개화기 이후에는 전통윤리의 고수와 신교육의 수용에 따른 혼란 속에서 가정교육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으며, 현대에는 서구문물과 서구식 학교교육, 출세지향적이고 황금만능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사회양상에 의해서 전통적인 가정교육은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의 고도화에 따른 핵가족제도가 형성되고, 각급 학교가 설립, 보급됨으로써 가정의 교육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경제체제가 변화됨에 따라 부모들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게 되자, 가정교육
긴밀한 혈연관계에서 이루어지던 가정의 교육적인 교화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은 학교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됨에 따라, 가정에서 형성되어야 할 예의범절이나 인격형성조차도 학교교육에 의존하는 그릇된 풍조가 생겨났다.
특히 고도 산업사회화의 조건으로서 지적 기능이나 전문교육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서 고학력 취득을 위한 교육열이 팽배하게 되었고, 가정교육의 주안점을 오로지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지적 기능의 습득에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통시대와 현대 가정교육의 차이점은 다음의 10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의 검토는 현대 가정교육의 문제점을 상세히 파악하고, 어떤 방향으로 개선과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시사해 준다.
① 전통가정에서는 삼강오륜 등에 기초를 두고 남아와 여아의 성역할에 맞는 교육을 시켰으나, 현대에는 뚜렷한 윤리적 가치관이 보이지 않고, 남녀평등과 능력중심의 사조로 인해 남녀의 성차(性差)에 따른 성역할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② 전통가정에서는 인격과 품성 등에 가정교육의 목표를 두고 가훈이나 가풍 등을 정하여 특유의 전통을 유지하였으나, 현대에는 인격과 품성교육까지 학교교육에 미루고 있으며, 뚜렷한 가정교육 방침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③ 전통가정에서의 부모는 자신의 성별에 따라 자녀의 교육을 분담하였고, 통합적인 효과를 위하여 엄부·자모의 상호보완적인 구실을 수행하였으나, 현대의 가정은 아버지의 직장중심 생활로 아버지의 영향이 약화되었고, 여성의 사회진출 등으로 그 소임이 전도되거나 교육적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맡겨지고 있다.
④ 대가족제도였던 전통가정에서는 친척들이 촌수의 원근에 따라 훈계 등을 통하여 가정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핵가족제도인 현대에는 부모 이외의 친척들은 가정교육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⑤ 전통가정에서는 가족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대화를 많이 하여 자녀교육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현대에는 텔레비전·라디오 등 대중매체의 침투로 대화를 통한 교육이 크게 감소되었으며, 타인의 인생을 구경하는 방관자적인 인생태도가 생기고 있다.
⑥ 전통가정에서는 가족전체의 노동생활을 통해서 노동의 가치 등을 배우고 참여의식이 강화되었으나, 기계화·분업화로 가족공동의 노동이 퇴화된 현대에는 노동의 가치나 가사에 대한 참여의식을 배우기 어렵게 되었다.
⑦ 전통가정에서는 성인중심의 생활체제를 강조하여 청소년이 성인세계에 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현대가정은 자녀중심의 생활체제로서 성인문화의 학습이 지체되어 인사예절, 존칭어 사용 등과 같은 생활의 기본예절 등이 바람직하게 교육되지 못하는 가정이 많다.
⑧ 전통가정은 자녀의 개성이나 특기보다는 성별에 따른 성역할 교육을 강조하였으나, 현대가정은 자녀의 적성과 개성에 따른 특기교육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특기교육이 자녀의 흥미나 적성에 관계없이 유행에 따르는 경향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⑨ 전통가정은 사람됨의 교육과 등과를 준비하는 교육을 조화있게 병행하였으나, 현대에는 사람됨의 교육보다는 부모의 포부나 기대에 의해서 높은 학업성취를 자녀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많다. 자녀의 능력이나 적성과는 관계없이 일류학교의 진학과 인기직종을 위한 전공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⑩ 확고한 윤리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가정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훈육이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여성에게 매우 엄격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가정에서는 여성의 활달한 기질과 행동을 묵인 또는 허용하고 있다. →아동교육, 여성교육
[한담청론] 조선시대의 여성 교육
이덕무(1741-1793)는 '사소절'에서 "남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기 집을 망치고, 여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기는 하나, 역으로 남성의 집이 흥하기 위해서는 잘 가르쳐진 여성이 며느리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중략)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시대 성공한 남성들의 공부 배경에는 어머니, 할머니 등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이 있다. 어린 남녀 자식들의 공부는 여성의 몫이기도 하였다. 교육받은 여성이 어머니나 할머니가 되어 교육의 주체로 자리매김되는 '가정 속의 교육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양반 남성의 관직생활의 출처를 시의에 맞게 유도하여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게 만드는 이면에도 존재한다.
'시경(詩經)' 소아, '사간'편에 "딸을 낳아서 바닥에 재우고, 포대기로 감싸 주며 실패를 가지고 놀게 하니, 잘못할 것도 잘할 것도 없이, 오직 술 빚고 밥 짓는 것을 의논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침이 없으리라"고 돼 있다. 조선시대에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에도 이 '주사시의(酒食是議)'가 깔려 있다.
사례
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이항복의 모 최씨(?~1571)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교육열과 최씨 부인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성들이 자신이 직접 공식적인 교육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아이가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읽으면서 한 단계 씩 올라갈 때 마다 ‘책거리’라 하여 떡을 하고 마을잔치를 벌여 아들에 대한 학습독려를 하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학습 진도를 점검하는 역할도 되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들의 교육적 정성은 양반가문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고를 지배이념으로 하는 양반 중 심사회로서 출세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관직을 얻는 것이었고, 그것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과거제도였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제수를 받는 길만이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왜냐하면 대체로 양반가문이라 하면 4조 이내에 관직 자가 있어야만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행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직을 얻으려면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여야 하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부단히 학문을 연마해야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식에 대한 일차적인 학문의 독려는 어머니에게 책임이 돌아갔으며, 따라서 여성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단시 어머니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는 자식을 올바른 사회인으로 키우는데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는 누구보다도 극진한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아들을 가르쳐 조선 중기에 이항복은 명재상과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항복은 고려 말기의 유명한 학자 이제현의 후예로서 참찬 벼슬에 있던 아버지 몽량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최씨는 도덕적 수양과 근검절약 정신을 가르쳤다. 이항복이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이틀 동안 젖을 먹지도 않고 사흘동안 울지도 않아서 모두 근심한 나머지 점장이를 불렀는데, 점장이가 걱정할 것 없이 장차 대단히 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항복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어머니 최씨는 아들을 아버지 없이 키우는 데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이항복은 오성 부원군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어렸을 때 성격이 호방하여 동네 개구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 기지와 장난으로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학문에 마음을 못 붙이는 아들을 독려하여 도덕적인 수양과 경제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정신,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르쳤다.
하루는 항복이 대장간에서 버린 쇳조각을 주어모아 집에 와서 그냥 뜰에 던져버린 것을 보고 부인은 아들에게 “이 쇠가 귀한 것이고, 또 이렇게 적은 것이라도 송곳같은 것을 만들 수 있으며, 만일 탄환을 만들면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쓸모 있는 것이니 버리지 말아야한다”고 타일렀다. 이후 항복은 대장간 근방에서 버린 쇳조각을 계속 모아 3년 만에 큰 독으로 셋이나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항복이 어머니에게 여쭙기를 대장장이가 술과 도박이 심하여 밑천까지 모두 날려 버리고 불쌍하게 되었으니 저 쇳조각을 돌려주는 것이 어떠한 가를 의논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자기가 모은 쇳조각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살피던 차에 아들이 이렇게 물으니 대단히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그 후 대장장이는 감격하여 술을 끊고 일을 열심히 하였고, 이항복을 존경하게 되었다. 말년에 이항복이 정적들의 음모로 북청으로 귀양 갈 때 대장장이는 이항복이 무사할 수 있도록 극진히 호위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감화는 아들 뿐 아니라 이웃사람들에게 까지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 부인은 일찍이 딸들에게도 특별히 훈계하였다. “ 비록 남매 사이라도 함부로 지껄이며 웃고 희롱해 예절을 손상케 하지 말라. 누울 때나 앉을 때나 말할 때도 각별히 삼가서 분별있게 하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항복이 집안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하여 자라는 것이 나약하게 될까 우려하여 절간에 공부하러 보냈다. 항복은 며칠에 한 번 씩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는데 최씨 부인은 그 편지를 읽고 아들의 공부가 진척되는 정도를 알았다. 이러한 어머니의 감화로 재상까지 오르게 된다. 이항복은 강직하고 바른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어머니 최씨는 항복이 16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자라는 동안 가르친 어머니의 끊임없는 감화는 훗날 항복이 재상까지 올라 임진왜란 때 국가적 위기에서 구국에 앞장서며 많은 업적을 남기는 데 초석이 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무신년(1608, 선조41) 8월 24일 맑음.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여 매번 수령 아들을 훈계하기를, “아주 삼가 하여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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