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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글 그림 정용연



▮ 무신년(1608, 선조41) 8월 24일 맑음.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여 매번 수령 아들을 훈계하기를, “아주 삼가 하여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인 김령(金坽, 1577~1641)이 그의 나이 27세부터인 1603년부터 그가 사망한 해인 1641년까지 쓴 일기로 8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봉제사 접빈객’ 등 일상사가 대부분이며 광해군 치하 대북 정권의 전횡과 훈척세력에 의해 추대된 인조반정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도 보인다. 또 지방관의 가렴으로 인한 민생의 심각성, 향시의 폐단 등에 대한 기록 등, 초야에 은거하면서도 중앙과 지방의 전반적인 일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 저자 : 김령(金坽 1577~1641)
    조선 중기 예안(안동)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증조부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 김효로(金孝盧), 할아버지는 김유(金綏), 아버지는 현감 김부륜(金富倫),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부호군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다.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정자가 되고 1615년 승정원주서로 승진했으나 대북당(大北黨)이 집권하자 즉시 벼슬을 버렸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외부와의 교섭을 끊었고 승정원에서 일기를 편수하기 위해 여러 번 상경을 독촉하자 한양에 가서 성 밖에서 일기를 닦아 올리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6품직을 받고 성균관직강과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했고 전적, 형조정랑, 의주판관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후 반신불수라고 핑계대어 예조정랑, 장령, 보덕, 집의, 사간 등 소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17~18년을 병폐인으로 자처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김령은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랬으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밖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낼 정도로 철저히 은거하여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 6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작가 소개

삽화 : 정용연
정용연
주요 작품으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과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의 난1374 제주" 가 있다.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8-24~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백곡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꾸준함의 중요성을 배우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0-12-24 ~

1800년 12월 24일, 맑은 날씨였다. 오늘은 명동에 사는 백곡 할아버지가 류의목의 할아버지를 보러 왔다. 류의목이 인사를 올리자, 백곡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요즘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어떠한 책을 읽고 있는지 등등을 물으셨다. 류의목이 대답하자, 백곡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리곤 류의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일을 할때는 그치지 말고 꾸준히 해야 성취가 있는 법이니라. 예전 계미년에 온 고을에 천연두가 번진 일이 있었다. 내가 천연두를 피하여 정동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마을을 터놓고 이야기할 벗도 하나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였는데, 무엇인가라도 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버들 수십 묶음을 얻어 새벽에 일어나 저물때까지 자리를 짰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서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를 다 만들 수 있었지. 이후에 이와 같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중에는 제법 속도도 붙었지. 이리하여 꽤 많은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마침 식량이 다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만든 자리를 장에 가서 내다 팔아서 쌀과 보리를 얻었는데, 이 식량이 꽤 많아서 천연두가 가시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오히려 남는 것이 있을 정도였지. 또 그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서 삼을 꼬는데, 내가 보니 밤새 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삼을 꼬다 남은 자투리가 버려지고 빠진 것들이 꽤 많았다. 이리하여 내가 아침 나절에 일어나서 버려지고 빠진 것들을 줍기를 여러 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돌아갈 무렵에 모은 양을 보니 열 묶음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베틀로 중포를 짜니 세 필이나 되었다. 일이란 모두 이와 같아서, 하루하루 할 때는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꾸준히 해가다 보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다’ 라고 감탄하셨다.

“공부를 게을리하다 할아버지께 지팡이로 맞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9-17 ~

1801년 9월 17일, 맑은 날이었다. 오늘 류의목은 『서경』 문후지명을 읽었다. 밤에 법산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 무척 반가웠다. 보통 밤시간에는 독서를 하며 공부하였는데, 오늘은 책 앞에 앉지 못하고 칼로 감을 깎으며 법산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평소부터 익살이 많던 법산 아저씨인지라, 이야기를 듣다가 곧 웃고 떠들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평소 할아버지는 이 시간이 되면 늘 밤을 틈타 몰래 엿들으며 류의목이 공부를 하는지 여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문틈으로 류의목의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자, 문 밖으로 류의목을 부르더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매질을 하였다. 아울러 법산 아저씨를 향해 크게 책망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엄준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이 웃고 떠들며 하는 말이 서경에 있는 내용이냐?’ 라며 심하게 질책하셨다. 질책을 받는 동안 법산 아저씨는 방안의 벽 모퉁이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떨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명을 들을 뿐이었다.
한참 훈계를 하신 할아버지가 떠나시자, 비로소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은 다시 자리에 낮을 수 있었다. 한참 혼인 난 후라 바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였다. 법산 아저씨는 류의목에게 매우 미안해 하였는데, 실상 류의목 역시 같이 재미나게 어울렸던 터라 법산 아저씨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법산 아저씨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내가 내일 어찌 사람들을 보겠는가’ 라며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였다. 류의목은 비록 할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큰 일은 없을 거라 법산 아저씨를 위로하였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공부 시간에 잡담을 나누는 본인에게 큰 실망을 느끼며 밀려드는 자책감에 민망하였다.

“6살 아이가 성리학을 묻다”

朱子大全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장흥효, 경당일기, 1624-01-07 ~

1624년 1월 7일, 제자들이 몇 년째 자신을 찾아오면서 혼자 하는 공부를 넘어 함께 하는 공부로 발전하였다. 무릇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든 것을 혼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고 하여도 읽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주석서를 내었고 주자는 그것을 자기 관점으로 다시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
장흥효도 나름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황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점을 제자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사달(四達)이라고 불리는 이제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와서 묻기를 “땅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라고 하기에 그는 “하늘에 붙어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단순하게 땅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질문 자체가 놀라웠던 것이다.
아이는 장흥효의 답변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늘은 어디 붙어있습니까?” 장흥효는 “땅에 붙어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일기에 총명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외손자인 이휘일로 이황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불리는 이현일의 형이 된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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