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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고찰 부석사 선방에 별빛이 쏟아지다
김령은 아침으로 죽을 한 그릇 바삐 먹고,
부석사(浮石寺)
로 갔다. 겨우 30리 거리밖에 안되어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하였다. 중들에게 밥을 지으라 하고는 경내를 둘러보았다.
아미타불을 안치해놓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은 웅장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양 옆으로는 동서 회랑이 연결되어 있는데, 서쪽 회랑 끝으로 세워진
취원루(聚遠楼)
는 높고 시원하게 확 트여 있어 한 눈에 백 여리가 보였다. 첩첩으로 쌓인 여러 산들이 흩어져 있는데, 아득한 시선 가운데 오직 학가산만이 동남쪽에 우뚝 솟아있었다. 옛 사람들이 써놓은 이름이 수없이 많은데,
주신재(周愼齋)
가 1542년에 이곳에 놀러 와서 벽에 쓴 글씨는 먹 빛깔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었다.
무량수전 남쪽 계단 앞에는 작은 누각이 붙어있고, 그 아래에는 법당이 누각을 등지고 있었다. 그 앞에는 종루가 있고, 종루의 아래에는 놀랍도록 장대한 사천왕상이 호위하고 서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숲길이 해를 가리고 조릿대가 온 산에 가득하였다. 조사당(祖師堂)에 이르면 처마 밑에 나무 한 그루가 벽 틈새로 뿌리를 내린 채 사계절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가 꽂아둔 지팡이에서 가지가 나고 잎이 생겨 수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
저녁 무렵에 내려와 밥을 다 먹고 선방으로 돌아오니 감실에는 이미 등불이 밝혀졌고 풍경 소리가 울렸다. 서늘한 바람이 그치질 않고 별빛은 난간에 쏟아지는데, 누운 채
동파(東坡)
의 시 ‘반룡사(盤龍寺)’를 읊으니 더욱 풍미가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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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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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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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부석사, 산행, 풍류
시기 : 1615-07-03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의상대사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6호
웹진 담談 6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찰 유람
과거 봉건사회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여행은 현대인들의 여행보다 더 깊고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인들의 유람 여정을 9편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살펴보면, 현재의 지명과 다소 차이가 있고, 특히 그들이 숙박 장소로 지낸 사찰의 경우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다.
-이동수단: 유람록을 남긴 인물들은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유람 간 의 이동수단을 보면 대체적으로 말을 타고 이동한 경우가 가장 많다. 지리산에 들어와서는 좁고 험한 산길이 많아 주로 지팡이를 짚고 도보로 이동했고, 평지 혹은 산길이 아닌 경우는 말을 타거나 남여(藍輿)를 타고 이동했다. 간간이 시내를 건너야 할 경우에는 승려의 등에 업혀 건너기도 했고, 가파른 길을 내려올 때는 나무를 잘라 만든 기구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이들의 신분이 양반계층이었기에 유람간의 이동을 비교적 수월하게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숙박장소: 지리산유람은 긴 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이다. 그렇기에 말과 도보로 이동하던 당시에는 숙박장소가 반드시 필요했다. 숙박장소는 대부분이 지리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고, 간혹 친척과 지인들의 집에서 묵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동수단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신분을 가졌다. 그래서 사대부인 양반이 사찰을 방문할 경우 숙박장소 제공은 물론 술과 음식까지 대접했다. 물론 이튿날 사찰을 떠날 때 승려에게 시주의 형식으로 돈이나 쌀 등을 건네는 경우도 간간이 있으나, 지금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독특한 경우로 여겨진다.
유람간의 휴양행태 선인들의 유람록을 보면 등산, 계곡에서의 물놀이, 자연경관 조망 외에도 다양한 휴양 활동들이 나타난다. 휴양 활동은 주로 이동 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숙박지에 도착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식사와 음주가 잦았다. 특히 음주는 거의 매일 이루어질 만큼 그 빈도가 잦다. 이동을 하며 쉬는 중간 중간 술을 한 순배씩 돌렸다거나, 일정 간에 지인을 만나 음주를 했다거나, 숙박지에 이르러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일행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구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찰에서 숙박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승려들이 제공하는 술과 음식을 먹었다. 사찰에서 음주를 할 때는 승려가 흥을 돋우기 위해 춤과 노래를 하기도 하며, 어떠한 경우는 악공들의 연주와 기생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래서 유람하는 동안 악공과 기생들이 대부분 동행했으며, 이동 간에는 그들로 하여금 풍악을 울리게 했다.
두 번째는 문학 행위다. 숙박을 위해 사찰에 머물 때 승려들과 심오한 대화를 나누거나, 독서 혹은 글을 외고, 일행들과 강론을 하는 등 당시 사대부들의 면모를 나타냈다. 또한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행위인데 시(詩)를 짓는 것이다. 천왕봉 정상에 올라 주변을 조망하며 시를 읊고, 승려와의 대화를 마친 후 시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음주를 하며 일행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기도 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을묘년(1615, 광해군7) 7월 3일 맑음. 아침죽을 재촉하여 먹고 부석사(浮石寺)로 갔다. 정보(精甫)·용보(用甫)·유생 권상원(權尙遠)과 동행하여 오시가 되기도 전에 도착하였는데 겨우 30리쯤이었다. 중들에게 밥을 지으라 하여 먹은 뒤에 두루 돌아보았다. 나는 일찍이 계묘년(1603) 가을에 이곳을 구경하였으니 이번이 두 번째로 온 것이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이 절의 대웅전으로 아미타불을 안치해 놓았는데, 아주 거대했다. 신라 시대 의상선사(義相禪師)가 창건하였고 근래에 계욱(戒旭)이라는 중이 중건하면서 웅장한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대웅전 바깥 서쪽 벽에 초서 절구(絶句) 한 수가 쓰여 있는데 바로 황기로(黃耆老)의 글씨로 무쇠처럼 필획이 뚜렷하여 볼 만하였다. 무량수전 양 옆으로 동서(東西) 회랑이 있는데 서쪽 회랑에 연결된 취원루(聚遠楼)는 높고 시원하게 확 트여 있어 한 눈에 백 여리가 보였다. 첩첩으로 쌓인 여러 산들이 눈 아래에 흩어져 있고, 아득한 시선 가운데 오직 학가산(鶴駕山)만 동남에 우뚝 솟아 있고, 소백산(小白山)이 잇달아 서북으로 걸쳐져 있었다. 옛 사람들이 써 놓은 이름이 수없이 많은데 주신재(周愼齋)가 가정(嘉靖) 임인년(1542)에 이곳에 놀러 와서 벽에 쓴 글씨는 먹 빛깔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었다. 제영(題詠)도 많은데 그 가운데 문 사성(文司成), 정호음(鄭湖陰)과 주신재의 시가 가장 표표하게 드러나 보였다. 또 기문(記文)과 고시(古詩)가 문설주 사이에 있는데 이항(李沆)이 영천(榮川) 수령으로 있을 때 지은 것들이었다. 이 시문이 비록 남아 있어 후인들이 읽어보면 다른 여러 글들과 비등하지만 백 세 뒤에도 남긴 악취에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니 문사(文詞)의 공교함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무량수전 남쪽 계단 앞에 작은 누각이 있어 계단에 붙어있고 계단 아래에는 법당이 누각을 등지고 있다. 연이어 그 앞에는 종루가 있고 그 아래에는 중문(中門)이 있는데 문 안에는 사천왕[四大王]이 호위하고 있어 장대한 모습이 놀랍도록 사나웠다. 법당에 걸려 있는 작은 종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냇가 모래밭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이 절의 이름을 부석으로 한 것은, 세속에 전해지는 말로는, 절을 창건할 때 귀신이 실어 날라 큰 돌들이 나는 듯이 날아와 하루가 채 되기도 전에 공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절 문 밖에서 취원루까지 울퉁불퉁한 돌로 축대를 쌓았는데 돌의 전면은 마치 갈거나 연마해 놓은 듯이 한 조각의 오차도 없이 비희(贔屭 : 거북 모양의 문양)로 둘러져 있었다. 높이는 적을 막아낼 성벽과도 같으니 참으로 장대한 자취였다. 동북쪽엔 숲길이 해를 가리고 조릿대가 온 산에 가득하였다. 조금 올라가 조사당(祖師堂)에 이르면 나무로 만든 불상이 의연하게 서 있으니 의상대사라고 한다. 처마 밑에 나무가 있는데 벽 틈새로 뿌리를 내린 채 비와 이슬이 닿지를 않으나 사계절 늘 푸르다. 중들은 처음에 의상대사가 아미타전 건립을 마치고 스스로 여기에 상을 깎아 세웠으나 얼마 뒤에 암자는 허물어져 없어지고 간 곳을 알지 못했지만, 꽂아둔 지팡이에서 가지가 나고 잎이 생겨 수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무의 줄기는 겨우 손가락 정도인데 넝쿨이 나면서 떨기를 이루었고 높이가 4,5척이다. 잎사귀는 회양목과 거의 비슷한데 엷고 성글며, 평평하나 둥글지 않으니 버드나무 종류는 아니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후인들이 널빤지에 판각을 해 놓았다. 이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수십 보의 거리에 있는 영산전(靈山殿)을 지나면 작은 암자 하나가 있는데 그 암자의 주인은 덕장(德藏)이라는 승려로 지난해에 이미 죽었다. 암자에는 나무로 만든 수로에서 졸졸졸 물이 떨어지고, 창 밖에는 해바라기가 무리지어 피어 있어 가냘프고 아리따워 구경할 만했다. 나는 덕장과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라 시구를 지어 심회를 부쳤다. 저녁 무렵에 내려와 밥을 다 먹고 선방으로 돌아오니 감실에는 이미 등불이 밝혀졌고 풍경 소리가 울렸다. 서늘한 바람이 그치질 않고 별빛은 난간에 쏟아지는데, 누운 채 동파(東坡)의 시 ‘반룡사(盤龍寺)’를 읊으니 더욱 풍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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