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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그물을 쳤으나 허탕을 치다
1598년 10월 8일, 오희문은 아침 일찍부터 앞뜰에 있는 밭에서 수확한 팥을 두드렸다. 모두 1석 2두가 났는데, 이 중 2두는 언명의 집에 주었다. 언명이는 춘금이를 데리고 아침에 황촌으로 건너가서 둔전 곡식 두드리는 것을 손수 감독했다.
팥 타작을 마치자 오희문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달 이맘때쯤 매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태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매가 잡혔는지 여부도 확인해 본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종 한 명을 데리고 매 그물을 친 곳에 가 보았다.
가서 확인해 보니, 매를 유인하기 위해 메어 놓은 닭 두 마리가 모두 죽어버렸다. 요 며칠 사이 일이 많아 가보지 못하였으니 아마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은 것이리라. 이 그물에다 미끼로 메어 놓은 닭이 모두 5마리였는데, 그 닭을 모두 잃고 한 마리 매도 잡지 못하였으니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물을 치고 묶고 하는 수고까지 더하면 이 얼마나 허망스러운 것인가. 오희문은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그물을 모두 걷어 오도록 하였다. 미끼로 쓴 닭이라도 잡았으면 5일 동안 어머니 밥상은 근사하게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아까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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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쇄미록(𤨏尾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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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98-10-08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90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오희문
◆ 매사냥이란 무엇인가
대개 동물종 이름 뒤에 ‘사냥’이라는 말을 붙이면 그 앞에 있는 동물종은 사냥 대상물을 뜻한다. 예를 들면 ‘고래사냥, 꿩사냥’이라고 했을 때 고래와 꿩은 사냥 대상물이다. 그러나 ‘매사냥’에서 말하는 매는 사냥의 대상물이 아니라 사냥 수단이다. 즉, 총기사냥에서 총기와 같은 것이다.
매사냥은 인류가 가축 사용에 익숙하게 된 신석기시대부터 비롯되었다. 그 발상지는 세계 여러 곳이라는 설과, 아시아 중부에서 발생하여 전파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전파설이 유력하다. 남서로 전파된 매사냥은 인도·이란·이집트 등 고대문명에 흡수되어, 그리스·로마의 매사냥이 되었다.
중세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풍미하여 잉글랜드의 색슨왕조에서 개화되었다. 즉, 샤를마뉴 왕은 국비로서 응장(鷹匠:매훈련사)을 양성하였고, 프리드리히 왕은 스스로 매사냥에 관해 저술하였다. 중세 말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귀족가문의 기예(技藝)가 되어 오락과 세력 과시의 유기(遊技)가 되었다.
한편, 발상지인 아시아에서는 한민족(漢民族)이 동북 만주지방의 미개인으로부터 이를 습득하였다. 그 후 그들 사이에 번져 한(漢)·당(唐)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국기(國技)로서 대규모적인 매사냥을 하였고, 요(遼)의 천조제(天祚帝)는 매사냥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하였다고 고증(考證)될 정도였다. 매사냥은 실질적 생업인 수렵으로 발상하였으나, 봉건국가에서는 동서양 모두 이를 공적(公的)인 행사로 삼았다.
- 한국의 매사냥
한국에서의 매사냥은 기원 전후 고조선시대에 만주 동북지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으로부터 이를 습득하였다. 그 후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에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룩한 매사냥 기술은 중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일본에도 백제의 귀화인들이 매사냥을 전승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보인다. 또한 ‘해동청(海東靑)’이라는 질이 좋은 사냥용 매는 간도(間島)와 북한지방에서 산출되는데,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어 이들 나라로부터 귀히 여겨졌다.
고려시대 충렬왕은 처음으로 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또한 이의 경영을 위해 몽골[蒙古]에서 기술자를 데려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응방제도를 계승하여 궁중에 내응방(內鷹坊)까지 두었다. 연산군 때에는 응방의 편제를 확대하여 좌·우응방을 두고, 여기에 많은 병졸을 배속시켜 전문적으로 매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매사냥은 대체로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하였으나, 민간에도 확산되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국에서 행하여졌다
- 심신 단련을 위한 매사냥
심신 단련을 위한 사냥의 본보기는 신라 진흥왕(540~576) 대에 공인된 화랑도에서 찾을 수 있다. 15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3년 동안, 경주 남산을 비롯해서 지리산과 금강산 등으로 다니며 무술을 익히는 한편,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겼다. 풍류도(風流徒) 또는 국선도(國仙徒)라는 별명은 이에서 왔다.
고려시대의 임금 가운데에도 심신 단련을 위해 사냥터에 나선 사람이 적지 않다. 매사냥을 매우 즐긴 공민왕은 신하들이 만류하자, “사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의 사나운 성격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금의 놀이 매사냥을 ‘유렵(遊獵)’이라고 따로 표현하였다. 이에 관한 기사는 19건으로, 성종이 7건이고 태종이 4건, 그리고 숙종이 2건이다. 나머지는 정종, 단종, 세조, 연산, 중종, 명종 등이 각 1건씩이다.
정종은 원년 9월 10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해주로 매사냥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도 같은 곳으로 가면서 “내가 오래된 병이 있어서 가는 것이니 막지 말라”고 일렀다(2년(1400) 9월 19일). 그리고 10월에도 “내가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한 탓으로 병이 났다. 한 번 나가서 울울하게 맺힌 기운을 풀려고 한다”며,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쳤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태종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영명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도 신하들의 만류를 여러 번 뿌리치고 사냥에 나섰다. 원년 3월 7일에 강원도 철원 등지로 떠날 때 사간원에서 반대 상소를 올리자, “이번 사냥은 군사 훈련도 아니고, 농민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왜 막는가?” 하며 화를 냈다. 사간원에서 다시 “그렇다면 더욱 명분이 없는 거둥이니 그만두어야 합니다.”고 막았지만, 듣지 않았다. 그가 매사냥 구경을 자주 나섰던 것도, 보통 때 쌓인 울적한 심정을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많은 임금들의 사냥 구경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세조의 경우, 재위 14년 동안의 사냥 관계 기사는 무려 148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은 서너 번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구경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해 열 번 이상 나선 셈이다. 그가 이처럼 빈번하게 거둥한 것은 조카 단종과, 자신을 반대하는 여러 신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마음의 괴로움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단종과 세조대에는 지방의 수령이 군졸들을 이끌고 유렵을 즐기다가 벌을 받았다. 이러한 폐단은 매우 극심했던 모양으로, 성종은 지방으로 떠나는 관리에게 유렵을 즐기지 말라는 당부를 세 차례나 하였다. 앞에서 든 유렵 통계 가운데, 임금의 사냥에 관한 기사는 세조대의 것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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