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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그물을 쳤으나 허탕을 치다


1598년 10월 8일, 오희문은 아침 일찍부터 앞뜰에 있는 밭에서 수확한 팥을 두드렸다. 모두 1석 2두가 났는데, 이 중 2두는 언명의 집에 주었다. 언명이는 춘금이를 데리고 아침에 황촌으로 건너가서 둔전 곡식 두드리는 것을 손수 감독했다.

팥 타작을 마치자 오희문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달 이맘때쯤 매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태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매가 잡혔는지 여부도 확인해 본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종 한 명을 데리고 매 그물을 친 곳에 가 보았다.

가서 확인해 보니, 매를 유인하기 위해 메어 놓은 닭 두 마리가 모두 죽어버렸다. 요 며칠 사이 일이 많아 가보지 못하였으니 아마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은 것이리라. 이 그물에다 미끼로 메어 놓은 닭이 모두 5마리였는데, 그 닭을 모두 잃고 한 마리 매도 잡지 못하였으니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물을 치고 묶고 하는 수고까지 더하면 이 얼마나 허망스러운 것인가. 오희문은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그물을 모두 걷어 오도록 하였다. 미끼로 쓴 닭이라도 잡았으면 5일 동안 어머니 밥상은 근사하게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아까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98-10-08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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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를 잡게 해달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1599년 9월 12일, 얼마 전 오희문은 매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쳐 두었다. 매사냥으로 집에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함도 있고, 여기저기서 매를 구하는 친구들의 부탁을 매번 거절하기도 어려워 매를 잡아보고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물을 쳐 두고, 미끼로 닭을 한 마리 묶어 두었다. 이제 매가 잡히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매 그물에 두어둔 닭을 지난밤에 여우와 살쾡이들이 물어간 모양이었다. 들으니 판관 최응진은 그물을 쳐서 큰 매를 잡았다고 하던데, 오희문은 계속해서 닭만 잃고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은 것 외에는 거의 20일 동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것은 비록 사람이 부지런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오희문의 생각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일로 오희문이 무척 상심해 있자, 주변 사람들이 와서 요령을 일러주었다. 정성스럽게 술과 반찬을 차려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허망한 것임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희문은 춘금이로 하여금 술과 반찬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제 제사도 지냈으니 얼마나 큰 매가 잡히는지 기다려 볼 심산이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99-09-12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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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가 먹이를 먹지 않다


1600년 9월 22일, 얼마 전 김업산에게 도로 빼앗아온 매는 오희문의 집에 온 날부터 먹을 것을 먹지 않았다. 산 닭을 잡아서 주었으나 역시 달게 먹지 않으니,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매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모두 모른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본시 이 매는 김업산에게 맡겨 길들여 사냥을 시키게 하고, 잡은 것을 얼마간 오희문 집에 가져오라고 했던 것인데, 김업산이란 자가 자주 오희문을 속이기에 매를 도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 자는 본성이 미련하고 사납고 불순해서 이전에도 공손치 못한 말이 많았고, 그 자식도 역시 표독했다. 아마 올해도 이 매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 했는데, 오희문이 하루아침에 빼앗아 왔으니 이 매에게 그 분풀이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오희문은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아무리 김업산이 사나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미쳤다. 아무래도 오희문 스스로가 요사이 여러 걱정에 너무 날카로워진 듯하였다.

이 매는 본래 먹이를 잘 먹는 놈이었는데, 이제 비단 먹이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닭을 묶어 시렁 위에 올려놓아도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필시 병이 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외양을 보면 전혀 병든 매의 모습이 아니니 괴상한 일이었다. 며칠 정도 두고 보다가 참으로 병이 있으면 즉시 김업산에게 돌려보낼 생각이다.

이 김업산이란 자는 마을사람들에게 떠들기를, 누구든지 이 매를 훈련해서 날린다면 내 마땅히 그 사람과 척이 져서 욕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오희문이 잠시 그를 의심했던 것도 바로 이 말 때문이었다. 오희문은 먹이를 먹지 않는 매를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600-09-22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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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를 지인에게 팔다


1600년 10월 9일, 오희문은 오늘 사람을 시켜 매사냥을 할 계획이었다. 얼마 전 김업산에게 맡겨 두었던 매를 다시 거두어왔는데, 오희문 집에서 매가 한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 애태웠는데, 근래 다시 먹이를 먹고 건강해졌기에 오늘쯤 매사냥을 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오전에 이웃 안협 고을에 사는 진수가 찾아왔다. 오희문의 매를 사고자해서이다. 매 값을 주면서 팔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팔지 않으려 하였다. 오희문의 매는 덩치도 클 뿐만 아니라 사냥도 아주 잘하는 것이어서 선뜻 팔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비록 훈련해서 날린대도 집에 매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 매번 딴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잡은 꿩도 서로 나누어야 할 터였다.

더구나 이 매는 일찍이 콧병을 앓았으니 만일 날렸다가 다시 병이 도지면 다시 구제할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사냥하다가 만일 도망하기라도 한다면 도리어 본전도 잃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매를 팔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오희문은 진수에게 매를 팔았다. 값으로 필목 6필과 백목바지 한 벌, 두루마기 1벌과 정목 2필을 받았다. 거기에 다 나중에 꿩 10마리를 잡아오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 매는 몹시 잘 길러서 새로 털갈이를 하였고, 털빛이 은과 같은데다가 재주도 아주 좋았다. 김업산에게 다시 거두어온 이후 인아가 10여 일 동안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훈련시키고 길들였는데, 꿩 한 마리도 잡아보지 못하고 보내게 되었으니 꼭 보물을 잃은 듯하였다. 그러나 매 값을 아주 후하게 받았으니, 이는 참으로 흐뭇한 일이었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600-10-09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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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권숯돌
권숯돌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방송작가 일을 하다가 이십대 후반에 심리학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와서는 지금까지 눌러살고 있다.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좋아한다. 2019년 다음웹툰에 연재된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의 일대기 <희순할미> 스토리를 썼다.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13 ~ 1617-03-25
1617년 3월 13일, 김응희가 문단(文壇)으로 가서 그 편에 충의위 이절과 좌수 황열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김택룡에게 답장이 왔다. 김응희의 전세[田稅, 논밭의 세금 즉 토지세]를 결정할 때 경작한 수량을 지나치게 많게 하였는데, 이것은 서원[書員, 세금담당 아전] 김국(金國)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황열과 김개일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5일 뒤 3월 18일,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금담당 아전 김국이 시경[時耕, 진전이 아니라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수량을 지나치게 많이 책정한 것에 대해 그 사정을 물어봐달라고 했다.
3월 24일, 김택룡은 풍종을 영주 군내로 보내 별감 김개일에게 말을 전하도록 했다. 세금담당 아전인 김국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3월 25일, 아침에 풍종이 영주 군내에서 와서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편지에는 세금담당 아전 김국을 보내 전결[田結, 논밭의 조세]의 부풀린 수량을 조사하라고 시키겠다는 말이 있었다. 김택룡의 답세(畓稅)는 읍인(邑人)이 75복(卜) 7속(束), 명이(命伊)가 28속(束)을 속여서 숨기고 명산호(命山戶)에게 이송하였는데 지금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응희와 호노[戶奴,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는 노비]의 일인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므로 김택룡은 매우 통탄스러워했다. 시기[時起,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논밭]도 역시 30여 복(卜)을 더 부풀려 기록해놓았으므로 모두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세금담당 아전 김국은 유숙하였다. 김택룡은 김응희와 상의해 처리하려 하였지만, 김응희가 김 참판 장례에 석회를 굽는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상의는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10-08 ~ 1634-11-23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소작료가 걷히지 않는 논, 상황 조사를 시작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9-27 ~ 1617-10-08

1617년 9월 27일, 김택룡이 종손(從孫)이를 농사짓는 논이 있는 마평(馬坪)에 보냈다. 또 그 곳에는 다른 사람이 농사짓는 전답 두 곳도 있는데 그 동안 대가는 커녕 요역과 부세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김택룡은 김응희에게 양전행심책(量田行尋冊)을 가지고 가서 살펴보라고 청했다. 아울러 별감 이여함에게 사표(四標)를 찾아 조사해보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양전[量田, 논밭을 측량]할 때 복만(卜萬)의 전답으로 측정되었던 것을 다른 사람이 경작하여 먹고 있었음을 알았다. 김택룡은 서서히 찾아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0월 4일, 김택룡은 아침에 풍종을 도촌에 보냈다. 마평(馬坪) 전답 두 곳을 권굉(權宏)의 노비 윤복(允卜)과 이성간(李成榦)의 노비 일년(一年), 그리고 김 서방이라고 칭하는 여러 사람이 갈아 먹은 지 오래 되었는데 세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서 부르게 한 것이다. 풍종이가 와서 고하길, 모두 모레 오겠다고 했다 하였다.
10월 8일, 아침에 김호학(金好學) · 윤복(允福)이 마평 전답 일로 왔기에, 상황을 깨우쳐 보내며 부세(賦稅)를 내라고 명령했다.

“매 그물을 쳤으나 허탕을 치다”

오희문, 쇄미록, 1598-10-08

1598년 10월 8일, 오희문은 아침 일찍부터 앞뜰에 있는 밭에서 수확한 팥을 두드렸다. 모두 1석 2두가 났는데, 이 중 2두는 언명의 집에 주었다. 언명이는 춘금이를 데리고 아침에 황촌으로 건너가서 둔전 곡식 두드리는 것을 손수 감독했다.
팥 타작을 마치자 오희문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달 이맘때쯤 매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태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매가 잡혔는지 여부도 확인해 본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종 한 명을 데리고 매 그물을 친 곳에 가 보았다.
가서 확인해 보니, 매를 유인하기 위해 메어 놓은 닭 두 마리가 모두 죽어버렸다. 요 며칠 사이 일이 많아 가보지 못하였으니 아마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은 것이리라. 이 그물에다 미끼로 메어 놓은 닭이 모두 5마리였는데, 그 닭을 모두 잃고 한 마리 매도 잡지 못하였으니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물을 치고 묶고 하는 수고까지 더하면 이 얼마나 허망스러운 것인가. 오희문은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그물을 모두 걷어 오도록 하였다. 미끼로 쓴 닭이라도 잡았으면 5일 동안 어머니 밥상은 근사하게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아까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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