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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시로 어울렸던 광대와 양반, 눈물로 헤어지다
1846년 9월 16일, 서찬규는 며칠간 망설였던 일을 하고 말았다. 창부(倡夫)들을 내보낸 것이다. 사실, 반년 동안이나 와서 의지했던 터라 그의 마음도 참으로 서운하고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창부 일행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 돌아간다고 말해놓고 행장은 이미 꾸렸음에도 눈물이 앞을 가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간 서찬규 생원 댁에서 편안하게 지냈는데, 이제 어디로 가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맑은 날씨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서찬규는 지난 2월 21일, 생원과에 합격하고 서울에 머무를 때 처음 그들을 만났다. 창부(唱夫) 조신성(趙新聲), 재인(才人) 강계술(姜啓述), 무동(舞童) 엄달운(嚴達運)이었다. 모두 전라도 사람들이었는데 그 실력이 출중했다. 특히 창부가 부는 쌍피리는 젊은 날의 풍취를 더해 주었다. 그들은 서찬규를 따라 서울에서 대구로 왔다.

그러나 대과를 준비해야 되는 때 이목이 염려되고, 가솔이 늘어나는 데 부담이 있어 4월 28일에 잠시 창부들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6월 2일에 창부(倡夫)들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를 의탁하길 청해와 다시 들어와 지냈던 것이다. 그들은 서찬규의 절구를 노래하기도 하고, 공부하다 휴식 겸 산에 올라 경치를 노래할 때면 가락을 띄워 흥을 돋워주기도 했었다.
그 조선의 엔터테이너 3인은 이제 다시 예술을 사랑하는 양반을 찾아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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