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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9월) - “秋月”

경직도 중 달맞이

1년 중 가장 큰 달이 떠오르는 날, 가을의 풍족함에 감사하고 나누기 위한 축제가 열립니다. 바로 ‘추석’입니다. 삼국 시대부터 ‘가배(嘉俳)’라 하여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춤과 노래 및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이날을 즐겼습니다. 추석을 즐기는 방법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기쁨을 나누고 감사를 전하는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두운 밤을 은은하고 따뜻하게 밝혀주는 보름달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에 사는 우리에게 밤하늘의 달빛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고개를 들어 달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 간직한 소망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도 추석에 뜨는 보름달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 중 경상북도 예안에 살았던 김령(1577-1641)의 <계암일록>에는 달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김령은 27세가 되던 1603년부터 생을 마감한 65세의 1641년까지 39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 중에 8월 15일 추석날의 일기는 서른여덟 번(1641년 3월 12일 마지막 일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른여덟 번의 추석에 그가 밝고 환한 보름달을 본 것은 열 한번 뿐입니다. 추석의 보름달이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탓에 김령은 달을 만날 때마다 그 감흥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담談” 9월호 ‘이달의 일기’에서는 올 추석에도 밝고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길 바라며, 김령이 달을 보았던 8월 15일 추석 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1613년 8월 15일

맑다가 간혹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병든 몸을 무릅쓰고 방잠재사(齋舍)에 가서 선친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생질 설과 광석이 집사를 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하늘에는 한 조각의 그늘도 없고 달은 휘영청 밝아서 만리가 한 빛이었다. 지난 계사년 (1593) 추석에는 달이 매우 밝았고, 그 뒤로는 흐리거나 비가 와서 한 번도 명쾌한 적이 없었다. 오늘 밤에는 다행스럽게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으나 병 때문에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한탄스러웠다.

  • 방잠재사 : 방잠은 현 안동시 와룡면 법정리에 있는 김령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이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공간이다.

1616년 8월 15일

맑음. 아침에 방잠재사로 가서 제물을 살펴보았다. 오시(11~13시)에 돌아가신 어버이께 절제(節祭)를 지내고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판사 형, 생원 형, 서숙 그리고 김참이 다 모였다. 달구경을 하기 위해서였다. 덕여도 참석하였다. 달이 고개 위로 떠오르자 차가운 기운이 온 허공에 퍼지는데 수정처럼 푸른 하늘엔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이지와 이도가 도착하였는데 각자 술을 가지고 와서 잔을 돌리느라 이경(21~23시)이 되어서야 파했다.
한가위 달은 구름이 질투하지 않으면 반드시 비가 시기한다고 예로부터 기록이 있다. 청명함을 보기가 드물어 맑은 날이라고는 수 십 년 이래 오직 계사년(1593) ? 계축년(1613), 그리고 금년뿐이었다. 계축년 가을에 내가 마침 병이 들었고 금년에도 병이 들었다. 빈객을 마주하여 잔을 들기는 하지만 술을 마실 수가 없으니 매우 삭막하다.

  • 절제(節祭) : 삭망, 단오, 추석, 설날 등 절기에 지내는 제사이다
  • 판사 형은 김지(金址), 생원 형은 김평(金坪)으로 김령의 사촌형이며, 김참(金?)은 김령의 사촌동생이다. 서숙(庶叔)은 김부생(金富生)으로 할아버지의 서자로 김령의 숙부이다.

1619년 8월 15일

흐림. 아침에 방잠재사에 가서 제물을 점검하고 세아(世兒)와 생질 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어버이 산소의 추석 배소이다. 오후에 돌아오는 길에 상사 형수씨에게 들렀다가 집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짙은 구름이 사방에 끼어 하늘이 어두웠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사람을 보내어 이실을 부르니 이미 누워 자고 있었다. 나도 고단하여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조금 있자니 이실이 와서 억지로 가자고 졸라 마침내 함께 걸어서 내려왔다.

여희와 서숙을 흔들어 일으켰으나 모두 피곤하다고 사양하며 함께 가지 않았다. 후조당에 도착하니 이지 네 형제와 덕원이 그곳에 있어 등불을 밝히고 술을 마셨다. 밤이 오래되자 구름이 흩어지고 달빛이 새나왔다. 조금 있자니 가렸던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고 옥거울 같은 달이 환하게 나왔는데 한 점 흠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변화가 이와 같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내가 술잔을 들어 권하며 말하였다. “만일 고금 천하 국가가 이와 같다면 어지러운 날이 늘 많다고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 세아(世兒) :김령의 장남 요형(耀亨, 1604-1644)이다.

1620년 8월 15일

맑음. 아침에 방잠재사로 가서 어버이 산소에 추석 배소를 행했다. 두 생질 및 아이 세아(世兒)가 집사였다. 오시에 돌아왔다. 저녁에 이도가 거인에서 와서 버드나무 그늘에서 대화했다. 잔 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달빛이 휘황하게 밝아 한 점의 찌꺼기도 없었는데, 근년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지, 이실이 모두 아파서 다만 이도와 이야기했다. 두 생질 및 서숙도 함께 했다. 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팔월 보름달은 매년 구름에 가리어 명확하게 분별할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을 말하자면, 오직 계사년(1593)과 계축년(1613) 및 올해만 쾌청했다. 지난해에는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달빛이 밝았다. 그러하니 30년 동안 겨우 두세 번만 달을 보았을 뿐이다. 올해 같은 해는 드물다 할 것이다.

관련스토리 김령 <계암일록>, 1620-08-15~1622-07-22, 낙동강에 배 띄우고, 밤늦도록 달을 노래하다

1621, 8월 15일

안개가 짙게 끼고 흐렸다. 먼저 외가의 절제를 지낸 뒤 가묘에 보름 천례를 올렸다. 어두운 구름이 종일 끼고 걷히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이지, 이직 및 서숙 , 김참이 오고 자개 및 이실도 왔다. 모두 술을 가져오고 나도 술을 내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었는데 보름달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밤이 깊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닦아놓은 것 같았는데 거울처럼 달빛이 교교하였다. 인간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것 또한 어찌 이와 같지 못할까. 이리하여 술잔을 드니 매우 즐거웠다. 술자리가 끝나고 서로 이끌고 이직의 집에 가서 너덧 잔을 마시고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닭이 세 번째 울었다.

관련스토리 김령 <계암일록>, 1621-08-15, 추석 깊은 밤 거울 같은 달빛, 흥에 겨워 닭이 울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1622년 8월 15일

중추가절에 나그네의 회포를 견딜 수 있는가? 종일 읊조리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달빛이 매우 맑았다. 멀리 고향 산천을 생각하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추석의 달이 매년 마수(魔?- 재앙을 입히는 마귀)가 들어 한 해 한 번 좋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은 맑은 경치가 아주 뛰어나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외로운 객이 서울에서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한탄스럽고도 한탄스럽다.

  • 1622년은 김령이 승정원 주서로 재직할 때이다. 당시 <승정원 일기>를 정서하는 일로 고향 예안에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1623년 8월 15일

아침 일찍 방잠재사에 가서 제물을 살펴보았다. 짙은 안개가 아득히 끼더니 밥을 먹은 뒤에 비로소 걷혔다. 오시에 선친의 절제를 재사 누각에서 지내고 돌아올 때 성묘를 하였다. 이날은 홀로 제사를 거행하여 꽤나 피곤함을 느꼈다. 대개 절을 하느라 무릎을 꿇어서 피곤했던 것일 터인데, 점점 노쇠해지는 탓일 것이다. 피곤해서 누워 있다가 이지, 이도가 온 것을 듣고 나가보았다. 밝은 달빛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중추가절에 맑은 경치는 접하기 어려운 것이니 가히 즐거운 정을 펼 만하였다. 그러나 나는 피곤하여 술을 마시지 않고, 이지도 그러하여 넉 잔만 마시고 파하였다. 덕여를 불러 함께 하였다.

1629년 8월 15일

밤이 되어 하늘이 투명하게 푸르고 달빛은 깨끗하고 밝아 티끌 한 점도 가려진 것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경치인데 병치레로 무료하게 멋진 밤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임술년(1622) 추석에 내가 일 때문에 서울에서 나그네 신세로 있을 때 달빛이 무척 좋았다. 그 뒤로 7-8년 동안 오직 그해 임술년과 올해만 추석달이 좋았고, 나머지는 모두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려 달이 가려졌으니, 추석 달을 보기 힘든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 1624년 1월 8일 김령은 한양으로 가는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 이후로 김령은 집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병치레를 자주하게 되었다.

관련스토리 김령 <계암일록>, 1624-01-08, 김령, 상경길에 낙마하여 벼슬을 물리다

1631년 8월 15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흐렸다. 큰아이가 가묘에 참례를 올리고, 다음에 외가의 절제를 지냈다. 밥을 먹은 뒤에 갰다. 밤이 되자 달이 떴는데, 옅은 구름이 오락가락 하더니 얼마 있다가 옥처럼 푸른 하늘이 씻긴 듯 만리나 탁 트이게 맑고 달빛은 교교하여 머리카락도 비출만하였다.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술잔을 멈추고 달에게 묻노니(停盃問月)’라는 가사를 소리 높여 읊조리니 족히 맑은 정취를 실어 보낼 만하였다.

1634년 8월 15일

아침에 비로소 갰다. 아이들이 함창 가묘에 제사를 지내고, 그길로 가묘에 참례를 올렸다. 밥을 먹은 뒤에 아이들이 앞내로 나갔다. 비암(鼻巖) 아래에 은어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시험 삼아 그물질했는데 40여 마리를 잡았다. 밤이 되어 달이 솟아오르고, 조금 있으니 또 엷은 구름은 점점이 이어졌다. 한가위 보름달이 밝고도 상쾌하였으니 자고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1635년 8월 15일

쾌청하였으나 매우 서늘하였다. 아침에 아이들이 함창(咸昌)재사를 지내고, 밥을 먹은 뒤에 제물을 나누어 주었다. 방잠 재사에 가서 어버이께 절제를 오늘 지냈다. 오후 늦게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었다. 밤이 되자 구름이 날리더니 완전히 없어졌고, 달빛은 희고도 맑았다. 부질없이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시구를 읊어보지만, 더불어 완상(즐겨 구경함)할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다.

  • 함창재사 : 함창은 상주군의 옛 지명으로 함창은 김령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다. 함창재사는 김령의 외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김령은 추석날 저녁 보름달이 떠올라 환한 등불이 되면 그 달빛을 일기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김령의 추석 보름달에 대한 기억은 1593년 그의 나이 17살부터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 20년 동안 흐리거나 비가 와서 한 번도 명쾌하게 달을 본 적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1603년부터 1612년의 8월 15일 추석 날씨를 보면 ‘흐림’, ‘비가 내렸다’, ‘아침에 비를 뿌리더니 음산한 바람이 일어났다’ 등의 기록으로 보아 달을 보기 힘들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령은 서른일곱이 되는 1613년 8월 15일이 되어서야 ‘휘영청 밝은 달’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다행히 3~4년에 한 번은 추석에 보름달을 만납니다. 김령은 그렇게 열한 번의 달을 만났고, 바라보고, 기억하며 달과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1619년, 1621년의 보름달은 흐리고 짙은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아 김령의 애를 태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 보자 이내 구름이 걷히고 ‘옥 같은 달’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령은 달을 바라보며 짙은 먹구름이 걷히듯 어지러운 세상의 무거움과 팍팍한 세상살이도 이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길 바랍니다. 그러는가 하면 1629년에는 맑고 환한 달이 떠올랐는데 병치레로 그 경치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자 “밤이 되어 하늘이 투명하게 푸르고 달빛은 깨끗하고 밝아 티끌 한 점도 가려진 것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경치인데 병치레로 무료하게 멋진 밤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또 1622년에는 승정원 주서로 일하며 홀로 한양에서 추석을 맞이하는데 맑게 뜬 달을 보며 “금년은 맑은 경치가 아주 뛰어나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외로운 객이 서울에서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한탄스럽고도 한탄스럽다”고 외로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소림명월도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김령은 왜 그토록 달을 보고 싶어 했을까. 밝고 환한 둥근 달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김령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자의 빙호추월(氷壺秋月)은 그가 달을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빙호추월이란 얼음을 넣은 항아리와 가을 달이라는 뜻으로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선비들은 사계절의 달 중에서도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에 뜬 추월(秋月)을 가장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때론 그 달을 자신의 벗으로 삼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인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오우가(五友歌)는 선비의 다섯 벗을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이라고 꼽습니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벗인가 하노라
- 오우가(五友歌) 중 -

김령은 크고 환하게 뜨는 추석의 보름달을 보며 이 세상도 맑고 따뜻한 빛으로 밝혀지길 소망했던 것은 아닐까요? 김령이 남긴 시 중추월(中秋月)에는 만년의 시름을 쫓아주는 달을 반기며 달빛을 넉넉하게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한 가위 달
하느님은 한 가위를 저버리고 하지 않아서
달을 불러내어 만년의 시름을 쫓아주네
한결같이 푸른 높은 하늘에는 구슬 거울을 날리고
선경의 아득한 기운이 아르다운 누대를 덮치네
산과 강과 넒고 큰 땅에는 둘쑥날쑥한 그림자이고
생황 불고 학을 탄 신선들이 한만하게 노니네
애석하다 맑은 빛을 넉넉하게 보지 못하였으니
서재의 창에서 밤이 새도록 발걸이를 올리었네
- <계암선생문집> 중추월(中秋月) -

올 추석에는 보름달이 뜰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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