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 소문(所聞)이다. 소문은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인류 최고(最古)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문에 관한 속담과 사자성어들도 다양하다. 널리 쓰이기로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고, ‘나쁜 소문은 날아가고 좋은 소문은 기어간다’거나 ‘말은 갈수록 보태고 봉송(封送)은 갈수록 던다’는 속담도 있다. (‘봉송’은 정성껏 싸서 보내는 선물)
사자성어(四字成語)로는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곧 그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도청도설(塗聽塗說),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며 소문을 퍼뜨린다’는 봉인첩설(逢人輒說), ‘네 마리 말이 끄는 빠른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불급설(駟不及舌), 그리고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을 일컫는 유언비어(流言蜚語) 등을 들 수 있겠다.
속담과 사자성어는 오랜 세월에 걸친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바탕을 두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소문에 관한 속담과 사자성어들은 소문의 특성을 정확하게 지적해준다. 소문은 듣자마자 옮기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지기 마련인데다가 바로 그렇기에 전파 속도가 빠르며, 입길에 한 번 오를 때마다 윤색되면서 여러 단계를 거치면 근거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각별히 유념해야 할 점은, 소문이라는 게 아무리 근거가 희박해보이고 때로는 황당무계하더라도 그 나름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되고 유포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소문이 하필 그런 내용으로 그 시대, 그 사회에서 만들어져 유포되었는가? 소문의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보다 오히려 이 질문이 더 중요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정경운(鄭慶雲, 1556~?)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 실린 기이한 일에 관한 소문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1592년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10)까지의 일기로 이순신, 김덕령 등의 활약상, 명나라 군대의 횡포, 전란으로 피폐해진 한양 모습, 의병장들의 활동, 선조대 후반에서 광해군대 초반까지의 정치상황과 사회상 등을 담고 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 에 기록된 ‘얼굴이 여섯인 물고기’
“1601년 3월 4일 임인(壬寅), 충청도 서산 땅에서 연못의 물이 넘쳐나, 물고기와 개구리가 서로 싸웠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은 개구리 가운데 혹 머리가 끊어지고 배가 찢어진 것, 혹 발이 잘린 것이 부지기수여서 쌓인 것이 언덕 같았다. 군수가 감사에게 보고했고, 감사는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렸다.”
“1602년 12월 28일 을묘(乙卯), 황해도에서 세 가지 빛깔의 구름이 서로 싸우는데, 마치 나아가고 물러나며 공격하는 전쟁의 형상과 같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편 소문의 생산과 유포에 관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기록도 있다. 안동 출신 선비 김령(金坽, 1577~1641)이 39년 동안 쓴 일기 [계암일록](溪巖日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령은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지만 조정의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고향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한 채 세상을 마쳤다. 1631년 12월 10일자 일기 내용을 전후 사정과 함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안 현감이 고과에서 하(下)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를 받은 수령은 즉시 파직이었다. 헛소문이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예안 현감은 안달이 났다. 마침 경상 감사가 김령에게 안부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예안 현감이 혹시 자신의 거취 관련 내용이 편지에 있나 싶어 아전을 보내 물어왔다.
“저녁에 급히 아전을 보내와서 관찰사의 편지에 무슨 말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관찰사의 편지를 (예안 현감에게) 부쳐 보냈는데, 지금 보니 가소로웠다. 예안 현감이 고과에서 하(下)를 받은 것을 방백(관찰사)이 무엇 하러 내게 써서 보냈겠는가?”
소문의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경상 감영의 아전 권종립(權宗立)이 이택수(李澤守)라는 사람에게 “예안 현감이 고과에서 하를 받았다.”고 말했고, 이택수는 이것을 예안 현감 홍석우(洪錫禹)에게 전했으며 홍석우는 안동 부사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으나 아는 게 없다는 답을 들었다. 홍석우는 급기야 김령에게 경상 감사의 편지 내용을 묻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예안 현감 홍석우는 평소 백성들을 쥐어짜곤 하였다. 그런 홍석우였으니 자신의 학정(虐政)이 발각되어 파직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 그렇다면 당시 예안 관아와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 있던 홍석우에 대한 불만과 비판적 분위기, 이것이 아전 권종립이 처음 발설한 소문의 배경이라 할 것이다. 홍석우가 파직되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홍석우가 고과에서 하(下)를 받았다’는 소문으로 이어진 셈이니, 많은 사람들의 소망은 소문으로 전화(轉化)되기도 한다.
조재호(趙載浩, 1702~1762)는 영조 때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영영일기](嶺營日記)』라는 일기를 써서 남겼다. [영영일기]는 1751년(영조 27) 6월부터 1752년 8월까지 약 1년 2개월에 걸친 일기로, 관찰사의 공적 업무와 개인 일상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 관찰사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영영일기] 1751년 7월 9일자에는 흥해군수(興海郡守) 이우평(李字平) 관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우평은 서원석의 아내 잉질낭(芿叱娘)이라는 여인이 환곡(還穀) 관련 책임을 지고 잡혀 들어왔을 때 그 용모에 반했다. 이에 이우평은 서원석이 출타한 틈을 타 잉질낭을 다시 잡아들인 다음, 하옥시키지 않고 동헌 옆 곳간에 가두어두고 남 몰래 성적인 노리개로 삼았다.
이우평의 행태는 곧 흥해 일대에 소문으로 널리 퍼져나갔지만, 이우평은 자신의 악행을 덮고자 사람을 시켜 잉질낭이 집에서 음란한 짓을 했다는 혐의로 고소케 하였으며, 잉질낭을 남편과 만나지 못하도록 가두어놓고 노비로 삼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관찰사 조재호는 이 사건을 처리한 전말을 임금에게 장계(狀啓)하였다. [영영일기]에 기록된 장계의 일부는 이렇다.
“이러한 사실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개탄하여 원근(遠近)에 모두 전해졌습니다. 이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와 친히 조사하고 심문하니, 이우평이 겁을 주어 잉질낭을 간통한 사정이 낱낱이 드러나는데 과연 소문대로였습니다. 이같이 간악하고 음탕하며 불법을 저지른 사람에게 결코 잠시도 군수의 직책에 둘 수 없다고 하겠기에 우선 파출(罷黜)을 하였습니다.” (‘파출’은 파직해서 퇴출 시켰다는 것)
소문이 늘 뜬소문일 리는 없다. 소문은 부정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가 은폐시킨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왜곡과 거짓을 무너뜨리고, 일종의 여론을 형성하여 마침내 현실을 바로 잡는 구실을 할 때도 있다.
현실과 시대 상황에 바탕을 둔 소문의 네트워크
‘모든 소문은 현실과 시대 상황에 바탕을 둔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은 소문으로 전화(轉化)된다’, ‘진실을 드러내는 소문의 힘은 세다’, 이상 옛 기록 몇 가지를 통하여 살펴본 소문의 특성들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문이라는 것을 무시하여 흘려보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미디어로서의 소문이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 옛 기록들이 모두 개인의 일기(日記)라는 점이다. 국가적, 공식적 기록에서는 중시되지 않거나 다루는 빈도 자체가 낮은 것이 소문이지만,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는 소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다양한 소문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읽어내고 나아가 그 시대를 더욱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소문학(所聞學, rumorlogy)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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