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때문에 조용하기만 했던 예안(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현청이 갑자기 사람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예안현감의 사직서 소식에 놀란 고을 사람들이 현청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짜증과 화를 동반한 사람들이 예안현감에게 사직서를 반려 받고 고을에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귀가 약간 멀었던 예안현감이라고 해도,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해를 했을 터였다. 예안현감은 이미 경상감사 정온(호는 桐溪, 1569~1641) 대감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감사의 의지도 강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예안 고을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경상감사를 만날 차비를 갖추었다.
경상감사 정온은 그해 4월 파직된 전 경상감사 원탁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전 경상감사 원탁은 당시 도산서원 원장이었던 이유도의 개인적 송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유도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이로 인해 이유도가 사망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원탁이 이렇게 물러나게 된 데에는 개인의 의지보다 악화된 지역 여론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비록 개인적 송사이기는 해도, 경상감사가 도산서원 원장을 장살한 것을 지역 유림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안 유림들은 이 사안을 감사와 지역 유림들의 대립으로 몰아갔다. 예안 지역의 도산서원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예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유림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각종 회합과 통문을 통해 경상감사를 압박해 갔고, 이로 인해 결국 경상감사 원탁은 자리를 내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역 여론을 만들어 갔던 예안 유림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신임감사 정온은 이 같은 상황을 진정시키고, 여론을 몰아 경상감사를 파직까지 이르게 했던 지역 유림들을 조사해서 처벌하기 위해 내려왔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비록 전 경상감사 원탁이 실수는 했을지 몰라도, 정당한 업무 처리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항명한 것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예안현감으로서는 이래저래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예안 지역을 주시하고 있었던 경상감사 정온에게 예안현감이 더욱 좋지 않게 보였던 것은 바로 예안현감 개인의 와병이었다. 예안현감은 당시 귀가 멀어, 고을의 정사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사람됨은 자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고을의 일을 향리들이 마음대로 농단하는 상황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스란히 고을의 피해로 돌아왔는데, 경상감사 정온은 바로 이점을 문제로 들어 파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귀가 먼 예안현감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결국 예안현감은 사직서를 내고 파직을 피하려 했던 것이다.
예안 고을 사람들이 부리나케 현청을 찾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귀가 멀어 제대로 고을 일을 살피지 못하는 무능한 현감을 보내지 않기 위해 모두들 현청을 찾았던 것이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보이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구관은 늘 명관’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률적으로만 보아도 지금의 수령보다 더 좋은 수령이 올 가능성은 반반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수령이 교체되는 과정에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데, 그 부담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수령을 떠나보내는 비용으로부터 새로운 수령을 맞이하는 비용이 모두 백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령이 부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노자나 도착한 이후의 열리게 되는 연회비뿐만이 아니었다. 수령이 도착하면 대개 주위 지인들에게 인사하기 마련인데, 대부분 그 지역 특산물을 보내었다. 게다가 만약 수령이 권세가에게 상당량의 뇌물을 주고 부임했다면, 고을 전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선물로 인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전체가 백성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예안현은 지난 번 현감이 인사고과에서 두 번이나 좋지 않은 점수를 맞아 파직되었기 때문에, 지금 현감이 부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기 인사에 따라 수령이 교체되는 경우야 예측해서 모아둔 예산이라도 있지만, 연이은 파직과 파직으로 인해 교체되는 경우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1년 전에도 예정에 없던 교체로 인해 마을의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또 새로운 현감을 맞아야 하는 일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능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역할만 해준다면 바뀌지 않고 자리를 유지해 주는 것이 고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익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별하게 악독한 수령만 아니라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구관이 늘 명관’이었던 것이다.
1626년 음력 6월 10일
병인년(1626, 인조 4) 윤6월 10일 맑음. 예안현감의 사직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대개 어제저녁에 그의 종이 산양(山陽, 문경)에서 돌아왔을 때, 감사가 자신이 귀먹은 것을 폐단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물녘에 좌수 신충남(申忠男) 군이 와서 예안현감의 사직서 때문에 내일 고을 사람들을 모아 일제히 관아로 들어가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고, 또한 감사에게 글을 올릴 것이라고 했다. 대개 금여주(琴驪州, 금개琴愷) 언강(彦康)이 추가로 등록한 호패(戶牌)를 낙인(烙印)하는 일 때문에 예안현감을 보러가서 이 일을 주창했던 것이다. 예안현감은 자상하고 마음에 드는 인물이지만 다만 귀가 먹어 고을의 정사가 하리(下吏)에게서 나와 읍민들이 그 폐해를 입었다. 감사가 이 때문에 그를 파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빈번한 교체로 인해 맞이하고 전송하는 병폐 또한 적지 않으니, 아주 걱정스럽다. 글을 올려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는 근래의 폐습이 우습다. 그렇지만 어찌 그만두게 할 수 있겠는가.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