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다양한 행위를 내포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감각이지만, 이를 통해 발생하는 다양한 행위의 수반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욱더 ‘좋아하기’ 위해 발생하는 실천의 영역에 가깝다. 당신은 좋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기 위해 어디까지 해봤는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행동하게 되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에, 열정적으로 어느 한 곳에 사로잡혀 이러한 실천적인 영역을 꾸준히 넓혀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걸 덕후, 전문 용어로는 팬(fan)이라고 부른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팬’을 찾아보면 “특정 활동이나 공연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팬은 다양한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키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범주로 포괄하기 힘든 특징을 갖는다. 관객일 수도 있고, 마니아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동시에 브랜드 소비자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행위의 범주를 꾸준히 실천하고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특히 적극적인 팬 실천을 수행하는 층위에서 그들은 소비자이거나 네트워크를 활용자, 수집가, 늘 이동하는 주체이자, 큐레이터이고 (2차 혹은 더 다수의) 창작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진 팬의 수행성은 어디까지인가. 다른 건 몰라도 팬들의 세계는 한 번쯤 경험해(봤거나) 볼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팬의 탄생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기본적으로 적극적인 팬 수행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다’가 모토다. 미디어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술적인 측면에서 콘텐츠 제작이 일반인들에게 용이해지면서,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셀럽의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한 팬 활동 목록에 다양한 것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굴하고 탐구하는 것 또한 팬 실천의 일부이다. 심지어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다양한 활동의 가이드라인과 정보를 제공하고, 직접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잘 아는 집단 중 하나가 ‘팬 커뮤니티’다. 그들은 하나의 전략가로 자신을 위치 짓는다. 팬으로서의 주체성은 ‘내 셀럽 혹은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위한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심지어 유튜브에 올라오는 팬 대상의 영상 스트리밍 수 하나, 인스타그램의 하트 찍는 것 하나, X(트위터)의 리트윗 개수 하나도 전부 수치화되어 인기의 척도로 활용된다. 팬들의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팬 대상의 대중적 인기 척도에 수치화되어 카운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매년 주최하는 ‘신진 스토리 작가 육성 지원 사업’ 쇼케이스의 한 장면〉 (출처: otr.co.kr)
이 덕분에, 팬들은 자신이 후원하거나 열광하는 셀럽 혹은 콘텐츠가 어떤 식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케이팝 아이돌의 경우 앨범 판매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공연이나 쇼 케이스 홍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획사보다 팬들이 먼저 고민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그들의 구상을 디자인하고 시각화하는데 기획사보다 훨씬 뛰어난 역량을 보이기도 한다. 팬들은 홍보 동영상이나 소셜 미디어 노출을 위한 해쉬태그 이행을 꾸준히 실천하며 점차 팬 대상의 사회적 명성 획득에 전략적인 참여를 보인다. 여기서 이용되는 영상이나 이미지는 기존 방송 콘텐츠일 가능성도 있지만 팬들이 직접 찍거나 제작한 것도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전략들은 꾸준히 팬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 차를 보이며 노이즈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팬 문화가 한국에서 고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팬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하나의 미디어 전략가이자 2차 생산의 크리에이터로 주체화하고 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팬 활동에 있어 윤리적 가이드를 정하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셀럽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거리 두기를 지속한다던가, 팬덤 내부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유사연애대상으로서의 행위를 저지하고 금지하는 것도 팬들 자신이다. 팬 활동에 대한 의견차는 다양하지만, 그것이 서로 논의되며 성장하는 과정은 사회의 단면을 압축시켜 보는 것 같다.
『컨버전스 시대의 트랜스미디어 전략』으로 유명한 미디어 연구가 젠킨스도 자신의 저서인 『스프레더블 미디어』 (Jenkins, H., Ford, S., & Green, J. (2013). Spreadable media: Creating value and meaning in a networked culture. NYU press.) 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팬 커뮤니티와 정치적·종교적 집단은 서로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전도한다고. 팬덤은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며 소멸되기도 하고, 다시 부활하기도 하며, 어느 순간 크게 성장하여 스스로를 주체화하기도 한다.
〈연극·뮤지컬 관람을 즐기는 덕후를 뜻하는 ‘연뮤덕’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위의 그림처럼 ‘덕질력’을
확인할 수 있는 빙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출처: 구글 ‘연뮤덕’ 검색 결과)
세상에는 다양한 팬 대상이 존재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케이팝 아이돌의 팬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팬이라는 용어가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케이팝 아이돌의 등장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덤의 세계는 넓고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뮤지컬 마니아, 즉 뮤지컬 공연 팬덤은 독특한 팬 문화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
공연은 라이브니스, 즉 실황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의 공연이 완벽하게 반복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온라인 중계가 늘었다고 하더라도, 공연의 라이브니스를 향유하는 뮤지컬 팬들의 경험은 매개되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이 때문에 뮤지컬을 보는 관객들은 미디어 기술로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 ‘복제가 되지 않는’ 팬 대상을 갖고 있다는 문화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반복적인 공연 관람 경험을 시도하는 독특한 집단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뮤지컬 산업에서 같은 공연을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이용자는 팬 문화 생산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들은 공연을 보기 위하여 반드시 극장 안으로 이동을 해야 하며, 그 무대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이자 휘발되는 공연 기억의 소환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은 팬들에게 적극적인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며 팬 대상과 팬덤의 관계를 조율한다. 이들은 그날 본 공연들을 적극적으로 텍스트로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이 때문에 그들에게 ‘기록’과 ‘수집’은 중요한 팬 문화의 요소가 되었다.
하나의 공연을 여러 배우의 캐스팅으로, 여러 시즌에 걸쳐 진행하는 뮤지컬 산업은 재관람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관객들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재관람 혜택으로 주어지는 보상으로는 횟수에 따라 티켓 할인권이나 공연과 관련된 굿즈로 나뉘게 되는데, 횟수가 높을수록 혜택 또한 그 가치가 높아진다. 특히 재관람 혜택 중 하나인 폴라로이드 수집은 복제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일한 물질적 보상의 성격을 지닌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와 뮤지컬 《팬레터》의 폴라로이드 증정 이벤트〉
(출처: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 콘텐츠제작사 라이브)
뮤지컬의 흥행을 판가름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재관람의 확산을 위하여 공연 제작사가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혜택 중 하나인 폴라로이드 증정은 겉으로 봤을 땐 아이돌 팬덤 문화, 특히 피지컬 앨범 구매에서 관찰되는 ‘포토카드’ 제공과도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복제가 가능하고 복수로 존재하는 포토카드와 달리 폴라로이드는 단 한 장뿐이라는 유일성을 가지며, 무엇보다 뮤지컬에서 제공되는 폴라로이드는 그 공연의 인물을 재현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는 뮤지컬 공연이 갖는 즉각성, 현장성, 일회성이라는 장르적 특성과 맞물려 그 의미를 극대화한다. 그러므로 뮤지컬 공연과 이를 관람하는 관람객의 폴라로이드 수집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가 아닌 뮤지컬 장르의 정체성이 반영된 관람문화의 일부로 분석될 수 있다.
마크 더핏(Mark Duffet, 2013/2016) (Duffett, M. (2013). Understanding fandom: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media fan culture. Bloomsbury Publishing USA, 김수정 외역(2016). 〈팬덤 이해하기〉. 서울: 한울아카데미.) 은 “수집이라고 하는 것이 팬덤의 세계를 넘어서는 취미활동(269쪽)”이라고 언급하면서 최소 세 가지로 팬 수집품을 구분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공연자체를 기록한 앨범, 두 번째는 원래의 텍스트와 작가, 가수와 관련된 대량생산된 물품, 마지막으로는 관심 대상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독특하고 개인적인 자료라는 것이다. 특히 더핏은 수집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즐거울 뿐만 아니라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 이”들이나 “경제적 투자 동기”를 가진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언급하고 있다(269쪽).
뮤지컬 팬들에게 폴라로이드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배우가 극 중 캐릭터로 분장해 찍은 이 특별한 굿즈는, 팬들에게 작품의 순간과 감정을 간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이다. 폴라로이드는 배우 개인의 모습이 아닌, 작품 속 캐릭터로 분장한 배우의 모습을 담고 있다. 팬들에게 이 폴라로이드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캐릭터와 작품을 물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이 때문에 뮤지컬 팬들은 폴라로이드 굿즈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과 소통하고, 휘발되어 사라진 기억을 붙잡는 중요한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과거의 공연 경험을 폴라로이드를 통해 기억을 소환하고 그 속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게 되는 것이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르마조프》의 폴라로이드〉 (출처: 저자 개인소장)
이처럼 팬들의 다양화된 경험은 소음을 이끌어내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나간다. 팬들은 다른 사람들도 즐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팬 대상을 위한 전도활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팬들은 생산과 수용의 통역사 역할을 맡게 된다. 젠킨스는 자신의 책에서 팬들을 다양하게 의미화한다. 팬은 기존의 의미에 ‘새로운 가치를 증대시키는 사람’이며 수많은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 내는 탁월한 ‘감정사’이면서 문화적이고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숨겨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큐레이터’이자, 세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가치 있는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 대중들에게 알리는 ‘대중적인 범세계주의자’이기도 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성경이 각기 다른 해석을 갖는 것처럼 팬들도 아티스트에 대해 각기 다른 애정의 깊이와 해석을 갖는다. 하나로 뭉칠 수 없지만, 팬심, 그 하나로 단결되는 그들의 실천은 오늘, 이 시간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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