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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어쨌든 좋아 죽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록 ‘이야기’를 좋아할까. 입으로 전해져 온 구전에서, 시에서, 노래에서, 무대에서, 때로는 춤으로, 때로는 노래로, 라디오에서, 영화관에서, 티브이에서, 수많은 OTT에서, 웹에서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본다. 어떤 이야기는 주인공이 늙어 죽고 그 자식들의 대까지 이어지며 몇십, 몇백 회를 넘어가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는 수천 년을 지나오며 셀 수 없이 변주되면서도 원형을 잃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에 살이 붙고, 어떤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 쓰였어도 마치 정말 있었을 법하다.

보이지도 않는 신과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수많은 영웅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그리스 신화의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를 찾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갔던 이야기는 특히나 음악극 쪽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를 탄생시킨 야코포 페리〉 (출처: 위키피디아)


오페라를 탄생시킨 인물로 알려진 야코포 페리(Jacopo Peri)가 남긴 최초의 오페라 악보가 음유시인이면서 인간의 몸으로 죽음을 이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르페》(1600)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로부터 고작 7년 뒤, 몬테베르디(C. Monteverdi)는 같은 소재지만 보다 묵직한 《오르페》를 발표하면서 아폴로가 오르페오를 구원하는 나름의 해피앤딩을 구현하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2015년 서울시오페라단에 의해 한국에서 초연됐다.

프랑스에서 큰 환영을 받았던 작곡가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역시 사랑의 여신이 오르페를 되살리는 해피엔딩 버전으로 각색한 《오르페와 유리디체》(1762년 초연)를 내놓았다. 비록 해피엔딩으로 각색되긴 했어도 에우리디체가 다시 지옥으로 끌려간 후 오르페가 부르는 아리아는 그 자체로 당시의 비극적 멜로디의 정점이다. 때문에 결말부의 해피엔딩이 오히려 사족 같을 정도다. 미니멀리즘 작곡가로 유명한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역시 오페라 《오르페》(1993년 초연)를 만들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싱어송라이터인 아나이스 미첼(Anaïs Mitchell)이 대본 쓰고 가사 쓰고 작곡하며 북 치고 장구치고 심지어 콘셉트앨범에서는 스스로 노래까지 불렀던 뮤지컬 《하데스 타운》이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의 오르페는 왕자의 위엄 따위는 없다. 미국의 대공황기를 연상하게 하는 무대 위. 카바레에서 일하는 가난한 종업원에 지나지 않는다. 추위와 굶주림을 피해 그곳에 도착한 유리디스를 본 오르페는 한눈에 반하지만, 유리디스는 그의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가난한 유리디스에게 사랑은 사치다. 눈보라보다 날카롭고 차가웠던 유리디스의 마음은 오르페의 노래에 녹아내린다. 하지만 사랑은 밥을 먹여주지 않기에 유리디스는 하데스를 향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아나이스 미첼의 《하데스 타운》〉 (출처: Hadestown.com/YouTube 에스앤코) 더보기


뮤지컬 《하데스 타운》의 강하고 아름다웠으나 결국에는 쓰러진 유리디스에 비해 오르페는 유리디스가 죽기 전까지는 세상 우유부단하고 대책이 서지 않는 인물이다. 세상을 바꿀 노래를 쓰느라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유리디스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를 막지는 못한다. 저승의 왕과 왕비 앞에서 세상을 바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마침내 유리디스를 구했을 때, 아니, 구했다고 착각했을 때, 오르페의 인생은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오르페는 간신히 획득한 관객들의 애정을 와르르 잃는다.

관객들은 오르페가 돌아볼 것을 알고 있다. 유리디스에게 지상의 나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수천 년 전 이 작품을 처음 본 관객들이 그러했듯이 탄식하고 한탄하며 마지막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돌아본 오르페를 탓한다. 뒷자리에서 ‘어쩐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하고 나직하게 내뱉은 한탄은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공연은 영리하게도, 분노의 꽃을 피운 상태로 끝내지 않는다. 장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봄이 오고, 유리디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오르페는 또다시 한눈에 반한다. 봄날처럼 마음이 사르르 다 녹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수천 번, 수만 번이 거듭되어 왔음을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다.

좋은 이야기에는 물음표가 있고, 그 물음표는 수많은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 수천 년 전, 음유시인이 사람들에게 노래했던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부르고 더 유명해졌어도 비극적인 결말은 살아남아 전해졌다. 돈도 돈이지만 ‘바드’라고 불리던 음유시인들이 욕을 먹지 않으려면 어쨌든 저승행을 불사한 인물에게는 해피엔딩이 따라야만 했다. 아니라면 오르페와 같은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오르페는 아마도 역사상 거의 최초로 자신의 팬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죽은 인물이니 말이다.


〈조선시대 전기수를 재구성한 일러스트〉 (출처: 국립극장, 일러스트레이터: 김도연)


서양에 바드가 있다면 조선에는 전기수가 있다.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고 하지만 ‘직업’이 되기 전에도 사람들은 등잔불 아래 모여 전기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전기수가 돈을 버는 방식도 매우 재밌다. 그저 읽어주기만 해서는 먹고살 수 없었다. 전기수는 관객을 모으기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이야기를 진행했고, 아슬아슬한 부분마다 이야기를 끊으면서 관객을 이끌고 새로운 장소로 옮겨가며 관객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침이 꼴깍 넘어가는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문득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러면 안달 난 사람들이 돈을 던졌고 그제야 비로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숙향전」·「소대성전」·「심청전」·「설인귀전」 등과 같은 이야기가 인기였다고 한다. 더보기

전기수 가운데는 허망한 죽음으로 실록에 실린 사람도 있다. 정조 때 유명한 전기수였던 이업복의 일이다. 그는 이야기 속 인물이 된 듯 연기하며 애절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달인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악역을 너무 실감 나게 묘사한 게 화근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오며 빠져들었던 관객 하나가 악인에게 벌을 내리겠다며 잘 벼린 낫 하나를 품고 왔던 것이다. 이 안타깝고 어리석은 자가 콧김을 내뿜으며 기회를 엿보는 것도 알지 못하고, 아니 어쩌면 그 모습에 더욱 달아올라 더 더 실감 나게 악행을 묘사했을지도 몰랐을 이업복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정조가 어이없는 죽음이라고 언급했던 이 사건은 『정조실록』 정조 14년 8월 10일의 기록으로 남았다.

18세기 정조가 다스리던 시절의 조선은 소설의 전성기였다. 서울 도성 안에 15곳에 이르는 책 대여점인 세책점이 성업했다고 하는데 세책점은 이야기를 잘게 쪼개 묶어서 사람들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계속 돈을 지불하고 다음 권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어렸을 때 만화책을 빌리러 만화 대여점에 가면 누군가 꼭 중간만 쏙 빼서 빌려가곤 하는데, 그때의 심정이 아마도 세책점에서 새 책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과 같을 터였다. 다행이라면 그 당시보다 책이 비싸지 않아서 책을 빌려보다 집안이 기울 일은 없다는 것뿐.


〈서울예술단 창작 가무극 《금란방》〉 (출처: 서울예술단)


이러한 전기수가 활동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퓨전 사극 뮤지컬이 《금란방》이다. 《금란방》은 2018년에 초연된 이후 공연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관객을 깊숙이 끌어들이는 이머시브 공연으로 발전하였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그대로다.

이야기를 재밌게 하기 위해 배경에 두 가지의 금기가 세워지는데 정조를 연상케 하는 왕이 백성들에게 금주와 이야기를 금지한다. 마치 영조와 정조를 합친 듯한 설정인데, 그래놓고 정작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불러 이야기를 전기수처럼 맛깔나게 읽으라고 닦달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 말래도 이미 맛난 술과, 즐거운 이야기건만 하지 못하게 하자 사람들은 몸이 달아오른다. 금란방은 몸이 달아오른 사람들이 밤에 몰래 모이는 조선시대 클럽의 이름이다. 클럽 금란방에는 절대 인기를 구가하는 전기수가 있으니 이자상이다.


〈뮤지컬 《금란방》의 한 장면과 하이라이트〉 (출처: 서울예술단/YouTube 더 뮤지컬) 더보기


이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많은 낭자들이 체면을 버리고 모여든다. 이자상은 이들의 우상이자 아이돌이다. 이자상을 짝사랑하는 매화도 이자상이 등장하는 날이면 날듯이 금란방으로 향하는데, 왕으로부터 책 좀 맛나게 읽으라고 닦달을 들어야 하는 매화의 아비 김윤신도 책 재미나게 읽는 법을 익혀보고자 딸 매화의 장옷을 쓰고 여장을 한 후 금란방으로 향한다. 그저 신나서 자신의 우상인 이자상을 보러 가는 딸 매화와 달리 김윤신은 목숨이 걸린 일이다. 왜냐하면 왕이 제대로 못 읽으면 귀양을 보내겠다며 농을 날린 것인데, 매사에 진지한 김윤신은 농을 진으로 받아들인다.

설정부터 이미 조선시대로부터 벗어난 덕에 뮤지컬 《금란방》은 음악도 시대를 초월해 널을 뛴다. 전통악기에 밴드 악기인 드럼 베이스 키보드가 들어오고 디제이 믹스가 더해져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리듬도 가미됐다. 이 금기 클럽 금란방에서 아비 김윤신과 딸 매화, 매화의 정혼자인 윤구연, 매화의 종, 이자상과 이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얽힌 이야기까지 끼어들면 이야기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코미디극처럼 얽히고설킨다. 이자상은 성별을 구별할 수가 없어 매화는 이자상을 남자라 여기지만, 아비인 김윤신은 여자라 여기며 스르륵 매료된다.

게다가 이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 인물은 성별이 변화무쌍한 인물이라 듣는 이를 혼란에 빠트린다. 본인이 누구보다 야한 이야기를 즐기면서도 백성에게는 이야기를 금지하는 왕의 모습은 풍자랄 것도 없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지만 극 중의 왕과 김윤신의 모습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성리학을 내세우며 명분을 따지는 관료가 내적 갈등을 겪는 모습도 웃음벨이다. 이 뮤지컬 속의 전기수 이자상은 이업복처럼 불행한 결말을 맞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우주인처럼 느껴질 정도다.


〈김홍도의 그림 속 전기수. 전기수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담배가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티브이도 없고 영화도 없고 넷플릭스도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게 푹 빠져들었을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도 《담배 썰기》에도 부채를 들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전기수의 모습이 담겨있다. 관객들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관심이 없다. 대부분 그들이 관심을 두는 존재는 배우다. 조선시대에 전기수는 그 자신이 일인 다역을 하는 배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유독 무대 장르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서면 필패한다. 뮤지컬은 더 그러하다. 관객들은 작가인 주인공까지는 그럭저럭 참아주지만 작가가 작품 만들려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길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배우들의 뒷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다. 당연히 더 다채롭고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을 수밖에.

그런 와중에 전기수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소재다. 그는 각색자이자 해설자이자 배우이며, 인기의 중심에 서 있다. 권력과 돈이 있는 팬은 전기수를 집으로 불러 친구들을 모아 이야기를 청했지만, 전기수는 그들을 위해서만 자신의 재능을 쓰지 않았다.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양반 험담은 할 수 없는 돈 많은 귀족 집안의 사랑채보다 저잣거리의 반짝이는 눈빛들에서 그는 더 큰 희열을 느꼈을 터였다. 물론 그게 죽음을 불러왔다 하더라도.

등잔불 아래서, 조선 최초의 배우들이 탄생했을 그 터에 앉아, 누군가의 팬이 되어 그를 따라 동짓달 초하루에도 손을 호호 불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들어도 새롭고 재밌을 그런 이야기를. 낫은 아궁이 옆에 세워두고.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아버지께서 문언박의 기영회를 흉내내시다”

『기영회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08년 3월 10일

1708년 윤3월 10일. 아버지께서 친구들과 함께 필곡에 있는 임감사 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식후에 가마를 타고 갑산부사 성숙 영공 어르신께 함께 가셨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송나라 명재상이었던 문언박이 부필과 함께 모의하여 개최했던 낙사기영회를 흉내내어 나이가 지긋한 친구분들과 함께 잔치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문언박의 기영회에서는 모두가 당대의 명사가 모였었다.

오늘 아버지의 기영회에 모신 분은 참판 남필성, 판결사 임당, 참의 임윤원, 감사 임순원, 참판 강선, 판서 강현 어르신이었다. 이분들이 처음 기로회를 결성하시고자 하였는데, 다만 문제가 있었다. 성숙 어르신과 강대감, 임씨 형제분들은 이제 겨우 60세를 넘었거나 아직 60세가 되지 못하신 분들이었다. 기영회를 흉내내는데 옛 규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다소 아쉬웠다.

모이신 분들은 서로 규례를 정하고 자리 순서를 정하느라 분주하셨다. 서로 나이나 관직으로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나이가 적은 어른들은 서로 말석을 차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이처럼 예로 서로 모여 유흥을 즐기니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년 9월 28일~1619년 10월 4일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9월 26일, 아침에 참이 와서 연포(軟泡)를 만들어 반찬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시량(金時亮)이 와서 여러 사람들과 놀며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이운(李芸)과 서원의 사람[院人]이 왔는데, 서원에서 김령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정장(呈狀)을 되돌려 주었다. 김령 일행은 이날도 유숙했다.

1619년 10월 4일, 김령은 밥 먹을 때 연포(軟泡)를 만들어 북대(北臺)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다시 강물을 건너 노천을 둘러보았는데, 새로 큰 집을 지어놓았으니,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운암(雲巖) 앞 천석(泉石)을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개와 이지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차례로 방문했다.

숙경.자개와 함께 이지의 집에서 잤다. 숙경이 온 것은 본래 김령 무리를 찾아보고 또 도산 서원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청량산을 본 적이 없다 하자 김령이 충동해서 가게 했다. 숙경이 산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도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고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숙경이 심하게 졸랐다.

“끈끈한 과거급제 동기 모임”

금난수, 성재일기, 1580년 1월 13일~1580년 4월 24일

1561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던 금난수는 그 해에 함께 입격한 여러 동기들과 서로 도와가며 친밀하게 지내 왔다. 1580년 새해에도 생원시 동기인 구효연(具孝淵)을 찾아가 함께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밤이 되어 떠나려는 금난수를 자리에 다시 앉힌 것은 김복일(金復一)과 이교(李㝯)였다. 김복일은 이황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이고, 이교는 이황의 조카였다.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찾아오니 이날 밤은 일찍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함께 어울렸다.

금난수가 다시 사마시 동기와의 연을 생각하게 된 것은 4월에 개성에 갔을 때였다. 문충공 서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둘째 아들 금업을 만나고, 서원에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금난수가 서원에 아들을 맡겨놓은 이유 중 하나는 서원의 원장이 곧 금난수의 사마시 동기인 김지(金漬)의 아우인 김유(金濡)였기 때문이었다. 개성뿐 아니라 금난수의 동기들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금난수가 봉화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 사는 박대임(朴大任)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동기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금난수와 그 동기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에 일종의 동기 모임인 동기계를 만들어 소속감을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계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팍한 관직생활 속에서 동기라는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봄날의 낚시 모임 - 노천에서 회와 어탕을 즐기다”

김령, 계암일록, 1621년 4월 22일~1621년 4월 29일

1621년 4월 22일, 봄이 한창이었다. 김령은 벗들과 물고기를 잡기로 약속을 하였다. 일부는 어정(漁丁)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고, 김령은 남은 몇몇 지인들과 침락서당(枕洛書堂)에 들렀다가 합류했다. 사람들은 느즈막 할 때까지 잡은 고기로, 회를 치기도 하고 끓이기도 했다. 술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이 낚시 모임은 일주일 후인 29일에도 열렸다. 여희와 덕여가 어정을 데리고 일찌감치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고, 김령은 정오 즈음해서 나아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물가의 돌 옆 땅바닥에 앉아서 끓인 물고기와 회를 부족함 없이 먹었다. 이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서로 헤어졌다.

“취미생활, 매사냥을 즐기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년 1월 27일~1625년 12월 2일

1625년 1월 27일, 권별이 키우는 수지니(길들인 매나 새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날아 가버려서 종일 쫓았으나 팔에 내려앉지를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에 사불랑 촌에서 팔에 내려앉았다.

1625년 9월 2일, 맑음. 수지니를 놓아서 1마리를 잡았다.

1625년 10월 26일, 이봉(以奉) 형제와 더불어 구계(鷗溪)에 가서 매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1625년 11월 29일, 맑음. 이른 새벽에 화장(花莊)으로 갔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수지니를 잃어버린 지 2개월쯤 만에 노비의 팔에 내려앉아 간신히 도로 찾았다 하였다.

1625년 12월 2일, 화장에 머물렀다. 의숙(義叔)이 같이 잤다. 이술(而述)은 매사냥하는 일로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같이 잤다. 새 매가 날아 가버려서 잡지 못하였다.

“소년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먹으며 시회를 열다”

고기 바구니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년 6월 20일

1617년 6월 20일, 맑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김택룡이 역정에 나가는데 아들 김숙과 생질 정득이 따라왔다. 유사 김개일 · 상사 김회일 · 권전룡 등도 역정에 왔다. 그리고 물고기 회식을 벌였는데, 소년들을 모아 나누어 보내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고 각기 보리밥을 하고 물고기를 끓여 사람들을 먹였다.

모인 사람 모두는 김택룡의 두 아재인 심신과 심지 · 생질 정득 · 아들 김숙 · 권취중 · 박선윤 · 황유문 · 심학해 · 이춘발 · 손흥선 · 심수해 · 심이달 그리고 관동[丱童, 어린 아이] 6, 7명이었다. 김택룡이 촌료주(村醪酒) 한 동이를 구해서 대접하였다. 그리고 김회일로 하여금 운(韻)을 부르게 하여 김택룡이 정(亭), 병(屛), 정(酲) 자 세 자로 『역정절구(櫟亭絶句)』를 지었는데, 아들 김숙과 그 곳에 모인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시에 화답했다.

날이 저물어 시회를 파하고 헤어졌다. 김회일은 지장리(紙匠里)로 가고, 김개일은 심 봉사 집에서 잤다. 숙도 김회일 공을 따라 지장리에 가서 잤다.

“딸의 만류로 문중 모임에 늦어버리다”

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59년 9월 30일

1759년 9월 30일. 최흥원은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최근 며칠 최흥원은 석전 마을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렀다. 인근 지인의 상가를 조문하는 길에 들렀다가 딸의 집에서 며칠 묵게 된 것이다. 이제 제법 큰 외손자도 만나보는데, 제법 아이의 품성이 착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흐뭇하였다. 사위가 다소 잔병이 있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딸의 집안은 대체로 큰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본래 문중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최흥원은 본래 어제 길을 나서 문중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쉬이 놓아 보내주고 싶지 않은 딸이 최흥원을 간절하게 울며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어미를 일찍 여의고 부모라고 살아있는 사람은 애비인 최흥원뿐이니, 최흥원은 새삼 딸의 만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결국 하루를 더 묵고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임 장소까지는 역시 먼 길이어서, 이미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행히 문중의 모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최흥원을 보자 사람들이 모두 꾸짖으며 역정을 내었다. 최흥원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집안의 동생 중 아무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안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진 최흥원은 사람들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문중에서 재사를 지을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무안해진 최흥원은 마음속으로 빨리 회의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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