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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모인 ‘우리’

봄이 되니, 봄나들이 생각에 설렙니다. 나들이 장소는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터인데, 야구 관람을 즐기는 저는 야구장으로 봄나들이 갑니다. 야구장에 가는 날이면, 제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 도구들을 챙깁니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서 같은 차림을 하고 같은 응원곡과 구호를 외칩니다. 이때만큼은 생면부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곡 가사처럼 ‘하나 되어’, ‘우리’가 되어 있는데, 꽤 즐겁습니다. 이것이 함께함이 주는 기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난겨울부터 오늘까지, 광장과 거리에서 응원봉을 흔들고 떼창을 하면서 추위와 불안․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일구어 가는 힘도 ‘우리 함께함’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이번 호에는 “계회에서 팬덤까지: 함께하니 기쁘지 아니한가”란 제목으로 ‘우리’와 ‘함께함’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유대를 맺고, 그 유대 속에서 소속감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고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인간의 모임은 있었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모임들이 갖는 의미가 달랐기 때문에, 그 모임의 구성원이 구성원일 수 있도록 하는 것들도 달랐을 겁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모임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우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일 수 있도록 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아마도 ‘연대의 말들’이 아니었을까요?

최진경 선생님은 “조선시대 계회에서 광장의 응원봉까지: ‘우리’를 만드는 연대의 말들”에서, 시대에 따른 계회의 모습과 의미를 살펴 계회 속에서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우리가 어떻게 ‘함께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이안눌(李安訥) 선생께서 남기신 말씀을 빌어 ‘우리라는 말이 갖는 연대는 조건의 동일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동일성과 상호 존중 위에 성립’한다고 하여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풀어주시는 한편 그 말이 지닌 한계인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장민지 선생님의 “뮤지컬 팬덤의 세계: 공연의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에서 볼 수 있는 뮤지컬의 팬덤은 좋아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우리’입니다. 뮤지컬 팬덤은 복제 불가능한 예술이라는 뮤지컬의 특성으로 인해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며 다양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휘발하는 공연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기록하고 수집하는 팬문화가 있으며, 서로의 기억과 수집을 보완해 주기 위한 소통과 공유․나눔이 있습니다. 형성된 연대가 발휘하는 힘은 다시 뮤지컬이란 장르가 성장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수진 작가님의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어쨌든 좋아 죽는”에서는 좋아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을 향유하는 동안, 그 작품을 같이 감상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유대감은 그 이야기를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현대 뮤지컬 《하데스타운》에 이르기까지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오랜 세월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계속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바드나 전기수의 능력은 이 유대감을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하기에, 뮤지컬 《금란방》과 같은 작품에서는 전기수 이자상과 같은 매력적인 인물을 만나 볼 수도 있습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독(獨)선생전”에서는 ‘연포탕’을 동향인들과 함께 먹기 위해 출타하는 독선생을 그의 반려묘 벼루의 시선으로 따라가 봅니다. 독선생은 동향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에 귀가합니다. 그러면서 챙겨 온 두부를 반려묘에게 나눠줍니다. 좋아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나눠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거리에서도, 야구장에서도, 공연장 근처에서도(공연장 내에선 취식금지) 간식을 나누어 먹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백이과 목금”에 등장했던 망허촌 영괴들이 초여름 보름밤, 숲에 모여들었습니다. ‘영괴들의 아회’입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였으나, 상석을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연장자 우선’이란 규칙에 불돌이의 꾀가 더해져서 즐거운 모임이 되었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규칙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진경 선생님 글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우리’라는 말이 지닌 배타와 배제의 한계성을 생각해 보면, 그 규칙이 폭력을 낳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괴담입향시일기(槐潭入享時日記)』에 있는 녹동정사의 규약과 처벌 규정도 본래 정해졌을 때의 뜻과는 다르게 운영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복순 선생님의 글 “선 넘는 모임”에 소개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는 노상추 선생이 성곡동회(省谷洞會)에 참석하려다 겪으셨던 집단 따돌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임의 규칙에, 팬덤의 경우처럼, 윤리성을 부여되어 모임이 자정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광장의 ‘우리’들처럼 포용할 수 있다면, 그런 모임의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광장의 응원봉이 유독 아름다웠던 것은, 그 응원봉 빛 아래 소수자와 약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함께 경청하며, 연대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장의 응원봉은 ‘우리’라는 말속에 함의되어야 할 것들-소속감, 우리 사이의 유대감, 정체성, 방향성, 우리 속에서의 나, 나의 확장으로서의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응원봉의 불빛이 위로와 용기, 희망이 필요한 곳에 연대의 이름으로 비치길 기대해 봅니다.

산불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삼가 드립니다.




편집자 소개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수료한 후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세작-매혹된 자들》, 《붉은 단심》,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장영실》, 《징비록》, 《정도전》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아버지께서 문언박의 기영회를 흉내내시다”

『기영회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08년 3월 10일

1708년 윤3월 10일. 아버지께서 친구들과 함께 필곡에 있는 임감사 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식후에 가마를 타고 갑산부사 성숙 영공 어르신께 함께 가셨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송나라 명재상이었던 문언박이 부필과 함께 모의하여 개최했던 낙사기영회를 흉내내어 나이가 지긋한 친구분들과 함께 잔치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문언박의 기영회에서는 모두가 당대의 명사가 모였었다.

오늘 아버지의 기영회에 모신 분은 참판 남필성, 판결사 임당, 참의 임윤원, 감사 임순원, 참판 강선, 판서 강현 어르신이었다. 이분들이 처음 기로회를 결성하시고자 하였는데, 다만 문제가 있었다. 성숙 어르신과 강대감, 임씨 형제분들은 이제 겨우 60세를 넘었거나 아직 60세가 되지 못하신 분들이었다. 기영회를 흉내내는데 옛 규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다소 아쉬웠다.

모이신 분들은 서로 규례를 정하고 자리 순서를 정하느라 분주하셨다. 서로 나이나 관직으로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나이가 적은 어른들은 서로 말석을 차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이처럼 예로 서로 모여 유흥을 즐기니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년 9월 28일~1619년 10월 4일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9월 26일, 아침에 참이 와서 연포(軟泡)를 만들어 반찬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시량(金時亮)이 와서 여러 사람들과 놀며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이운(李芸)과 서원의 사람[院人]이 왔는데, 서원에서 김령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정장(呈狀)을 되돌려 주었다. 김령 일행은 이날도 유숙했다.

1619년 10월 4일, 김령은 밥 먹을 때 연포(軟泡)를 만들어 북대(北臺)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다시 강물을 건너 노천을 둘러보았는데, 새로 큰 집을 지어놓았으니,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운암(雲巖) 앞 천석(泉石)을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개와 이지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차례로 방문했다.

숙경.자개와 함께 이지의 집에서 잤다. 숙경이 온 것은 본래 김령 무리를 찾아보고 또 도산 서원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청량산을 본 적이 없다 하자 김령이 충동해서 가게 했다. 숙경이 산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도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고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숙경이 심하게 졸랐다.

“끈끈한 과거급제 동기 모임”

금난수, 성재일기, 1580년 1월 13일~1580년 4월 24일

1561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던 금난수는 그 해에 함께 입격한 여러 동기들과 서로 도와가며 친밀하게 지내 왔다. 1580년 새해에도 생원시 동기인 구효연(具孝淵)을 찾아가 함께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밤이 되어 떠나려는 금난수를 자리에 다시 앉힌 것은 김복일(金復一)과 이교(李㝯)였다. 김복일은 이황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이고, 이교는 이황의 조카였다.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찾아오니 이날 밤은 일찍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함께 어울렸다.

금난수가 다시 사마시 동기와의 연을 생각하게 된 것은 4월에 개성에 갔을 때였다. 문충공 서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둘째 아들 금업을 만나고, 서원에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금난수가 서원에 아들을 맡겨놓은 이유 중 하나는 서원의 원장이 곧 금난수의 사마시 동기인 김지(金漬)의 아우인 김유(金濡)였기 때문이었다. 개성뿐 아니라 금난수의 동기들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금난수가 봉화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 사는 박대임(朴大任)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동기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금난수와 그 동기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에 일종의 동기 모임인 동기계를 만들어 소속감을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계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팍한 관직생활 속에서 동기라는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봄날의 낚시 모임 - 노천에서 회와 어탕을 즐기다”

김령, 계암일록, 1621년 4월 22일~1621년 4월 29일

1621년 4월 22일, 봄이 한창이었다. 김령은 벗들과 물고기를 잡기로 약속을 하였다. 일부는 어정(漁丁)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고, 김령은 남은 몇몇 지인들과 침락서당(枕洛書堂)에 들렀다가 합류했다. 사람들은 느즈막 할 때까지 잡은 고기로, 회를 치기도 하고 끓이기도 했다. 술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이 낚시 모임은 일주일 후인 29일에도 열렸다. 여희와 덕여가 어정을 데리고 일찌감치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고, 김령은 정오 즈음해서 나아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물가의 돌 옆 땅바닥에 앉아서 끓인 물고기와 회를 부족함 없이 먹었다. 이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서로 헤어졌다.

“취미생활, 매사냥을 즐기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년 1월 27일~1625년 12월 2일

1625년 1월 27일, 권별이 키우는 수지니(길들인 매나 새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날아 가버려서 종일 쫓았으나 팔에 내려앉지를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에 사불랑 촌에서 팔에 내려앉았다.

1625년 9월 2일, 맑음. 수지니를 놓아서 1마리를 잡았다.

1625년 10월 26일, 이봉(以奉) 형제와 더불어 구계(鷗溪)에 가서 매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1625년 11월 29일, 맑음. 이른 새벽에 화장(花莊)으로 갔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수지니를 잃어버린 지 2개월쯤 만에 노비의 팔에 내려앉아 간신히 도로 찾았다 하였다.

1625년 12월 2일, 화장에 머물렀다. 의숙(義叔)이 같이 잤다. 이술(而述)은 매사냥하는 일로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같이 잤다. 새 매가 날아 가버려서 잡지 못하였다.

“소년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먹으며 시회를 열다”

고기 바구니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년 6월 20일

1617년 6월 20일, 맑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김택룡이 역정에 나가는데 아들 김숙과 생질 정득이 따라왔다. 유사 김개일 · 상사 김회일 · 권전룡 등도 역정에 왔다. 그리고 물고기 회식을 벌였는데, 소년들을 모아 나누어 보내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고 각기 보리밥을 하고 물고기를 끓여 사람들을 먹였다.

모인 사람 모두는 김택룡의 두 아재인 심신과 심지 · 생질 정득 · 아들 김숙 · 권취중 · 박선윤 · 황유문 · 심학해 · 이춘발 · 손흥선 · 심수해 · 심이달 그리고 관동[丱童, 어린 아이] 6, 7명이었다. 김택룡이 촌료주(村醪酒) 한 동이를 구해서 대접하였다. 그리고 김회일로 하여금 운(韻)을 부르게 하여 김택룡이 정(亭), 병(屛), 정(酲) 자 세 자로 『역정절구(櫟亭絶句)』를 지었는데, 아들 김숙과 그 곳에 모인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시에 화답했다.

날이 저물어 시회를 파하고 헤어졌다. 김회일은 지장리(紙匠里)로 가고, 김개일은 심 봉사 집에서 잤다. 숙도 김회일 공을 따라 지장리에 가서 잤다.

“딸의 만류로 문중 모임에 늦어버리다”

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59년 9월 30일

1759년 9월 30일. 최흥원은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최근 며칠 최흥원은 석전 마을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렀다. 인근 지인의 상가를 조문하는 길에 들렀다가 딸의 집에서 며칠 묵게 된 것이다. 이제 제법 큰 외손자도 만나보는데, 제법 아이의 품성이 착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흐뭇하였다. 사위가 다소 잔병이 있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딸의 집안은 대체로 큰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본래 문중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최흥원은 본래 어제 길을 나서 문중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쉬이 놓아 보내주고 싶지 않은 딸이 최흥원을 간절하게 울며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어미를 일찍 여의고 부모라고 살아있는 사람은 애비인 최흥원뿐이니, 최흥원은 새삼 딸의 만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결국 하루를 더 묵고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임 장소까지는 역시 먼 길이어서, 이미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행히 문중의 모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최흥원을 보자 사람들이 모두 꾸짖으며 역정을 내었다. 최흥원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집안의 동생 중 아무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안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진 최흥원은 사람들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문중에서 재사를 지을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무안해진 최흥원은 마음속으로 빨리 회의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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