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9월 26일, 아침에 참이 와서 연포(軟泡)를 만들어 반찬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시량(金時亮)이 와서 여러 사람들과 놀며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이운(李芸)과 서원의 사람[院人]이 왔는데, 서원에서 김령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정장(呈狀)을 되돌려 주었다. 김령 일행은 이날도 유숙했다.

1619년 10월 4일, 김령은 밥 먹을 때 연포(軟泡)를 만들어 북대(北臺)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다시 강물을 건너 노천을 둘러보았는데, 새로 큰 집을 지어놓았으니,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운암(雲巖) 앞 천석(泉石)을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개와 이지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차례로 방문했다.

숙경.자개와 함께 이지의 집에서 잤다. 숙경이 온 것은 본래 김령 무리를 찾아보고 또 도산 서원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청량산을 본 적이 없다 하자 김령이 충동해서 가게 했다. 숙경이 산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도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고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숙경이 심하게 졸랐다.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풍류, 연포, 시
시기 : 1603-09-28 ~ 1619-10-04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평보 형, 상주 형, 배 한림, 공보의 아내, 효중, 청심, 덕여, 김시량, 이운, 자개, 이지, 숙경, 금업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아버지께서 문언박의 기영회를 흉내내시다”

『기영회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08년 3월 10일

1708년 윤3월 10일. 아버지께서 친구들과 함께 필곡에 있는 임감사 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식후에 가마를 타고 갑산부사 성숙 영공 어르신께 함께 가셨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송나라 명재상이었던 문언박이 부필과 함께 모의하여 개최했던 낙사기영회를 흉내내어 나이가 지긋한 친구분들과 함께 잔치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문언박의 기영회에서는 모두가 당대의 명사가 모였었다.

오늘 아버지의 기영회에 모신 분은 참판 남필성, 판결사 임당, 참의 임윤원, 감사 임순원, 참판 강선, 판서 강현 어르신이었다. 이분들이 처음 기로회를 결성하시고자 하였는데, 다만 문제가 있었다. 성숙 어르신과 강대감, 임씨 형제분들은 이제 겨우 60세를 넘었거나 아직 60세가 되지 못하신 분들이었다. 기영회를 흉내내는데 옛 규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다소 아쉬웠다.

모이신 분들은 서로 규례를 정하고 자리 순서를 정하느라 분주하셨다. 서로 나이나 관직으로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나이가 적은 어른들은 서로 말석을 차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이처럼 예로 서로 모여 유흥을 즐기니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년 9월 28일~1619년 10월 4일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9월 26일, 아침에 참이 와서 연포(軟泡)를 만들어 반찬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시량(金時亮)이 와서 여러 사람들과 놀며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이운(李芸)과 서원의 사람[院人]이 왔는데, 서원에서 김령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정장(呈狀)을 되돌려 주었다. 김령 일행은 이날도 유숙했다.

1619년 10월 4일, 김령은 밥 먹을 때 연포(軟泡)를 만들어 북대(北臺)에 올라가 둘러보았다. 다시 강물을 건너 노천을 둘러보았는데, 새로 큰 집을 지어놓았으니,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운암(雲巖) 앞 천석(泉石)을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개와 이지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차례로 방문했다.

숙경.자개와 함께 이지의 집에서 잤다. 숙경이 온 것은 본래 김령 무리를 찾아보고 또 도산 서원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청량산을 본 적이 없다 하자 김령이 충동해서 가게 했다. 숙경이 산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도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고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숙경이 심하게 졸랐다.

“끈끈한 과거급제 동기 모임”

금난수, 성재일기, 1580년 1월 13일~1580년 4월 24일

1561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던 금난수는 그 해에 함께 입격한 여러 동기들과 서로 도와가며 친밀하게 지내 왔다. 1580년 새해에도 생원시 동기인 구효연(具孝淵)을 찾아가 함께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밤이 되어 떠나려는 금난수를 자리에 다시 앉힌 것은 김복일(金復一)과 이교(李㝯)였다. 김복일은 이황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이고, 이교는 이황의 조카였다.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찾아오니 이날 밤은 일찍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함께 어울렸다.

금난수가 다시 사마시 동기와의 연을 생각하게 된 것은 4월에 개성에 갔을 때였다. 문충공 서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둘째 아들 금업을 만나고, 서원에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금난수가 서원에 아들을 맡겨놓은 이유 중 하나는 서원의 원장이 곧 금난수의 사마시 동기인 김지(金漬)의 아우인 김유(金濡)였기 때문이었다. 개성뿐 아니라 금난수의 동기들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금난수가 봉화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 사는 박대임(朴大任)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동기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금난수와 그 동기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에 일종의 동기 모임인 동기계를 만들어 소속감을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계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팍한 관직생활 속에서 동기라는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봄날의 낚시 모임 - 노천에서 회와 어탕을 즐기다”

김령, 계암일록, 1621년 4월 22일~1621년 4월 29일

1621년 4월 22일, 봄이 한창이었다. 김령은 벗들과 물고기를 잡기로 약속을 하였다. 일부는 어정(漁丁)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고, 김령은 남은 몇몇 지인들과 침락서당(枕洛書堂)에 들렀다가 합류했다. 사람들은 느즈막 할 때까지 잡은 고기로, 회를 치기도 하고 끓이기도 했다. 술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이 낚시 모임은 일주일 후인 29일에도 열렸다. 여희와 덕여가 어정을 데리고 일찌감치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고, 김령은 정오 즈음해서 나아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물가의 돌 옆 땅바닥에 앉아서 끓인 물고기와 회를 부족함 없이 먹었다. 이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서로 헤어졌다.

“취미생활, 매사냥을 즐기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년 1월 27일~1625년 12월 2일

1625년 1월 27일, 권별이 키우는 수지니(길들인 매나 새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날아 가버려서 종일 쫓았으나 팔에 내려앉지를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에 사불랑 촌에서 팔에 내려앉았다.

1625년 9월 2일, 맑음. 수지니를 놓아서 1마리를 잡았다.

1625년 10월 26일, 이봉(以奉) 형제와 더불어 구계(鷗溪)에 가서 매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1625년 11월 29일, 맑음. 이른 새벽에 화장(花莊)으로 갔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수지니를 잃어버린 지 2개월쯤 만에 노비의 팔에 내려앉아 간신히 도로 찾았다 하였다.

1625년 12월 2일, 화장에 머물렀다. 의숙(義叔)이 같이 잤다. 이술(而述)은 매사냥하는 일로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같이 잤다. 새 매가 날아 가버려서 잡지 못하였다.

“소년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먹으며 시회를 열다”

고기 바구니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년 6월 20일

1617년 6월 20일, 맑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김택룡이 역정에 나가는데 아들 김숙과 생질 정득이 따라왔다. 유사 김개일 · 상사 김회일 · 권전룡 등도 역정에 왔다. 그리고 물고기 회식을 벌였는데, 소년들을 모아 나누어 보내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고 각기 보리밥을 하고 물고기를 끓여 사람들을 먹였다.

모인 사람 모두는 김택룡의 두 아재인 심신과 심지 · 생질 정득 · 아들 김숙 · 권취중 · 박선윤 · 황유문 · 심학해 · 이춘발 · 손흥선 · 심수해 · 심이달 그리고 관동[丱童, 어린 아이] 6, 7명이었다. 김택룡이 촌료주(村醪酒) 한 동이를 구해서 대접하였다. 그리고 김회일로 하여금 운(韻)을 부르게 하여 김택룡이 정(亭), 병(屛), 정(酲) 자 세 자로 『역정절구(櫟亭絶句)』를 지었는데, 아들 김숙과 그 곳에 모인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시에 화답했다.

날이 저물어 시회를 파하고 헤어졌다. 김회일은 지장리(紙匠里)로 가고, 김개일은 심 봉사 집에서 잤다. 숙도 김회일 공을 따라 지장리에 가서 잤다.

“딸의 만류로 문중 모임에 늦어버리다”

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59년 9월 30일

1759년 9월 30일. 최흥원은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최근 며칠 최흥원은 석전 마을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렀다. 인근 지인의 상가를 조문하는 길에 들렀다가 딸의 집에서 며칠 묵게 된 것이다. 이제 제법 큰 외손자도 만나보는데, 제법 아이의 품성이 착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흐뭇하였다. 사위가 다소 잔병이 있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딸의 집안은 대체로 큰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본래 문중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최흥원은 본래 어제 길을 나서 문중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쉬이 놓아 보내주고 싶지 않은 딸이 최흥원을 간절하게 울며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어미를 일찍 여의고 부모라고 살아있는 사람은 애비인 최흥원뿐이니, 최흥원은 새삼 딸의 만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결국 하루를 더 묵고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임 장소까지는 역시 먼 길이어서, 이미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행히 문중의 모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최흥원을 보자 사람들이 모두 꾸짖으며 역정을 내었다. 최흥원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집안의 동생 중 아무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안한 마음에 얼굴이 벌게진 최흥원은 사람들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문중에서 재사를 지을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무안해진 최흥원은 마음속으로 빨리 회의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