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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서 베끼고, 돌려 읽고, 물려주고, 외우고, 낭독하고
- 책을 극성스럽게 좋아하던 조선인의 연대기 -

공병훈

“조선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여 사신들이 중국 땅에 올 때 옛 책과 새 책, 패관소설, 그리고 그들 나라에 없는 것들을 시중에 나가 서목을 베끼고 또 책이 비싸다 하여도 아까워하지 않고 구입해 돌아가므로 오히려 그들 나라에 이서(異書)가 많다.”

16세기 중국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가 사신으로 들어온 조선인들의 책 구입 열기에 대해 표현한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책의 출판과 판매가 활발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비들은 중국에 가는 사신을 통해 책 구입을 부탁하여 몇 년을 기다렸다는 사실이 김택룡의 『조성당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성당일기』에는 김택룡이 3년 만에 구한 『성리대전(性理大全)』, 『통감(通鑑)』, 『송감(宋鑑)』등을 장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겉표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표지에 베와 비단을 쓰기도 하며 두꺼운 종이에 치자물을 들여 좀이 슬거나 낡아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김홍도 연행도 조선의 사신들이 책을 구입했던 북경의 유리창 거리 - 김홍도의 <연행도> 14폭 중 13폭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04년~751년 사이에 제작되었고, 전란 속에서도 1234년에 금속활자가 개발되었을 정도로 고려시대의 출판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14세기 조선은 불교 중심의 고려 체제를 부정하고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던 만큼 책의 출판은 국가가 주도하는 구조였고 비용 측면에서도 책을 인쇄하는 작업은 국가가 나서야만 가능한 작업이었다. 조선시대에 경전과 책은 서적원에서 제작하여 보급하는 구조로서, 책들은 관판(官版)·서원판·사찰판·사가판(私家版), 방각본으로 구분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서점에서 발행한 방각본이 나오기 전의 판본들은 중앙 관서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들을 제작하여 관리, 서원의 유생, 사찰의 중, 문중의 가족 등 제한된 특정 독자만을 대상으로 제공되었기에, 충분한 책의 공급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널리 쓰인 해결책이 베껴쓰기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20권에는 책이 없어서 남의 책을 빌려 필사하여 외운다는 소식에 세종이 주자소에서 책을 보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교육과 과거 시험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였지만 사대부 지식인들에게도 책은 사거나 선물을 받지 않고 책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을 빌려서 베껴쓰는 작업은 저렴한 가격에 책을 얻는 방법일뿐더러 내용을 철저하게 공부하는 중요하고도 고된 방법이었다. 서찬규는 『임재일기』에서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서 베껴쓴다”로 표현하여 당시 선비들이 얼마나 책을 소중히 읽고 베껴쓰려고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여러 권의 책을 요약하는 방법과 더불어 책들에 담겨있는 다양한 주제와 논의를 자신의 관점으로 조합하는 방법으로 진화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자들이 방대하고 다양한 학문적 내용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려서 베껴쓰며 이해하고 저술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유배지에서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책을 발췌하여 베껴 집필하도록 지도하는 정약용의 편지에서 그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지난해에 내가 너희들에게 『고려사(高麗史)』에서 긴요한 말들을 뽑으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일이 너희들에게 있어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좋은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는 체재를 잡아보내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이것에 의거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뽑아 책을 완성한 뒤에 인편에 보내도록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 옳고 그름을 감정하겠다. 책이 완성되면 아무쪼록 좋은 종이에 깨끗이 베끼고 내가 쓴 서문을 책머리에 싣고, 항상 책상 위에 두고 너희 형제들이 아침 저녁으로 읽고 익히도록 하여라.(정약용,『유배지에서 보낸 편지』中에서)

젊어서 구로공단 노동자로 생활하던 작가 신경숙은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창작 학습을 하기 위해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베껴 쓰기를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열공”하는 학생들이 자신만의 노트나 파일에 책의 내용들을 요약하는 것은 아직도 도서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서점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17세기 중엽부터 출판지 또는 출판자의 이름, 상호(商號) 등을 명시한 방각본들이 등장했다. 방각본(坊刻本)이란 말은 상인들에 의해 판각(板刻)되어 서방사(書坊肆)에서 판매된 책들을 뜻한다. 방각본 출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이후 상업적 이윤을 목표로 소설들이 출현하면서 확산된다. 18~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 할 만큼 많은 소설들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당시의 소설들로는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 『예덕선생전』, 『호질(虎叱)』, 『허생(許生) 』,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春香傳) 』, 『심청전(沈淸傳) 』, 『흥부전(興夫傳)』, 『토끼전』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임금이 영조(1694~1776)였다는 사실은 당시 전 사회적으로 소설이 얼마나 인기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소설들이 대부분 언문(諺文)으로 천대받던 한글로 출판되었으니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성화된 방각본은 한글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한글을 익힌 민중들이 책을 읽고 그들의 문학적 욕구와 정서가 군담소설이나 애정소설 등에 수용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소설은 한글 소설이 자연스럽게 주류를 차지했다. 양반들이라고 해서 한문 소설만 읽었던 것도 아니므로, 독자 대중을 겨냥하기 위해서는 한글 소설이라야 적합했다.

  • 홍길동전

    목판으로 인쇄한 방각본 <홍길동전>

  • 츈향젼

    1912년 제작된 방각본 <츈향젼>

수요의 증가는 책을 유통하는 새로운 형태로서 세책가(貰冊家)를 출현시켰다. 세책가는 다양한 종류의 책을 빌려 주거나 판매하는 곳이었다. 인구가 많던 서울을 중심으로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책 대여점이자 서점인 셈이다. ‘세책본(貰冊本)’이라 하면 세책가가 직접 붓으로 써서 만든 책인 ‘한글 필사본 책’을 뜻한다. 한글만 깨우쳤다면 누구라도 돈을 주고 빌려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세책본 책들이다. 세책본 가운데에는 수십 책 분량에 이르는 장편 소설도 적지 않다. 사람이 붓으로 직접 써서 생산하는 것이므로, 방각본에 비하여 제작비 부담이 적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60여 종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록 목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까지 합하면 대략 120종 이상의 소설과 책이 세책가를 통해 유통되어 읽혔을 것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은 민간 필사본들 중 가장 인기가 높던 작품들이다. 경전, 소설, 의학, 역사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사대부 지식인에서부터 궁녀, 민중들에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필사하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세책본 맨 뒷장의 기록과 낙서들은 책을 둘러싼 조선시대 사람들의 활동과 사회 상황을 보여준다.

“부디 첩을 다섯씩만 두라.” “첩을 두지 않는 사람은 아주 졸장부라.”_『금송아지전』
“이 책을 두 권 다 묶자니 책 장수가 너무 많사옵고, 보는 이도 지루하고 또한 책이 쉬 상할까 봐 두 권을 분권하여 상하로 맸으니 차례로 보시라.”_『숙향전』
“우리 딸이 사정하여 싫은 것을 억지로 막필로 베낀다.”_『옥난기봉』
“이 아래 책은 없어서 등서(謄書)를 못하니 말을 계속 이어서 보려면 이 책을 광문(廣聞)하여 아래 내용을 채우라.”_『뉵긔녹』
“이 책을 등서하긴 하였으나 상권을 자세히 보지 못하여 의미가 닿지 않는 말을 그대로 베낀 데가 많으니 누구든 보시고서 오서(誤書) 난 데가 있으면 고쳐 주기를 바란다.”_『계상국전』
“이 책은 마구 돌리지 말게 하여라. 책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은 책을 펴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돌돌 말아 쥐고 손톱으로 박박 긁으며 손에 땀이 종이에 젖으니 어찌 아니 상하겠는가. 이 책 임자는 우리집 현부(賢婦)로다. 자자손손 전하여라.”_『쌍선기』

세책가들은 향목동, 누동, 약현, 묘동, 청파, 청풍백운동, 금호, 동호 등에 서른 곳 정도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대규모 형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개인 집 사랑방에서 책을 빌려 주는 형태의 영세한 세책가도 있었다. 따라서 세책가의 주인들은 몰락한 양반들이었을 것이다. 세책 영업은 도회지에서는 여름철에, 지방에서는 농한기인 겨울철에 잘 되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세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전당품으로 삼아 책을 빌리거나 비녀나 팔찌 등의 장신구를 팔기도 하였으며 빚을 내어 빌려보기도 하였다. 몇몇 세책 장부에 적혀 있는 전당품들은 가지각색이다. 반지, 대접, 주발, 요강, 귀이개, 귀고리, 타구, 벼루, 우산, 옷가지, 족두리, 접시, 화로, 은장도, 이발 기구, 주걱, 시계, 담요, 약탕기, 탕건, 은니, 수저, 비녀 등 무엇이든 가능했던 것 같다.
세책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표지를 삼베 같은 것으로 싸고 위에서 둘째 장책 사이에 끈이 달려 있었다. 책의 손상을 막기 위해 책장마다 들기름을 바르고 왼쪽 하단부에 침자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몇 글자 비어 있다. 또한 한 작품이 여러 권으로 되어 있어 각 권의 끝부분 내용은 다음 권의 서두 부분에도 일부 중복시켜 놓았다.

세책본 책들 가운데에는 ‘궁중본(宮中本)’도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일본 동양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열국지』이다. 궁중본이 사가(私家)로 유출되었다가 다시 세책가에 유통된 사례다. 궁중본은 조선 왕실에서 생산, 유통된 소설책으로, 궁중에서 읽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책이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등과 같이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궁중 실기류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궁중본 소설의 특징들이다. 우선, 책의 외형이 고급스럽고 권위가 있어 보인다. 표지 또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책 크기도 큼지막하다. 두껍고 질 좋은 종이에 정자체, 흘림체, 반흘림체 등 정갈한 궁체로 필사되어 있다. 상궁이나 궁녀, 사자관(寫字官) 등 한글 궁체에 능한 전문 필사자가 정성껏 베껴 썼을 것이다. 궁중본은 종이를 여유 있게 사용한 경향이 뚜렷하여 종이 매 면의 상하좌우 여백이 많고 줄 간격도 널찍하며 글자 크기도 큼지막한 것들이 많다. 특히 매 책 앞뒤 표지 외에도 빈 종이 한 장을 속지로 끼워 책 내용을 이중으로 보호했다. 또 다른 특징은 작품 길이가 방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10책 이상의 장편 소설이 주류를 차지하며, 수십 책 이상 100책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서사가 끝도 없이 전개되는 2부작 3부작의 연작 소설도 많다.
한글 소설이 유행해도 글을 모르는 민중들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 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들을 전기수(傳奇?), 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 강창사(講唱師)로 구분했다. 그 중 이야기책이나 소설을 낭독하던 전기수에 대한 이야기는 조수삼(1762~1847)의 『추재집』과 『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았다. 언문 소설을 잘 낭송했는데,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같은 것들이었다. (…) 워낙 재미있게 읽는 까닭에 구경하는 청중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그는 읽다가 아주 긴박해서 가장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읽기를 딱 멈춘다. 그러면 청중들은 하회(下回)가 궁금해서 다투어 돈을 던진다.(조수삼, 『추재집』)

종로거리 담뱃가게에서 소설을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연초(담배)를 썰던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정조실록』)

그때 전기수가 낭독한 소설은 임경업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임장군전』이었다고 한다. 심노숭의 『효전산고』에 당시의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 담뱃가게나 밥집에서 낭독하는 언문 소설로 예전에 어떤 이가 이야기를 듣다가 김자점이 임경업 장군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는 데 이르러 분기가 솟구쳐 미친 듯이 담배 써는 큰 칼을 잡고 낭독자를 베면서, “네가 자점이더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빌려서 베끼고, 돌려 읽고, 물려주고, 낭독하고.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극성스럽게 책을 좋아하고 아끼며 읽어주고 낭독하며 공부하는 모습들을 전해주고 있다. 사대부 지식인들은 스스로 공부하여 가족과 제자를 교육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학문과 생활을 기록하거나 저술하여 문집을 출판하고 또는 소설을 창작하여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읽으며 공부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기 위해 빌려서 베끼고, 소중하게 장정하고, 돌려 읽고, 물려주고, 낭독하였던 것이다.

작가소개

공병훈 교수
공병훈 교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 전공을 졸업했으며 현재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연구원으로 그리고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 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콘텐츠 산업 생태계와 비즈니스 그리고 창작과 생산 커뮤니티이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1623년 3월 5일 경상북도 종사관(從事官)으로 근무하던 김자중(金子中)의 아들 곡(?)은 예안현 김령의 집을 찾는다. 아버지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러나 한식제와 또 다른 제사가 겹쳐 김령이 출타 중이었기에 김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1616년 8월 24일 경상북도 예안의 김택룡의 서재에 비단을 곱게 입혀 장황(裝潢)을 마친 책이 도착했다. 지난 5월 김택룡은 당나라 시대에 인쇄된 《통감(通鑑)》, 《송감(宋鑑)》, 《성리대전(性理大全)》등 40여 책을 도산면에 사는 이운에게 보내어 장황을 맡겼다.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대구 달성에 사는 젊은 선비 서찬규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삶의 이치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더욱이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충청북도 옥천에 살던 김교준은 몇 년째 작고 낮은 책상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책만 보았다. 그는 책을 볼 수 있음에 행복해하며 독서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스물셋이 되던 해에 그에게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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