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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의 마지막 전투 “마혁과시(馬革裹尸)”

박태건

5월의 달천 평야에는 낯선 바람이 불었다. 망종(芒種) 지나 모내기를 막 끝낸 어린 모들이 긴장감으로 떨었다. 수로를 따라 무성하게 핀 억새의 무리가 왜군에 시달리는 백성들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종사관 김여물은 칼을 바투잡고 눈을 가늘게 떠서 중군 쪽을 보았다. 붉은 수술로 투구 장식을 한 무리의 기병들이 본대 앞쪽에 늘어서 있었다. 분명 저들 중에 순변사(특별군 사령관) 신립이 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것이 장군의 오랜 습성이었다.

9년 전 겨울 여진족장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도 신립은 언제나 선두에서 위기를 극복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글 읽기에만 전념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던 장군의 뛰어난 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진족들은 말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마술에 뛰어났다. 1만여 반란군들은 순식간에 경원부의 모든 진과 보를 점령하고 함경도 전체를 위협했다. 그런데 온성부사였던 신립은 불과 500여 기의 기병으로 출동하여 이들을 격파하지 않았던가. 그뿐 아니라 도망가는 무리를 두만강 너머로까지 추격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군신(軍神)’은 이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신립의 별호가 되었다.

오시(午時, 11∼13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김여물은 자신의 긴 수염 끝을 꼬기 시작했다. 무두질한 한지로 덧댄 가죽옷 안쪽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김여물은 혹독했던 그 겨울의 전투를 다시 떠올렸다. “그때는 장군도 나도 팔팔한 30대 중반이었지.”
그해 겨울은 눈이 유난히 많았다. 전날 1자 남짓 내린 눈은 근년에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토벌대로 징집된 병사들은 진지 여기저기 지펴놓은 모닥불 가에 모여 여진족들의 잔인함을 치를 떨며 이야기했다. 꽁꽁 언 두만강을 늑대의 무리처럼 넘어와서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한 반란군의 행적은 한양에서 토벌대로 온 별기군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굵은 눈발이 모닥불 위로 쉭쉭 거리며 타는 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급하게 만든 막사 하나가 눈 무게를 못 이기고 풀썩 주저앉았다. 모닥불 주위가 침울해졌다.
나팔소리와 함께 진지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한 무리의 기병대가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지휘 막사 쪽으로 대오를 이루며 들어왔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내는 듯한 말발굽. 투구와 칼집이 마구와 부딪히며 내는 소리. 잘 손질된 갈기를 흔들며 흰 입김을 품어내는 군마들. 막사에 도착해서도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대오를 정렬한 기마대는 한눈에도 훈련이 잘 된 정예병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기마대의 맨 앞줄에 어깨에 견장처럼 쌓인 눈을 털지도 않고 말 위에 우뚝 선 온성부사 신립이 있었다. 그는 토벌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첫 번째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것이었다.

북관유적도첩 북관유적도첩 북관유적도첩,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18세기 초, 고려대학교 박물관

신립이 온성부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경원도호부의 훈융진을 포위하고 장성문을 철거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이에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들어 화살 한 대로 적의 대장을 쏘아 죽였다. 두목이 쓰러지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본 여진족은 너도나도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북관유적도첩의 일정해위도에서는 화살을 손에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는 신립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알려진 바로, 그는 난이 일어나자 휘하의 부대를 데리고 출동하여 호인(胡人) 300여 급(級)을 베거나 사로잡았고, 두만강 너머 10여 개의 부락을 소각했다. 신립의 전공은 적의 예봉을 꺾었고 아군이 승세를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전장에 나설 때마다 붉은 수술로 치장을 한 신립의 기마대는 곧 토벌대의 자랑이었다.
신립의 전공에 힘입어 순변사 정언신은 이순신(李舜臣),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당대의 최고의 무관들과 함께 여진족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찾게 되었다. 춘분이 되자 순변사는 회군을 결심했다. 그런데 회군 도중에 후미가 공격받았다. 방심하던 차에 반격이 늦게 되자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여진족 특유의 늑대를 모는 형태로 갑자기 부대의 중간을 파고드니 지휘부가 고립되게 되고 퇴로를 차단당한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후미에서 시작된 적들의 도발은 오시(午時, 11∼13시)에서 신시(申時, 15∼17시)까지 이어져 이제는 토벌대가 거의 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신립이 몸을 빼어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하며 소리쳤다.
“바람의 중심을 베지 않고선 이 전투를 끝낼 수 없소이다!”
신립이 단기필마로 뛰어들자 여진족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신립은 오른손에 든 장검으로는 적을 베고 왼손의 단검으로는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귀와 같이 달라붙던 포위망이 조금씩 헐거워졌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신립은 종횡무진하며 적의 머리 40여 급을 베었다. 이 때 포위망을 뚫고 김여물이 궁기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신립이 데려온 온성부의 정예병들이었다. 성난 물살이 둑의 한 켠을 허물듯, 궁기병들이 휘몰아치며 활시위를 당기자 여진족들은 땡감처럼 후둑후둑 말 위에서 떨어졌다. 대열이 흐트러진 여진족들이 우우∼ 소리를 치며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열했던 격전의 한가운데에 신립이 있었다. 그의 갑옷은 피범벅이 되었고 어깨에서 배어나온 선혈이 검을 타고 눈 덮인 들판에 붉은 꽃으로 떨어졌다. 황급히 지혈을 하며 김여물이 말했다.
“부사 양반, 왜 이리 무모하시오?”
“이보시게 김 목사, 장부가 전쟁터에 나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어찌 구차히 살려고 하겠소.”
마혁과시(馬革裹屍). 전쟁터에 나선 장수는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 지냄을 자랑으로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이야말로 무인이 남길 절명시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그 때 신립의 활약으로 토벌대는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필사즉사(必死則生)이니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오. 살기를 급급하면 죽을 것이로다. 김여물은 마음 한 켠에 또아리를 트는 불안함을 신립에 대한 신뢰로 덮기로 했다. 그래 이번 왜적들도 그때처럼 돌아왔던 곳으로 쫓아낼 것이다. 김여물은 꼬았던 긴 수염 끝을 다시 풀었다. 주인의 깊은 심호흡을 따라 애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혈육 같은 녀석이었다.

오월의 해가 정오를 가리켰다. 약속대로 대장기가 좌우로 크게 두 번 펄럭이더니 호각소리가 세 번 났다. “북을 울려라.” 김여물은 부관에게 말했다. 부관이 말을 받아 전달하자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기병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진군의 북소리가 중모리에서 중중모리로 조금씩 빨라졌다. “1군 출정하라!” 김여물은 말갈기를 한 번 어루만지고 말고삐를 바투잡았다. 대열 중앙에 선 김여물이 속력을 내자 대형이 자연스럽게 화살촉 모양이 되어 왜군의 가운데를 찌르는 형국이 됐다. 무성하게 자란 억새가 종아리를 스쳤다. 강가를 따라 펼쳐진 너른 억새밭이 일천의 군마들이 내는 엄청난 진동으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번 첫 접전이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그는 풍랑 속의 바다에 떠 있는 듯했다. 문득 집에 두고 온 아들 ‘류’가 생각났다.

진군의 북소리가 휘모리로 몰아칠 적에 김여물이 이끄는 1,000 기병대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대 50보 앞까지 당도했다. 이 때 치사(馳射)를 알리는 휘각소리가 짧게 세 번이 울렸다. 신호에 따라 부대는 유엽전을 쏘며 적의 왼쪽 배후로 돌아나갔다. 이어 대장기가 다시 좌우로 크게 두 번 펄럭이더니 호각 소리가 세 번 났다. 이번엔 우익을 맡던 이종익이 기병 1,000기를 이끌고 습지대의 왼쪽에서 출격하여 적의 오른쪽 배후로 돌아나갔다. 순식간에 전쟁터가 넓어지면서 신립 장군이 예측한 대로 전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학익진이 펼쳐진 것이다. 장창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은 궁기병들이 파상적으로 퍼붓는 공격에 대항을 포기하고 단월역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두 번의 공격이 성공하자 본대에서 큰 함성이 일어났다. 곧이어 총돌격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났다. 북소리는 휘모리에서 자진모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김여물과 궁기병들은 한 대의 화살처럼 간격을 좁혔다. 이제 적의 심장부를 관통할 것이다. 어깨에서 시작된 팽팽한 긴장감이 엉치까지 내려와 온 몸이 쩌릿쩌릿해졌다.

김여물은 말을 달리며 간밤의 작전회의에서 신립이 조령 방어에 반대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이보게, 김 목사. 싸움에서 좋은 장소란 군사의 상황과 전투 방식에 지형지세가 유리한 것을 의미하네. 적들은 수백 년의 전란으로 공성전에 탁월하나, 우리 군은 태조 이래 태평성대로 전투 경험이 일천하니 일반적인 대응으로는 적을 물리치기 어렵네. 적에겐 없고 우리에겐 있는 것은 무언가? 기병일세. 이탕개의 난부터 사선을 넘나들었던 내게는 수족과 같은 이들이지. 접전이 시작되면 초반에 기마대로 저들을 쓸어버릴 걸세. 평야의 기병전에 익숙지 않은 저들은 분명 혼란에 빠질 테고 거듭된 패배로 저하된 우리 군의 사기도 오를 걸세. 또한 우리 군사의 대부분은 체찰사 유성룡이 급하게 모아주지 않았나. 내가 배수진을 친 것은 평소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을 사지(死地)에 몰아 탈영을 막기 위한 조치였네. 더불어 자네들이 걱정하는 저들의 조총은 재장전이 길고 명중률이 떨어지나, 우리는 바로 쏘고 빠른 장전이 가능한 활이 있다네. 궁기병을 활용해 적의 지휘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적들은 반드시 버티지 못하고 물러가게 될 것이야.”

왜적의 본대가 단월역까지 퇴각하자 적을 포위, 섬멸하라는 최후의 명이 내려졌다. 좌․우군은 물론이거니와 중군까지 돌격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그 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깃발들이 갑자기 오르며 콩을 볶는 듯한 조총 사격이 시작됐다. 동시에 강변 산자락에 강을 따라 북상한 소오 요시도시의 좌군과 단월역 산자락에 매복해 있던 마츠라 시게노부의 우군이 함성을 지르며 기마대를 공격해왔다. 당황한 군대를 일단 뒤로 물리려는데 기마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말발굽이 푹푹 빠지는 습지대였던 것이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군의 장창부대가 말위의 기병들을 공격했다. 왜적의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또 한 부대는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탄환이 빗발 같고 고함치는 소리는 산을 흔들었다. 조선군은 우왕좌왕 탈출구를 찾기 바빴다. 더구나 배후를 돌아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을 점령한 왜적이 호각소리를 신호로 조선군의 후미를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대열이 무너져 사방팔방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그것을 일본군의 장창 대형과 조총 사격, 2m 길이의 거대한 일본도를 든 노다치 사무라이들이 투망질하듯 잡아서 죽였다. 거칠 것 없는 살육이었다. 이제 전선은 탄금대까지 밀리게 되었다. 조선 병사들이 다투어 물에 빠지자.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 온몸에 피칠갑이 된 신립이 김여물을 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김 목사, 장계를 지어 전하께 올리게.”
김여물은 마상에 앉은 채로 붓과 종이를 달라고 하여 일필휘지로 글을 써서 시종에게 주었다. 장계를 보내고 나자, 신립은 김여물에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물었다. 김여물은 눈물어린 눈으로 "내 어찌 구차히 살고자 하겠소!" 라고 답하며 길고 검은 수염을 쓱 쓸었다. 신립과 김여물은 말없이 서로를 잠시 응시했다. 잠시 후 둘은 적병들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말을 달렸다.

작가소개

박태건
박태건
원광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원광대 글쓰기센터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했고, <전북문학지도>와 <익산역사유적지구 스토리텔링>의 책임 집필을 맡아 지역문화유산을 알리고 있다.
“신립(申砬)의 활약과 승전보”

초간일기 권문해 <초간일기>,
1583-02-15 ~ 1583-02-09(윤)
1583년 2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진에서 일어난 이탕개의 난을 해결하기 위해 최고의 무관과 장수들이 북방으로 향했다. 도순찰사로 임명된 정언신이 한양을 떠나 경원진을 향해 진격하는데, 경원진의 인근의 온성부사로 있던 신립(申砬)이 호인을 추격하여 흉노족들이 막사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5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경원진에 도착한 정언신은 신립 등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의 격퇴에 나섰다.

“신립이 전사하다”

신립장군 순절비 및 비각 정경운 <고대일록>,
1592-04-20 ~ 1592-04-28
1592년 4월 20일, 조선 땅에 상륙한 왜적들은 같은 달 25일 충주에서 신립과 마주했다.
충청도 충주 달천에서 조선군은 신립(申砬)이 패배하여 사망하였으며, 정예병 5백여 명도 모두 물에 빠져 숨지고 말았다.
이 소식이 1592년 4월 28일에 선조에게 보고되었는데, 궁궐이 떠들썩했다.

“병마절도사 김체건에게서 병자호란 무용담을 듣다”

성이성 성이성 <연행일기>,
1645-03-28 ~ 1645-03-29
1645년 3월 28일, 사신단 일행은 출발하여 안주(安州)로 들어갔다. 병마절도사 변사기(邊士紀)가 인사드리러 왔고, 우후(虞侯) 남두형(南斗炯)이 이어서 왔다. 부사(副使)가 백상루(百祥樓)에 오르자고 하여 함께 올랐다. 넓은 들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긴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깃배와 거룻배가 바람따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한 성의 촌락이 모두 눈 아래에 있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기상이 비록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웅건하고 상쾌함은 또한 평양 연광정(練光亭)보다 못하지 않았다. 병사(兵使, 병마절도사) 김체건(金體乾)이 영선대장(領船大將)으로 마침 성 안에 있어 함께 자리하기를 청한 뒤 병자호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경초관(京哨官)으로 수비를 맡게 되어 가을에 이 성에 주둔하였는데 갑작스럽게 병란을 만났다.

“황하수가 향병으로 적을 격퇴하다 ”

고대일 정경운 <고대일록>, 1592-08-11
1592년 8월 11일, 황해도 황주에 사는 훈련봉사 황하수(黃河水)가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풀이 무성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하나하나 활을 쏘거나 칼로 베어 죽였다. 왜적들이 황주를 지날 때는 황하수를 두려워하여 밥을 지어먹지 못하고 생쌀을 삼키면서 황급하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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