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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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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가시눈(본명 고윤정)
고윤정
"가시 같은 눈으로 예술이란 바늘로 감성의 심장을 찌르는 자" 라는 필명의 의미를 쫓아 좋은 작품을 위해 한 땀, 한 땀 나아가고 있습니다.
“친정에 간 여인들,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을까?”

김령 <계암일록>, 1620-11-13
『계암일록』에서 김령은 종종 아내가 친정에 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20년 11월, 1622년 2월, 1622년 6월의 기사에 실려 있다. 이를 근친(覲親)이라고 하는데,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만나는 일을 말한다. 김령의 처가는 내성(柰城)으로, 1620년 11월 13일, 셋째 아이를 대동하여 근친을 간 김령의 아내는 한 달을 친정에서 보내고 12월 13일에 돌아온다.
1622년 2월에는 며느리의 친정에 수연(壽宴 : 환갑잔치) 등 행사가 있자, 며느리를 근친보내기도 하였다. 1622년 6월 20일에는 그해로 84세를 맞는 장모의 생신이 다가오자, 큰 아들과 손자를 대동하여 아내를 근친보내기도 하였다.

“권문해, 목욕하러 고향에 가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8-08-28
권문해가 대구부사로 부임한지 4년이 되어갔다. 그동안 단 하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업무를 처리하느라 많이 지쳤다. 권문해는 고향집도 그립고 잠시 여유를 갖고 싶었다. 이에 권문해는 1588년 8월 28일, 목욕하는 일 때문에 말미를 얻고, 이를 계기로 고향에도 갔다 오고 싶어서 발행장(發行將)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권문해는 일찍 길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권문해는 고향에 있는 벗들을 찾아 만나기도하고, 빙모(聘母)를 위하여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종일 사촌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예천의 본가로 가 동생 정원(靜元)과 9월 9일을 맞아 열린 중양회(重陽會)에 참석하여 금당(琴塘)의 사람들을 만났다. 오후에는 자신의 처남이자 오랜 벗인 김복일(金復一)을 찾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권문해는 목욕을 한 다는 이유로 휴가를 얻어 대구를 떠나 예천과 상주 지역을 돌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9월 21일 다시 대구부에 도착하였다.

“탁족, 거문고, 국화잎을 띄운 술잔, 어지러운 춤 - 한창인 가을에 취하다”

이정구 <유삼각산기>, 1603-09-16
1603년 9월 3일, 가을은 한창이고 물소리는 콸콸 흐르며 기암 괴석과 동굴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큰 소나무가 하늘을 가렸는데, 푸른빛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이정구는 일행과 함께 발을 계곡 물에 담근 채 웃옷을 벗고 돌 위에 앉았다.
취사장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술과 안주를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어떤 이들은 술잔을 물에 띄워서 마시기 내기를 하고, 어떤 이는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자제가 단풍나무 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이정구도 국화잎을 따서 술잔 위에 띄웠다. 취하니 기분이 좋았다. 박수도 치고 발을 구르기도 하였다.

“휴가를 떠난 수령들이 여러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을 썩이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8-05
1751년 8월 5일, 급가를 받아 자리를 비운 수령들이 여러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을 썩이고 있다.
순흥부사(順興府使) 신종하(申宗湧訪), 풍기군수(豊基郡守) 민개(閔培), 김천찰방(金泉察訪) 조종렴(趙宗濂) 등은 딸의 결혼 일로 말미를 받았고 선산부사(善山府使) 조명규(趙明奎)는 부모 산소의 떼를 갈아입히는 일로 말미를 받아 올라간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여태껏 임지(任地)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재해(災害)의 손상을 조사하고 결미(結米)를 강구확정(講求確定)하는 일이 모두 긴급하여 읍(邑)이나 역(驛)이 차이가 없이 일이 넘치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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