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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영남만인소

김형수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세손(정조), 영화<사도> 중


만인소와 영남사림


정조 16년(1792) 윤4월 27일 10,057인이 연명한 대규모의 상소가 승정원에 봉입되었다. 이 상소는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하여 영남지방의 사림들이 올린 상소였다. 이 상소를 접한 정조는 파격적으로 소두(疏頭, 상소를 대표하는 사람) 이우李堣를 불러 상소문을 낭독하게 하고 울음을 겨우 참으면서 들었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친부로 아버지였던 영조의 명에 의해 죽은 이후 정조는 백부였던 효장세자孝莊世子의 아들로 입적이 되고, 정조는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고 정치문제화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해야만 했다. 영조와 정조대 금기시된 사도세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영남만인소가 올려지기까지의 상황은 정조대의 상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정계에서 축출당한 남인들은 영조 4년(1728) 무신란戊申亂으로 인하여 반역당으로 지목되었고,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에는 무신란의 진압을 기념하는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사실 영조 일대에 걸쳐 영남남인들은 무신란을 계기로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당시 영남지방에 대한 조정의 감시는 삼엄한 것이었다. 영남지방 유림의 동태는 지방관을 통하여 일일이 중앙에 보고되었고, 영남유림들은 서울 나들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즉위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노론 외척세력을 숙청한 정조는 노론 청명당과 남인 청류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준론 탕평을 추진해나갔다. 정조 12년 남인 청류인 채제공의 우의정 발탁은 영남 남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고, 이때부터 영남남인들 중 김희주․류이좌 등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용되는 이도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서인은 물론 일부 남인들까지 기피하던 윤휴의 후손과 이원정의 방손傍孫도 이즈음 등용되었다. 정조 16년에는 영남지방의 인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도산서원에서 특별과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정조 16년의 영남만인소는 이러한 정조의 영남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영조대와 정조대 전반기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던 것이다.


1728년 사도세자의 신원이 부당함을 알리는 소를 올린 것에 격분한 영남유생들이 세자의 신원을 위해 도성에 도착하여 소를 올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천휘록>,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무신란과 사도세자의 죽음


영조 4년(1728) 3월 15일 청주성이 반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반군들은 경종의 신위를 모시고, 경종을 위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반군들은 호남․호서․영남 뿐 만 아니라 경기․평안도까지 걸쳐져 있었고, 지방 전체가 영조정권에 대한 반대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란을 주도한 인물들은 호남지역의 박필현, 호서지방의 이인좌, 영남지방의 정희량 등이었고, 이들은 각기 소론과 남인의 명가名家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경악한 조정에서는 반란이 탁남濁南과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면서 윤휴․민암․이의징 등 기사대신의 자손을 투옥하는 한편, 영남출신인 조덕린趙德鄰․황익재黃翼再를 소모사(召募使,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영남에 파견된 조덕린과 황익재는 안동과 상주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여 안음에서 일어난 정희량의 반군이 북상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무신란의 주도자들이 경종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것에는 영조의 즉위과정에서 모호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로 숙종 20년 후일의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 태어나면서부터 노론집권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와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경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721년(경종원년) 8월 노론세력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고 관철시켰다. 이는 명백히 경종에 대한 노론집권세력의 무리한 강압이었다. 세제책봉을 실현시킨 노론은 세제책봉 2개월 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노론세력의 무리한 움직임은 소론급진파인 김일경 등의 공격을 초래하게 되었다. 김일경은 당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하고자 한 노론 대신을 역모로 공격하였고, 김일경은 이에 더 나아가 목호룡을 시켜 노론이 경종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삼급수三急手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창집․이이명․이건명․민진원 등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은 사사되고 노론세력은 축출되었다. 이것이 ‘신임옥’이다. 그러나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서거하게 되자 세제였던 연잉군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즉위즉시 김일경 등을 축출하고 즉위 이듬해인 1725년 을사반옥乙巳反獄을 통하여 노론사대신을 신원하는 등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세력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1724년 경종이 죽을 당시에도 동궁에서 보낸 게장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무성한 소문이 있었다. 영조는 노론세력에 의해 옹립된 왕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혐의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영조즉위 당시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노론 집권세력에 반대하던 소론․남인․북인계 인사들은 ‘무신당戊申黨’을 결성하고 영조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란은 안동을 비롯한 경상좌도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청주와 안음에서 일어난 산발적인 반란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정권은 영남사림들을 반역당으로 인식하면서 철저히 탄압해나갔다. 소모사로 임명되었던 황익재는 도리어 반군과의 연관성을 의심받아 난이 진압된 후 체포되어 귀성으로 정배되었다. 안동의 권구權榘 ․ 김민행金敏行 ․ 류몽서柳夢瑞 ․ 권덕수權德秀 또한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사족들은 영조연간 상당히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무신란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은 영조는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노론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영조는 무신란의 발생이 당론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고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역적으로 처단하겠다”고 천명하기까지 했다. 영조연간의 탕평책은 노론과 소론을 보합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였으며, 노론의 우위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소론을 등용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자는 것이었으므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영남남인들은 탕평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도세자의 죽음은 또 하나의 정치적 문제를 잉태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11)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영조는 정치가로서는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군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강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천인출신의 어머니,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등은 영조의 성격을 조급하고 민첩한 외골수로 만들었다. 그에 반해 사도세자는 말수가 적고 느린 편이었으며, 영조는 이러한 세자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 25년(1749)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당론의 처리를 둘러싸고 영조로부터 격노를 사기도 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세자는 몇 차례에 걸쳐 반발하면서 비행을 저질렀다. 결국 1762년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뒤주에서 굶어죽는 참극을 겪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히 그의 비행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경언이 올린 고변은 모두 10여조에 달하는 것이지만 알려져 있는 것은 5, 6가지 정도이다. ① 여러 사람을 죽였다는 점 ②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점 ③ 시전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점 ④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北城出遊〕 ⑤ 평안도로 여행을 갔다는 것〔西北行役〕 등이다. 이러한 세자의 비행은 질책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세자를 처형할 만큼 큰 죄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조는 신하들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세손인 정조의 애원을 뒤로 하고 뒤주를 들이게 하여 세자를 죽였던 것이다. 사실 관계 자료가 모두 소각되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구태여 추측하자면 평안도로의 여행을 들 수 있다. 평안도는 조선의 국경으로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세금은 중앙으로 납부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평안도관찰사는 정휘량으로 소론계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는 세자의 평안도 여행이 영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의 준비였기 때문에 영조는 이를 숨기기 위하여 세자의 개인적인 비리로 희석시킨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세자가 죽고 난 다음 영조는 곧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직접 시호를 사도思悼라고 지었으며, 세손으로부터는 이 문제를 다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뒤주를 들였던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으로 남는 사안이었다. 당시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영남남인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안동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아들 응원應元을 시켜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부자가 같이 처형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정조 16년 영남만인소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정계에서 축출당한 남인
영조 4년(1728), 무신란(戊申亂)으로 반역당으로 지목된 남인
영조 11년(1735), 사도세자,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
영조 25년(1749), 영조 15세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작, 당론의 처리를 두고 갈등
영조 38년(1762), 나경언 사도세자에 관해 10가지 죄목을 올리고, 결국 사도를 뒤주에 가둠
정조 원년(1777), 안동유생 이현도 부자가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상을 요구했다가 처형당함
정조 16년(1792), 사도세자 서거 30 주기를 겨냥해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10,057명이 연명한 상소 작성
정조 16년(1792) 윤 4월 27일, 상소 승정원에 봉입
철종 6년(1855) 5월, 사도세자의 신원과 임오의리에 대한 만인소 작성
영남만인소 주요 전개 과정


임오의리壬午義理와 영남만인소


정조 12년(1788) 청남의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등용되었다. 영조대에 한번도 배출하지 못했던 정승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영남 유림들은 무신란 1주갑一周甲을 맞아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상정하기 위하여 상소하였다. 정조 12년 8월부터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복합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끝내 봉소捧疏해주지 않자 동년 11월 왕의 행행行幸을 틈타 소두 이진동이 신문 밖에서 대전별감을 통하여 상언하였다. 이 상소는 수십 년간 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 즉 기사환국(1689) 당시 영남 남인의 동정과 무신란 당시 영남에 대한 정조의 인식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정조는 소두를 직접 접견하여 영남유림에게 유시할 특별교서를 내렸고 『창의록』책자를 수정하여 본도에 보내 간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조치는 노론의 반발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쳤다. 정조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를 죽게 한 직접관련자들과 자신을 해치려는 역신들을 부분적으로 처단했지만 아직 노론 벽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조는 왕권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와 심지어 자신을 해치려는 정적까지 포용하였다가 그의 집권체제가 공고해지는 12년부터 서서히 벽파를 물리치고 시파를 등용하였다. 그러한 계기를 마련하는데 큰 몫을 한 것이 채제공과 더불어 영남유소였다.
정조는 이후 ‘인재의 보고’이자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영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자신의 왕권강화와 관련하여 8도 중 최대의 사림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영남을 자신의 외곽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영남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단행하였다. 정조 16년 3월 실시된 도산별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산별시는 응시한 유생이 7,228명이나 되었고 거둔 시권이 3,632장이나 되는 성대한 행사였다. 정조는 시권을 친히 고열하여 강세백․김희락을 합격시키고 시사試士한 사실을 기록하여 책자로 발간하게 하였다. 한 달 정도 여유를 두고 영남에서는 사도세자를 신원하고 임오의리를 천명하는 영남만인소가 등장하게 되었다.



1855년(철종 6)에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의 작성 전말과 상소를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소행일록(疏行日錄)>

정조 16년의 영남만인소는 사도세자 서거 30주기를 겨냥해 무려 10,057명이 연명한 상소였다. 영남만인소는 노론을 향한 남인의 회심의 일격이었다.
영남에서 만인소를 준비한 것은 정조 16년 4월의 유성한柳星漢의 상소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을 폐기하고 여악을 지나치게 즐긴다”고 공격하였다가 처벌을 받았다.
유성한 사건을 접한 성균관 거접 영남출신 유생들은 윤4월 삼계서원에 통문을 보내 상소를 올릴 것을 촉구하였다. 통문을 접한 삼계서원에서는 안동․봉화․순흥에 다시 통문을 돌려 동월 10일 유소를 규합하였다. 당시 소회가 열린 장소는 통문을 접수한 삼계서원이었으며, 유회에서는 이우李堣를 소두로 천망하고 김희주․김시찬․류이좌 등 안동지역의 유림을 대표할 수 있는 소장 사림들이 공사원으로 참여하였다. 소두는 공사원이 주관하여 권점圈點의 선출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급히 올려야 할 경우에는 즉석에서 추천하여 임명하기도 하였다. 소두의 자격은 별도의 규정이 없이 유생이라면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대체로 학문과 기개가 남달리 뛰어나 향촌사림의 중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 선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남만인소도 역적 토벌과 관련된 긴급한 사안으로 인정되어 바로 이우를 소두로 임명하였다. 17일 삼계서원에서 발행한 소행은 순흥을 거쳐 20일 충주에 도착했다. 23일 한양에 도착한 소행은 재경관인 및 유생들과 상주에서 참여를 위해 올라온 姜世魯 등과 합류하여 소록疏錄을 다시 정리하여 27일 봉소捧疏하였다. 27일 최종적으로 봉한 상소의 명단은 10,057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영남만인소는 복합하는 과정에서 성균관의 근실謹悉을 얻지 못하여 바로 승정원에 봉입하고자 하였으나 근실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영조 이후 유소는 성균관의 근실을 얻어 승정원에 봉입되게 되는데, 간혹 성균관에서 근실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어 같은 입장의 관료들을 통하여 유소가 올라왔음에도 봉입되지 못하고 있다고 왕에게 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영남만인소도 전수찬前修撰 김한동金翰東이 직접 만인소가 봉입되지 않았다고 상소함으로써 정조가 알게 되어 상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상소문을 읽어본 정조는 소두를 비롯한 상소 유생들을 들이게 하여 접견하게 되었다. 정조는 직접 그들의 성관과 집안을 물어보고, 소두 이우로 하여금 직접 상소를 읽게 하였다.
만인소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영남의 사림들이 ‘의리義理’(사도세자문제)를 심중에 간직한지 30여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던 차에 최근 유성한의 흉악한 상소를 전해 듣고 상경했으며 ②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 및 영조와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반역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원통히 죽었으니 마땅히 그 역도들을 처단하여야 할 것이며 ③ 의리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 그 것은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분간하는데 더 차원 높은 의리를 찾을 수 있으며 ④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권념眷念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사림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몸 바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사도세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남만인소는 노론 벽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영남만인소를 모두 들은 정조는 영조의 금령과 자신의 즉위교서를 들어 신중론을 견지했다. 정조는 영남만인소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시세를 의식해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를 계기로 사도세자 신원문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유생들은 정조의 신중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에 10일 후 10,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이때에는 1차 상소에 부연하여 사도세자의 신원문제에 대하여 더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김한동․이우들을 불러 환향을 종용했다. 결국 3차 상소를 준비하던 도중 유생들은 정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정조 16년의 영남만인소는 사도세자의 신원에는 실패했지만 사도세자를 죽이게 된 임오의리의 본질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론 시파인 이병모․서유린 등이 동조하는 가운데 이조참판 김희는 소두 이우를 참봉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또한 우의정 박종악은 임오역적의 토벌을 주장하며 벽파의 거두 김종수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정조가 김종수를 비호하여 극단적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노론 청명당이 서서히 분열해 벽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신원과 임오의리에 대한 만인소는 철종 6년(1855) 5월 다시 한 번 올려졌다. 이번의 소두는 이휘병으로 모두 10,432명이 참여하였다. 이휘병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현감 이이순의 아들이었으며 동생 이만희가 퇴계의 종손으로 입후되는 등 이휘병 일가는 예안의 진성이씨 가문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상소에서 영남 사림들은 영조에 의해 죽은 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정조가 “나라의 큰 의리는 영남에 있다”고 말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국가의 의리를 바로세우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에 장헌세자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하루 빨리 거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서고 선왕을 계승하는 도리에도 합당하다는 것이다. 처음 소유들이 철종 6년 정월 도산서원에 모였을 때 사도세자의 추존에 대한 사안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전모를 밝혀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위한 임오의리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자 하였다. 정조 16년 영남만인소로 인해 공론화된 임오의리 문제는 1800년 정조의 사망과 동시에 세도정권의 대두와 벽파의 반격으로 인해 남인들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외척의 전횡이 누적됨으로 인해 정치․사회․경제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를 정면으로 비판할 경우 정치적 보복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영남사림들이 사도세자 탄신 120주년을 맞추어 만인소를 배경으로 임오의리를 공론화 하려 한 것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목적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쟁점을 제기할 경우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들은 정치적 쟁점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참여에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결정된 것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1855년(철종 6)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그러나 이 상소에 대하여 철종은 비답대신 승정원에 “되돌려주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렸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문제를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상소는 비록 수용되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남사림들을 결집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881년 영남유림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해 위정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한 이만손만인소는 이미 이 당시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소개

김형수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 소장.
조선시대 지역사회 구성과 학파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 및 사림들이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전체’와 ‘부분’, ‘보편’와 ‘특수’라는 관점으로 역사와 시대를 읽고 해석하고 있다.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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