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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그녀는 조선의 예인(藝人)입니다

김창래


몇 년 전, 나는 모 대학교 영상과 학생들이 고감도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놓은 작은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DSLR 카메라로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감도를 바꿀 수 있지만, 그 당시 스틸 카메라 시절에는 촬영하기 전에 미리 필름의 감도를 결정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전시된 학생들의 작품들 중, 저학년 학생들의 작품과 고학년 학생들의 작품 사이에는 꽤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생하고 있었다. 사전에 소재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대학 1학년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변 풍경을 촬영하여 출품하였고, 그에 반해 4학년 학생들의 작품들은 다양한 인물을 근접으로 다가가 촬영한 작품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발생한 차이점을 흥미롭게 여기던 결과, 한 가지 중요한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인물을 대상으로 한 예술 행위는 예술을 펼치는 예술가에게 준비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준비할 시간을 우리는 성숙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예술가 그 자신이 성숙해질 때, 비로소 인물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생각을 확장시키면, 스토리 속의 등장인물 캐릭터에 다가가는 행위 역시 등장인물의 본질적인 내면과 조우하려는 시도에 많은 시간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인물을 피상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캐릭터 구축에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 측면에서 얼마 전 스토리테마파크를 통해 알게 된 조선의 어느 관기는 나에게 새롭게 해석하고, 다가가기를 시도하게 해준 여인이다. 아마도,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바라본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기로 한다.


편견 속의 예술가... 기생

나는 아주 어릴 적 TV에서 <춘향전>을 본 이후, 스무 살이 넘어서, 다시 <춘향전>을 다시 본 적이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관기 월매의 경박하고 물욕적인, 때론 자식의 고통을 방관하듯 하는 행동 때문인지, 나는 한때 기생이란 존재를 받아들임에 있어 부정적인 관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에게 기생이란 노래와 춤, 색(色)을 통해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조건반사적 이미지인 것이다. 2014년에 제작된 주지훈 주연, 민규동 감독의 영화 <간신>을 보면 나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조선 기생의 단면이 그려져 있다.


영화 간신


영화 속에서 연산군은 “단 하루에 천년의 쾌락”을 누리고자 채홍사 임숭재로 하여금 처녀, 유부녀, 기생, 종, 의녀(醫女), 무당, 여승(女僧), 과부, 첩을 불문하고, 전국의 경국지색들을 무차별적으로 모집하게 하고 성균관과 홍문관을 모두 여인 양성소로 쓰고자 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된다. 연산군은 뽑힌 기생의 명칭을 운평(運平)이라 했다. 그는 자기의 독특한 분류법으로 운평(運平), 계평(繼平), 채홍(採紅), 속홍(續紅), 부화(赴和), 치여(治黎)의 칭호를 두는 한편, 따로 뽑은 여자를 흥청락(興淸樂)이라 했다. 사림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채홍사(採紅使)를 조선 팔도에 파견하여 각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은 뒤에 원각사를 헐고 그 자리에 흥청의 숙소를 마련하였는데 당시 흥청의 수만 해도 천여 명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흥청망청” 이란 말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인데, 무수한 신진사류를 숙청하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했던 연산군이 결국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 흥청들과 주색에 빠져 놀아나다 망했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기생엽서


기생이 나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생엽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인기 있는 사진엽서의 단골 모델은 기생이었다. 1909년 관기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 <기생엽서>에는 권번, 기생학교,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 등의 공연 공간과 단성사, 조선극작, 우미관, 그리고 박람회 무대에서 춤과 노래, 악기를 연주하던 기생들의 모습을 담겨졌다. 결국, 창기와 비슷하게 통제를 겪으면서 소위 몸 파는 여성의 이미지로 전락하며 “상품화”된 것이다. 지금까지 수집된 <기생엽서>는 게이샤들의 얼굴을 촬영하여 사진엽서 형태로 담은 것과 일치하는 수법이었고, 다이쇼 사진 공예소, 히노데 상행 등에서 발행한 것이 많았다. 이는 식민지 통치 시절 기생의 상품화라는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기생의 존재는 조선의 기생제도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릇된 이미지로 전락하였지만, 실재 기생들 중 일부만이 경제적인 대가를 받고 성을 제공했으며 대다수의 기생들은 예인이었다.


조선 기생의 구조를 살펴보면, 국가에 소속된 '관기(官妓)'와 그렇지 않은 '민기(民妓)'로 나뉜다. 관아(官衙)에 예속된 관기의 역사는 기생의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찾기도 하고, 정약용과 이익에 의해 고려 때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어찌됐든, 조선으로 이어진 기생들은 오랜 시간 숙련과정을 거쳐 완성된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장악원(掌樂院)에서 노래와 춤을 익혀서 왕실(王室)잔치 때 출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때 관기의 가무를 여악(女樂)이라 했고, 이 여악의 전통이 관기제도가 없어진 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妓生)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그리고 탑앙모리(塔仰謀利), 세 가지 계층으로 서열화 되어있었는데, 이들 역시 전업 성매매 여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다수의 기생들은 비록 서열은 천인계급에 속했지만 춤과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酒宴席)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이었다. 특히 일패(一牌) 기생들 중에는 황진이나 뛰어난 여류 시인이었던 이매창처럼 서사(書史)와 시가에도 정통한 문인이자, 화가 그리고 뛰어난 명연주자가 많았다. 그런 여인들 중 또 다른 한명이 바로 몽접이 아닌가 싶다.


문학 예술가 양경우와 표현 예술가 관기(官妓) 몽접의 조우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양경우(1568~?)는 장성현(長城縣-현재의 장성군)의 관리로 있으면서 관찰사(=방백)로부터 연해일대를 순찰하고 오라는 명을 받는다. 이에 양경우는 1618년 4월 15일부터 5월 18일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의 쌍계사와 쌍계사에 딸린 암자인 불일암, 신흥사 일대를 순찰하면서 쓴 유람록인 『역진연해군현 잉입두류 상쌍계신흥기행록 (歷盡沿海郡縣 仍入頭流 賞雙溪神興紀行錄)』 에는 우연히 재회한 관기 몽접에 대해 언급한 글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당시 양경우는 지방관의 신분이었기에 관아에서 숙박하기도하고 사찰이나 친지의 집에 유숙하기도하였으며 유람 도중에는 가끔 고을 수령으로부터 융숭한 향응을 대접받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평소 알고 지내던 고을 수령인 박유귀(朴惟僮)의 초대로 단양절(端陽節) 저녁에 마련된 조촐한 술자리에서 몽접이란 관기를 다시 만났다는 내용이다. 언뜻 읽히기로는 ‘하룻저녁 술자리에서 관직에 있는 관리가 노래와 춤, 색(色)을 통해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기생이 만났다.’ 정도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을 그렇게 피상적으로만 읽는다면 그건 유산록을 쓴 문학 예술가인 양경우와 종합 표현 예술가인 몽접의 조우를 지나치게 표피적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기생에 대해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에서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의 예인(藝人), 기생

2015년 한효주 주연, 박흥식 감독의 영화 <해어화>는 1943년 마지막 남은 경성의 기생학교인 대성권번 출신의 소율과 연희, 두 여성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엇갈린 운명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해어화


1927년 이능화(李能和)가 지은,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모든 실상(實狀)을 상세히 밝힌 조선해어화사 [朝鮮解語花史]에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 <해어화>는 영화 <아마데우스>와 흡사한 캐릭터로 시작한다. 한효주가 열연한 소율은 마치 살리에르와 유사하다. 그녀에겐 어느 정도의 재능은 있으나 많은 대중에게 감동을 전할만큼의 예술의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그런 그녀에게 대성권번의 기생이자 소율의 어머니 산월이 말한다.

“꽃은 한번 꺾여 화병에 꽂히면 그 뿐, 원하는 것을 이뤄줄 사내에게 꺾이려고 피는 게 바로 기생이다.”

이처럼 구시대의 산물이자 여성의 상품화라는 연유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인 기생의 존재는 사실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있어서는 소위 초기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양가적 측면으로 존재한다. 계량, 계생으로도 불리웠던 이매창은 어떠한가. 그녀는 황진이, 김부용(金芙蓉)과 더불어 조선시대 삼대 시기(詩妓)로 꼽히는 여류시인이다. “이화우 흩뿌릴 제“는 수많은 뭇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친 채 고결함을 유지하던 그녀가 자신보다 스무 살 많은 유희경을 만나 사랑에 빠진 후의 애틋한 심경을 그리고 있다.


이화우 (梨花雨) 흩뿌릴 제

계랑

배꽃 흩어 뿌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계량 역시 부안현 아전 이탕종의 서녀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기녀가 되었고, 또한 관기였던 그녀는 평생 부안을 떠날 수가 없었다. 훗날 계량은 당시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순시하던 허균과도 가슴 먹먹한 교감을 나누게 된다. 아마도 허균은 계량을 처음 만나자마자 그녀의 시적 재능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허균 역시 신분의 제약 때문에 날개를 펼치지 못했던 서자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고, 그 또한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에 항거하는 개혁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기에 비록 관기였지만 훌륭한 문인이었던 계량과는 첫 만남 이후 오랫동안 친구이자 좋은 동료 아티스트로서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훗날 그러한 연유로 허균은 서른 여덞의 나이로 그녀가 요절하자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너무도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그 외에도 몇 년 전 온라인에서 걸그룹 f(x) 설리와 완벽한 닮은꼴로 누리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조선권번 3대 기생 중의 한 명인 이난향은 훗날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가곡을 레코드판으로 녹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결국, 조선의 기생들은 지금의 언어로 말하자면 엔터테이너로서 당당히 이름을 떨쳤으며, 대한제국 이후엔 여성예술사를 새롭게 구축한 예인들이었던 것이다.


감히 누가 처음부터 예술의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본디 예술이란 아름다움의 재현이라는 절대 목표와 더불어 치유와 위안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것의 표현 형태가 글이던 그림이던 진실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작가 폴 슈레이더의 “작가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시나리오는 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작가들은 영화를 연구해서는 안 된다. 작가란 자기 자신을 연구해야한다”

만약 예술가가 자신을 연구하는 존재라면 아마도 조선의 기생들은 그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이별에 대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회의 부당한 제도에 대해 고민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태생적으로 부모를 잃고, 알 수 없는 곳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매일 밤 다른 남자들 앞에서 웃어야 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시와 서예와 노래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예술가이자 좋은 청취자(聽取者)이자, 이별과 사랑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고민을 해보았던 시인(詩人)이기도 하다.

다시 양경우와 몽접의 이야기로 돌아와 본다면, 그날 밤 20년 만에 다시 조우한 양경우와 몽접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마도 그 자리에는 고을 수령인 박유귀가 시종일관 동석해 있지 않았을까? 물론 무인인 박유귀는 주로 양경우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을 테고, 이제 마흔이 넘은 몽접은 분명 예전의 미모는 헤아리기 어려웠겠지만 양경우는 필시 묘한 노스탤지어를 느꼈을 터이다. 어쩌면 몽접은 20년 전 그녀가 이십대였을 때 양경우에게 불러주었던 그때의 노래를 다시 불러주었을까? 그 노래가 무엇이든 그날 몽접이 양경우에게 불러 준 노래는 필시 한때 뭇 남성들의 우상이었으나, 평생을 태생적 한계에 갇혀 살았던 한 여인이자 예인의 애환과 사랑이 곁들인 노래였음에는 분명할 것이다. 글쓰기의 마지막에 접어들자, 이내 몽접의 노래가 내 귀에 드리는 듯하다. 예술가인 그녀의 노래가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나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든다.



작가소개

김창래
김창래
영화감독 겸 서울예대 영화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2005 <오로라 공주>로 데뷔하였고, 2013 <렛 미 아웃>, 각본, 연출을 하였다. 현재 차기작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 20년만에 만난 관기 몽접,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하다 ”

양경우, 역신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05 ~
1618년 5월 5일, 남도일대를 유람중이던 양경우가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 음악과 시로 어울렸던 광대와 양반, 눈물로 헤어지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6-09-16
1846년 9월 16일, 서찬규는 며칠 간 망설였던 일을 하고 말았다. 창부(倡夫)들을 내보낸 것이다. 사실, 반년 동안이나 와서 의지했던 터라 그의 마음도 참으로 서운하고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창부 일행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 돌아간다고 말해놓고 행장은 이미 꾸렸음에도 눈물이 앞을 가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간 서찬규 생원 댁에서 편안하게 지냈는데, 이제 어디로 가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맑은 날씨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

김령, 계암일록,
1625-01-03 ~
1625년 1월, 추운 겨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그네 신세의 김령에게 아침 일찍 지인들이 찾아왔다. 김령은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는데, 무리 중에는 김령을 찾아온 시희(詩姬) 얼현(乻玄)이 있었다.
그녀는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자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자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시권(詩卷)을 가지고 김령을 찾아왔는데, 그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 밀양 기생 보금을 연주하다 ”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02-04 ~ 1519-07-09
1519년 2월 4일, 황사우는 밀양의 수산현과 금동역을 거쳐 밀성(密城)에 들어갔다. 집무를 마친 황사우는 저녁에 기녀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
7월 8일, 아침 일찍 양산군을 출발하여 밀양에 이르렀다. 춘추 포폄 때문에 감사가 좌수사와 우수사와 함께 집무를 보았다. 황사우는 이들을 뵙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황사우는 밀양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기녀를 다시 불렀다. 그녀를 보자 황사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금(寶琴). 보배로운 거문고라는 뜻이었다.
7월 9일, 밀양. 감사와 좌수사, 우수사가 누각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물렀다. 여러 훈도를 고강하였다. 황사우는 저물 무렵 방으로 내려와 밀양현감과 전 고령현감과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좌수사와 우수사가 감사에게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황사우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는데,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칠원현감과 영산현감에게 대전(大典)을 고강했다. 이날도 황사우는 보금을 몰래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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